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1)
높으신 분의 적의는 끔찍한 일이고, 반대로 과분한 호의는 난감한 일이다. 다행히 끔찍할 정도의 적의는 아직 받은 적이 없지만 난감한 호의는 눈 앞의 공작에게 받고 있다. 혼사를 생각해주는 공작이라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을까.
차라리 업무적 용건으로 딱 쿨거래하고 헤어지는 황금공이 대화 상대로는 제일 편하다. 그 양반은 A를 입력하면 B가 나온다는 게 워낙 확고한 양반인지라. 다른 공작들은 A를 입력하면 뭐가 나올지 감이 안 잡힌다.
“요즘은 혼인을 늦게 하는 추세라더군.”
“예, 저도 그렇게 들은 것 같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다.
“내 딸아이도 딱 칼 군 나이대에 혼인했었네.”
“기억납니다. 그때 듣고 많이 놀랐었지요.”
“하하, 아비인 나는 어땠겠나.”
전승공은 은근슬쩍 황태자비를 언급하며 ‘네 나이도 늦은 거 아니니까 생각은 해둬라.’ 라고 우회적으로 찔렀다. 그나마 이 이상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
하지만 황태자비의 혼인은 비교 대상으로 두기에 너무 특이 케이스 아닌가? 황태자비는 당시 황태자 책봉은 커녕, 2황자파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던 시절의 1황자와 정략이 아닌 사랑으로 결혼을 한 기적의 케이스니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혼사로 인해 2황자의 승리가 유력하던 계승 분쟁은 1황자의 급격한 떡상으로 판이 엎어졌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북방에서 전쟁이 터졌었지. 만일 그때 전승공이 북방에서 무너졌다면 2황자의 황태자 책봉이 이루어졌을 거다.
“이런.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아닙니다. 각하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2황자의 황태자 책봉이라는 혀 깨물고 죽고 싶은 평행세계를 상상하던 중 전승공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
“아, 각하.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음? 나에게? 거참, 급하게 올라왔을 텐데 언제 선물까지 챙겼나.”
말로는 뭘 굳이 그런 걸 준비했냐는 어투지만 당연하게도 기분은 썩 좋아 보였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언제나 기쁜 법이지.
품 속의 수첩을 꺼내 이름이 빼곡히 적인 페이지를 찢어 전승공에게 건넸다. 겉으로는 볼품없어 보이는 선물이어도 전승공이라면 분명 만족할 선물이다.
“아카데미에 뛰어난 학생들이 많더군요. 제국의 미래가 실로 밝습니다. 이 역시 황제 폐하의 은덕이겠지요.”
“그거 정말 기쁜 소식이로군.”
내 말에 전승공이 흡족해하며 종이를 받았다. 정보부장의 화려한 배신을 당하기 전날에 정리한 예비 공무원 명단. 그중에서도 군부로 가면 괜찮을 것 같은 녀석들 이름을 따로 빼두었다.
비록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추천이지만 그 학생들도 분명 기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려 군부 수장인 전승공에게 다이렉트로 꽂히는 추천 아닌가. 이런 기회는 일생에 한 번 오기도 어렵다.
“고맙네, 칼 군. 의욕 넘치는 친구들이 제국군을 채울 걸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군부 쪽에 어울리는 사람을 간간이 찔러주면, 그 다음에는 군부에서도 감찰부에 어울리는 인재를 찔러주는 경우도 있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지. 아름다운 모습이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강녕하십시오.”
전승공에게 선물도 전달했으니 슬슬 물러날 시간. 더 시간을 보냈다가는 아카데미 복귀에 늦을 수도 있다.
“칼 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네.”
“경청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를 붙잡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작은 미소를 띄운 전승공이 보였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네. 내가 누려서는 안될 것을 이제야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니까.”
“…감사합니다, 각하.”
“무얼. 잘 가게. 제도로 돌아오면 찾아오고.”
막상 전승공의 얼굴을 보자 차마 하지 못했던 6검에 관한 이야기. 내 개인적인 기쁨과 별개로 6검의 부각은 전승공의 위세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못했는데, 이리 먼저 나서서 언급해줬다. 자신은 괜찮다고.
고개를 숙이며 부사령관실을 나갔다. 오늘은 예비 노예들을 선물할 수 있어서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날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쌓여버렸다. 이러다 이자도 못 갚고 파산하겠네.
이자도 못 갚을 것 같은 은인을 보고 오니, 나에게 이자라도 갚았으면 하는 개새끼들이 반겼다.
[ 아! 꽃다운 20대의 아카데미 생활! ]부장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누더기 플래카드. 미친 존재감을 뽐내기에 억지로 시선을 돌려도 계속 보게 된다.
‘저게 아직도 있다고?’
분명 찢어서 버렸는데. 지독한 새끼들, 버린 걸 찾아서 부활시켰구나. 찢는 게 아니라 불태워야 했어.
“아, 부장님! 오셨어요?”
멍하니 플래카드를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들려오는 1과장의 목소리. 시선을 돌리니 1과장이 양손에 술병을 하나씩 들고 헤헤거리고 있었다. 웃어? 웃음이 나와?
“지난번에 부장님 없이 파티한 게 너무 아쉬워서 다시 하기로 했어요!”
“나 없이…”
분명 내 기억으로는 파티 자체를 못하게 뒤엎었다. 이 새끼들, 나 없는 사이에 기어코 파티를 한 모양이다. 대체 누구를 위한 파티야. 주인공이 없잖아 미친 것들아.
“짠! 부장님은 특별히 잔이 아니라 병으로!”
해맑게 술병을 내미는 1과장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술병을 잡아 1과장의 머리로 시선을 올렸다. 이 병으로 머리를 후려치면 죽을까? 죽지 않을 정도로 내가 조절할 수 있을까?
“지금 돌아가시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잖습니까. 가기 전에 시원하게 마시고 가시죠.”
어느새 낄낄거리며 나타난 2과장. 이 새끼 배를 병 조각으로 찌르면 죽을까? 그것도 죽지 않을 정도로 어떻게 조절을…
“자! 마십시다!”
자신의 술잔을 들이밀며 외치는 2과장과 자연스레 끼어드는 1과장, 3과장의 모습은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슬쩍 구석을 살피니 차장과 5과장은 잔만 손에 든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역시 감찰부의 몇 안되는 양심인 것 같다. 쟤네마저 없었으면 정말 미쳤을지도 모르겠네.
“…그래.”
당장이라도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 날뛰기 시작하면 아카데미에 복귀하는 시간만 늦어지니까. 의도한 것이라면 개새끼고, 우연이라면 머저리들이다. 우리 애들은 대체 어느 쪽일까.
그렇게 애들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적당히 잔만 부딪치다가 빠져 나왔다. 오래 있다가는 혈압 문제로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그 와중에 내가 나가도 멈추지 않고 계속 마시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마시고 싶었는데 마침 제도에 온 나를 핑계로 판을 깐 것 같다.
‘애초에 툭하면 마시던 것들이.’
감찰부는 업무 중 음주가 허용된 부서다. 자주 귀족들과 충돌하고 칼질하며 다니는 부서다 보니, 업무 스트레스가 상당하기에 받은 배려 아닌 배려. 맨정신으로 버티기는 힘들 테니 술이라도 마시며 지내라는 의미다.
물론 감찰부에는 맨정신이어도 여러 의미로 제정신이 아닌 것들이 많기에 불필요한 배려기는 하다. 안 마셨어도 잘 지냈을 걸.
아카데미로 복귀하기 직전인 나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날아왔다.
좋은 소식은 황실의 연락까지 오지는 않았다는 것. 연달아 공작 둘을 만나서 혹시 황태자도 소환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다행히 황태자도 어지간히 바쁜 놈인지라 나를 부를 여유는 없는 모양. 이런 걸로 좋아하는 나 자신에게 자괴감이 살짝 들었다.
나쁜 소식 하나는 정보부장이 잠수탔다는 것. 누구 덕에 제도까지 왔으니 비대면이 아닌 대면 항의를 위해 정보부로 찾아갔다. 그런데 부재 중이라고 하더라. 개새끼, 눈치 채고 튀었구나.
“아카데미로 모시겠습니다.”
결국 소득 없이 마탑으로 가니 텔레포트 마법사 하나가 반겨주었다. 이미 마종공이 말을 해둔 모양. 괜히 사람 찾을 필요 없이 빠르게 아카데미로 이동할 수 있었다. 처음 파견 갔을 때도 이렇게 갔으면 멀미로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 그 시기 마탑은 워낙 바쁘니 원.
“부장님. 마종공 각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뭐지?”
“나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면 된다, 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탑으로 복귀하는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 마종공의 말이라길래 움찔했지만, 우려한 것과 달리 평범한 말이었다.
제자기는 하지만 정체도 밝히지 않은 상태로 가르쳤고,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가르친 정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 내가 루이제가 속한 동아리의 고문이니 신경 좀 써달라는 말이겠지. 어려운 요구는 아니다. 애초에 루이제는 내가 보살피는 대상이니까.
뭐, 오히려 하나뿐인 제자를 직접 보살피겠다며 아카데미로 날아오지 않는 게 어디인가. 아카데미 교사 자리를 언급했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마종공의 말은 진심과 그냥 하는 말의 구분이 어려우니까. ‘언제 밥 한 번 같이 먹자.’ 라는 말이 정말 식사 약속으로 날아오는 수준이다.
‘하루가 왜 이리 기냐.’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체감 시간으로는 공작 한 명당 사흘은 소비한 느낌인데 아직 하루가 지나기는 커녕 해도 안 떨어졌다. 몸은 멀쩡하지만 정신력이 너무 소모됐다.
이제는 슬슬 내가 왜 제도로 끌려 갔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루이제가 마종공의 고유 마법을 쓴 거? 사실 정말 별일 아닌데 나하고 교장이 호들갑을 떤 게 아닐까? 로판 주인공이 강한 마법 좀 쓸 수도 있지. 내가 로판 감수성이 부족했네.
‘시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정말 피곤하기는 한 것 같다. 동아리실에서 눈 좀 붙일까. 어차피 내가 뭘 하든 부원들은 신경도 안 쓸 것 같은데.
일단 까먹기 전에 통신구를 꺼내서 교장에게 연락을 걸었다. 복귀 신고 겸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정도는 공유해야 하니까. 아마 루이제와 마종공이 무슨 관계인지 고민하며 지금까지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다.
‘피곤하네.’
쉬고 싶다. 오늘따라 너무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