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12)
로판 속 공무원 612화(613/945)
약 300년 전. 세계수가 소실되며 지상의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하였고, 나의 상징과도 같던 초목이 불타올랐기에 지난 300년 동안 반쯤 죽은 신으로 지냈다.
다행히 이 무능하고 나약한 신을 잊지 않고 섬겨준 아이들이 있었기에 완전히 신앙을 잃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더욱 흘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나도 지난 종교 전쟁을 거쳐 무너진 신들처럼 과거의 존재가 됐을 터.
허나 세계수가 부활했다. 그로 인해 나의 존재는 다시금 지상 위에 피어났다. 나의 아이들과 다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령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무너져가던 나의 신앙이 굳건해졌다. 에넨의 아이들이 나와 영원한 푸른 하늘의 존재를 인정한 이후로는 종교 전쟁 시기의 위세에 근접했다.
– 요즘 많이 바쁜가 봅니다. 만나는 것도 힘들군요.
이제 그 위세를 바탕으로 다른 신에게 접촉하는 행동이 가능해졌다.
세계수에 깃들어있는 영원한 푸른 하늘과 달리 천상에 머물며 대륙 곳곳을 주시하는 태양신.
아무리 나와 영원한 푸른 하늘이 신앙을 되찾았어도, 발끝에도 닿을 수 없는 강력한 존재.
– 덕분에 이제서야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넨.
종교 전쟁의 승리자이자 신들의 왕인 에넨.
거의 수백 년 만에 에넨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 하늘의 태양과 대지의 초목은 언제나 함께하되 닿을 수 없는 것. 한 쪽의 의지가 두텁지 않은 이상 닿지 않는 것이 정상일지니.
내 인사에 에넨은 늘 그렇듯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빙빙 돌려 말했다.
– 허나 싱그러운 초목이 다시금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었으니, 홀로 대지를 바라보던 태양도 기쁠 따름입니다.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반갑다는 표현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 헌데 태양과 초목이 만나는 경사스러운 날. 어찌 태양을 품고 초목을 매만지는 하늘은 보이지 않습니까?
– 영원한 푸른 하늘은 자고 있습니다. 깨우면 화를 낼 것 같고, 가자고 해봤자 귀찮다고 할 게 뻔하지요. 그래서 그냥 두고 왔습니다.
그 말에 에넨은 잠시 침묵하더니,
– 쯧.
짧게 혀를 찼다.
아주 미약한 소리였지만 신에게 있어 소리의 크고 작음은 의미가 없는 법. 에넨도 다 들으라는 듯 혀를 찼을 것이다.
– 아쉽습니다. 태양이 정화해야 할 죄악과 근심을 하늘이 대신 짓눌렀으니, 마땅히 감사를 표해야 하거늘.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말과 달리 미미한 언짢음이 담긴 목소리였기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에넨이 사흉과 칠죄라고 불리던 악신들을 봉인한 것은 잘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신들을 꺾고 승리한 에넨조차 열하나나 되는 악신들을 완전히 처리할 수는 없었기에, 영원한 푸른 하늘이 관리하는 북방보다 더욱 북쪽의 혹한에 그것들을 가두었다.
신에게 있어 망각보다 가혹한 형벌은 없기에.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채로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제아무리 강성한 악신이라도 몰락할 것이기에.
에넨은 그것을 노리고 악신들을 약화시키고 있었으나, 기다림의 결실을 남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걸 영원한 푸른 하늘과 은인이 가져갈 줄이야.’
공의회로 인해 에넨의 위상이 잠시 흔들렸던 시기. 악신들의 준동을 우려한 영원한 푸른 하늘은 은인과 함께 혹한으로 향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악신들이 다시 대륙에 풀려난다면 재앙이라 부르기에 충분하고, 이를 관리해야 하는 에넨은 종교 전쟁 승리 이후로 가장 약화된 상태였으니까. 상대적으로 여유가 넘치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 확인하는 게 옳았다.
헌데 정말로 악신들의 봉인이 풀렸을 줄 누가 알았을까. 신들의 신성이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약화되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 마침 악신들이 약해져 있더라고! 도로 봉인하기는 번거로워서 신성을 흡수했지!
혹한에 다녀오고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던 영원한 푸른 하늘. 당시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에넨이 숙성하고 있던 만찬을 영원한 푸른 하늘이 강탈한 꼴이었다.
허나 굳이 입 밖으로 그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
게다가 에넨을 대신해서 영원한 푸른 하늘이 힘을 쓴 건 맞잖아. 그 대가라고 생각하면 강탈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 …언젠가는 만날 기회가 오겠지요. 태양과 하늘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법이니.
에넨도 그걸 알기에 영원한 푸른 하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저 만찬을 뺏긴 것을 찝찝해 할 뿐.
– 에넨.
– 말하십시오, 나의 친우.
그런 에넨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에넨과 접촉한 건 에넨의 언짢음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당신의 아이가 제국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 그 아이는 가슴속에 세운 신앙과 믿음을 위하여 스스로를 순례길에 던진 것일지니. 나의 친우와 누이의 권위에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알고 있다. 에넨이 이제 와서 다른 신들을 견제하고자 자신의 아이에게 간섭할 성격은 아니다.
– 그 아이가 세계수와 북방을 방문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 호오.
그렇기에 내가 먼저 요구하기 위하여 에넨을 찾아온 것이다.
나와 영원한 푸른 하늘은 에넨의 아이들을 통해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그냥저냥 평범하고도 미약한 신으로 지냈을 거다.
그러니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에넨의 아이들이 인정하고 존중한 신들이, 마찬가지로 에넨의 아이들을 존중한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 좋습니다. 그것이 친우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제안에 에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누이도 같은 생각입니까?
– 영원한 푸른 하늘은 자신의 집에 누가 오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 그건 그렇지요. 저도 누이의 집에 신세를 진 적이 있었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에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영원한 푸른 하늘은 북방이 아니라 세계수에 빌붙어 지내는 상황. 에넨의 아이가 북방에 가든 말든 관심도 없을 거다.
***
제국 성지 순례가 서서히 막바지에 이르는 시기.오늘도 우리의 주를 향한 기도를 올리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갔다.
오늘도 미천한 종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오늘도 나와 형제자매님들이 건강할 수 있던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거대한 제국 영토와 수많은 성지들을 무사히 순례할 수 있던 것에 대한 감사, 순례길에서 소중한 연이 생긴 것에 대한 감사.
그 모든 것에 대한 감사 기도를 드리는 사이.
– 나의 종이요, 나의 아들아.
성스럽고도 거룩한 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여, 당신의 종이 듣고 있나이다.”
빠르게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주의 목소리에 집중하였다. 아무리 신의 아들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달고 있지만, 나 역시 주 앞에서는 많고 많은 종 중 하나. 감히 주인 앞에서 고개를 드는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 태양 아래 걷는 순례자를 하늘과 초목이 보살필지니. 마땅히 태양뿐만 아닌 하늘과 초목에도 감사를 표할지라.
이어지는 주의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우리를 귀엽게 여기는 건 우리의 주인 에넨뿐만 아니라 영원한 푸른 하늘과 콘스탄티나도 있다는 말. 그렇기에 주의 흔적이 깃든 곳만이 아닌 두 신의 성지나 신전에도 방문하라는 인도.
“따르겠나이다.”
그것이 주의 뜻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한다. 설령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일지라도 기꺼이 갈 수 있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동시에 머리를 굴리며 다음 목적지를 모색했다.
하늘의 영향이 짙은 곳이라면 당연히 유목민들의 터전인 북방이다. 초목의 성지는 엘프들이 존재하는 이종족 보호 구역이다.
‘이종족 보호 구역부터 가는 게 좋겠지.’
두 지역 중 이종족 보호 구역은 이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엘프들을 직접 보기도 했었으니, 먼저 그곳에 방문하여 콘스탄티나를 향한 예를 표하는 것이 옳다.
북방은 난생 처음 가는 곳이라 조금 걱정이지만… 그곳은 고문 형제님의 영향력이 짙은 곳. 여차하면 형제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 아들아.
“예, 주여.”
– 하늘과 초목은 태양과 다를지언정 틀리지 아니하다. 이를 가슴에 품고 나아가라.
“명심하겠습니다.”
주께서 남기신 조언에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것이 주의 뜻이라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것이 교황 성하께서 이루고자 하신 염원이기에 마땅히 그럴 것이다.
“─제님.”
이윽고 가슴이 뭉클했다. 다를지언정 틀리지 않다라. 그것은 신도가 이교를 바라보는 자세를 넘어 모든 인간 관계에 통용되는 말이다. 역시 우리의 주께서는 현명하고도 자비로우시다.
“형─님.”
동시에 작은 의문점도 들었다. 이리도 자비로우신 주인데, 이러한 주께서 토벌하고 짓누른 신앙은 대체 얼마나 포악하고 무자비했을까.
물론 종교 전쟁 당시에는 인자하신 주께서도 자비보다 단호함을 내세우셨을 가능성이 있으나, 지금의 주를 보면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
“타니안.”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이름을 불러야 반응하시는군요.”
그러자 쿡쿡 웃음을 흘리는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이 보였다.
민망하다. 주의 목소리가 황송하여 잠시 정신을 놓았던 모양이다. 바로 옆에 사람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저녁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저녁이요?”
이번에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기도를 시작한 것이 점심이고, 주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그쯤이었다. 그런데 벌써 저녁이라고.
‘실로 은혜스러운 일이다.’
주의 목소리를 수 시간 동안이나 되새길 수 있었다는 것 아닌가. 영광스럽고도 감동적인 일이다.
“자매님.”
슬쩍 입을 열자 자매님은 빙긋 미소만 지으며 딴청을 부렸다.
“…자매님?”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시선을 돌리셨다.
‘아.’
뒤늦게 왜 이러시는지 알 것 같아 작게 헛기침을 하였고,
“알렉산드리아나.”
“네, 형제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자매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가 제도에서 보다 긴밀한 관계가 된 이후, 누군가 상대를 본명으로 부른다면 상대도 그 횟수만큼 본명으로 부르자는 작고 귀여운 약속을 나누었다.
그러니 나도 자매님을 본명으로 불러야 했다. 그게 단 한 번일지라도.
“일정을 바꾸지요. 이종족 보호 구역으로 갑시다.”
“네?”
아무튼 미소를 머금은 채로 급히 변경한 일정을 말하자 자매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한 반응이기에 그저 웃음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