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14)
로판 속 공무원 614화(615/945)
이 세계에 오기 전에는 문풍당당한 문과여서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물체의 존재나 상태에 관한 법칙이 하나 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 무언가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출근하기 전에는 감찰성에 업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며, 황궁에 가기 전까지는 황제가 개새끼인지 씹새끼인지 알 수 없다. 이를 슈뢰딩거의 고양이, 뒤주의 세자, 한양의 선조라고 한다. 확인하기 전에는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지금 내 상황도 그것과 비슷하다. 타니안이 이종족 보호 구역에 갔다는 걸 듣기 전에는 타니안의 상태를 몰랐다. 몰랐으니 느긋하고 평온한 휴가를 즐길 수 있다.
헌데 영원한 푸른 하늘의 친절한 설명 덕에 타니안을 관측해버렸다.
‘망할.’
머리가 지끈거렸다.관측하기 전에는 관심을 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관측한 이상 무시할 수 없다.
그야 여명 교단의 차기 성자가 이교의 성지에 방문한 사건이고, 이종족 보호 구역의 책임자인 현명공도 움직인 사안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혹은 생길지 불안하지 않다면 감찰성에 일할 자격이 없다.
‘차라리 없고 싶다.’
순간 무의미한 행복회로가 가동했다. 이 일을 무시하면 황제가 장관직을 압수할까? 자격이 없는 놈이 장관 자리에서 버티는 건 국익에 어긋나는 일이잖아.
물론 그럴 일은 없다. 내가 아는 황제라면 ‘장관은 책임감을 가져야겠어.’ 라는 말과 함께 더 많은 업무를 던질 것이 뻔하다.
‘…가면 귀찮아질 텐데.’
입술을 깨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당연하게도, 나 스스로 이종족 보호 구역에 가면 귀찮아질 미래가 뻔하다. 간단한 일이었으면 차기 성자와 현명공이라는 기괴한 조합이 탄생하지 않았을 테니.
‘미루면 나중에 개판 날 것 같고.’
그렇다고 현장을 외면하기에는 후환이 두렵다. 내가 직접 개입해서 판을 주도하는 것과 남이 휘저은 판을 수습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뭐가 더 쉽냐고 하면 그나마 전자기도 하지.
그렇게 리제와 프리드리히를 품에 안은 채 한참을 고민하였고─
“형제님?”
“우왕! 쬬카! 오랫마니야!”
결국 내 발로 이종족 보호 구역에 방문하게 되었다.
저주하겠다, 이 망할 인간들.
내 휴가를 망친 원흉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의 인도를 받으셨다고요?”
“예, 형제님. 우리의 길을 태양의 따사로움만이 아니라 드넓은 하늘과 싱그러운 초목도 보듬을지니. 길고 긴 순례와 봉사의 길을 추구하는 자로서 어찌 감사를 표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슬슬 제국에서 벗어나려던 타니안이 갑자기 경로를 튼 이유.
그 이유가 에넨의 직접적인 개입이었다는 말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니, 콘스탄티나가 에넨과 대화를 하러 갔다고 했으니 두 신의 개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긴밀해질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타니안의 뒤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계수 앞에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단상. 여명 교단의 상징인 십자가가 세워지고, 그 옆에 나란히 놓이는 촛불들.아무리 봐도 세계수를 향한 기도를 드리려는 모습이다.
믿을 수 없다. 공의회를 통하여 여명 교단이 영원한 푸른 하늘과 콘스탄티나의 존재를 인정한 건 맞다. 그중 세계수를 하사한 콘스탄티나는 공의회 이전부터 여명 교단도 나름대로 존중한 편이었다.
그러나 은근한 존중과 공식적인 존경은 다르다. ‘세계수를 대륙에 하사한 존재’를 존중하는 것과 ‘자신들이 섬기지 않는 다른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건 결코 동일선상에 둘 수 없다.
“주의 자비와 관용이 실로 태양처럼 따스하군요. 감탄스럽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건 타니안의 독단이 아닌 에넨의 지시였으니까.
솔직히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다. 타니안의 독단이라면 공의회의 결과를 기이하게 해석한 참사라고 여길 텐데, 에넨의 지시라면 에넨 스스로가 다른 신의 권위 상승을 용납했다는 거잖아.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필멸자가 태양을 온전히 바라보고자 한다면 눈이 머는 법. 저희는 그저 태양의 따스함을 따를 뿐입니다.”
내 혼란을 눈치챘는지, 타니안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간이 신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건 불경한 일이며 불가능한 일이라고.
“마쟈! 격이다룬 존쟤가~ 온저니 이해하구바라보눈건 불가능하지! 죠까도 개나 닥의 생가글 이해할쑤는 업짜나? 그런거야!”
타니안의 말에 현명공도 히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는 말이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아가며 비교할 수 없는 경험과 지식을 쌓는 존재가 신이다.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신이다. 그런 존재를 인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건 만용이다.
‘이 양반도 신도기는 하구나.’
다만 그런 신앙적인 말이 현명공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놀랍다.
천상에 계실 경건공, 보고 계십니까? 당신의 딸이 비록 술을 산소처럼 마셔대지만 신앙과 믿음은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현명공이 간직한 몇 안되는 이성이자 양심인 것 같습니다… 아비 아니랄까 봐 딸을 위해 큰일을 하고 떠나셨어.
“그보다 형제님이 이곳에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급히 정한 일정이라 아직 소문이 퍼지지도 않았을 텐데요.”
“잉? 그르게? 나두 이제막 패하께 보고드리구 온건뎅?”
‘아.’
타당하고 합리적인 지적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영원한 푸른 하늘을 통해 이 참사를 알게 된 거다. 당연히 타니안이나 현명공의 예상보다 빠르게 달려올 수밖에 없다.
“제 아이들이 정령왕의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세계수 앞에서 벌어지는 이변을 정령들이 저와 아이들에게 속삭여줬습니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적당히 둘러댔다. 차기 성자와 공작 앞에서 신과 소통하는 인간이라는 걸 까발린다? 아마 피네랑 결혼하기 전까지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온갖 실험에 협조해야 할 거다.
‘미안하다.’
동시에 열심히 저택을 기어다니고 있을 세쌍둥이에게 사과했다.
딸이나 팔아먹는 아빠라 미안해.
***
콘스탄티나.
종교 전쟁 시기, 무력에 의해 굴복한 다른 신앙과 달리 스스로 우리의 주를 인정한 존재
이 대륙에 세계수라는 축복과 정령과 요정이라는 친우를 하사하고, 엘프들의 어머니로 군림하는 존재.
“태양의 아들이 어머니 초목께 인사드립니다.”
이제는 우리 여명 교단도 존중하며 감사를 표해야 할 신.
그러한 신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다. 신의 상징인 세계수 앞에서 초목을 향해 찬사를 올렸다.
그것이 우리의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콘스탄티나도 주처럼 우리를 주시할 것이기에. 지금까지는 없던 일이지만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할 일이기에.
‘다들 따라주셔서 다행이지.’
나와 함께 기도를 올리는 형제자매님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지금껏 없던 기행이다. 그렇기에 혼란에 빠진 형제자매님들을 달랜 뒤에야 기도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형제자매님들은 주의 뜻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신께서 원하신다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저희의 상식과 관례도 주의 말씀 아래 이루어진 것이지요.”
특히 나를 열정적으로 지지해 준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
“하하, 이종족 보호 구역에서 지내다 보니 콘스탄티나에게 기도를 드리는 날도 다 오는군요. 앞으로 엘프 이웃분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다.”
이 일을 최대한 가볍게 묘사하여 다른 형제자매님들의 부담을 덜어준 주교 형제님.
그 두 분의 역할이 매우 컸다. 두 분이 아니셨다면 다른 분들은 아직도 마음을 다잡지 못했을 터.
“태양과 초목의 우정처럼, 당신을 향한 저희의 존경도 두터울지니.”
그 말과 함께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예정에 없던 기도기에 화려함은 없지만, 기도는 본디 정성으로 이루어지는 법. 우리의 기도는 분명 콘스탄티나의 마음에 닿을 것이다.
“부디 저희가 걸어나갈 길을 아름다운 초목으로…”
– 콘스탄티나 여기 없어.
“…덮어주소서.”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슬쩍 실눈을 떴다.
낯선 목소리다. 동시에 숭고한 기도에 난입한 자의 목소리치고는 너무나 평온하고 가볍다.
– 세계수는 내 집이거든. 콘스탄티나는 초목의 신이라 대륙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있어. 돌아오면 에넨의 아이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줄게.
‘…실례지만 당신께서는 누구십니까?’
귀가 아닌 머리로 듣는 목소리기에 나 역시 머릿속으로 물었다.
콘스탄티나는 물론 우리의 주도 편히 말하는 존재. 누군지 대충은 짐작이 가지만, 그 존재가 왜 세계수를 자신의 집이라 주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영원한 푸른 하늘. 너도 알지?
‘드넓은 하늘을 뵙습니다.’
그러나 신의 뜻을 인간이 헤아리고자 하는 건 교만한 일. 스스로를 하늘의 신이라 칭한 존재에게 망설임 없이 예를 표했다.
그리고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3년 전 수학여행 당시, 고문 형제님은 북방에서 유목민들의 신앙과 접할 일이 있었다고 했다.
유목민 신앙의 힘을 몸에 담고 있던 형제님은 자신이 간직하던 힘을 한 나무에 옮겼고, 그 나무가 세계수로 자라났다. 유목민의 신앙은 곧 영원한 푸른 하늘. 하늘의 신이 세계수에 있을 당위성은 충분하다.
…아직까지 있는 건 예상 외였지만.
– 에넨의 아이가 왜 초목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전해줄게. 나도 같이 받은 걸로 칠 테니 북방에도 갈 거면 가지 말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감사하기는. 내가 더 고맙지.
큭큭 웃음을 흘린 영원한 푸른 하늘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주의 사제가 세계수 앞에서 하늘의 신에게 기도했다라.’
이윽고 머리가 현 상황을 이해하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참으로 기묘하고도 신기한 기도였다.
***
유목민의 신 아니랄까 봐 약탈 솜씨가 예술이다.
“초목께서는 자리를 비우셨고, 하늘께서 대신 응답해 주셨습니다.”
설마 남에게 향하는 기도를 빼앗을 줄이야.
‘이래도 되는 겁니까?’
– 뭐 어때. 나 아니었으면 아무도 안 받을 기도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당당한 반응이라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