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16)
로판 속 공무원 616화(617/945)
정주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마을이 더욱 발전하여 도시가 되고, 도시가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어 국가가 된다. 대륙 각지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건국되었다.
그러나 북방은 예외였다. 북방은 정주민이 아닌 유목민이 살아가는 공간. 국가가 존재하지 않고 여러 부족들이 난립하는 힘의 공백지. 그 누구도 자세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
그렇기에 대륙 곳곳에 퍼진 신앙의 동포들도 북방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다. 문명과 거리가 먼 루센조차 개종시켰던 신앙의 힘이 북방에는 이르지 못했다.
‘제국의 차단도 한몫했지.’
결정적으로 북방과 유일하게 육로로 접해 있던 제국은 여명 교단의 사제가 북방으로 가는 것을 몹시 꺼려 했다. 말로는 사제들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사제들이 유목민의 손에 잡혀 협상 테이블에 올라오는 걸 꺼려 했다는 게 옳다.
그러나 이제 북방은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제국이 더 이상 사제들의 접근을 차단할 필요는 없고, 북방을 유목민들만 넘쳐나는 야만과 미지의 세계로 여길 필요도 없다.
“북방의 대영주들에게는 제가 잘 말해두겠습니다.”
오히려 제국의 실세인 고문 형제님께 편의를 약속받을 정도였으니, 오늘날 북방은 정주민과 유목민이 어우러진 화합의 장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서 오십시오. 바란디가를 비롯한 북방은 형제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 증거로 북방에서 아인테르 형제님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유목민의 터전에서 제국의 황족이 여명 교단의 차기 성자를 맞이하는 상황. 이것을 화합의 증거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화합이라 볼 수 있을까.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형제님. 설마 이곳에서 다시 뵐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주께서 저희의 우정을 기특히 여기시는 것 같군요.”
아인테르 형제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황족을 제도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그것은 실로 주의 인도하심이라.
‘저분이 바란디가 후작 영애인가.’
이윽고 아인테르 형제님 옆에 서있던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제님의 금발과 대비되는 은발의 여인. 초원을 달리며 살아온 유목민이기에 당찬 여장부의 기세를 풍기나, 수줍은 얼굴로 조용히 아인테르 옆을 지키는 여인.
너무도 풋풋하고 따뜻한 모습이기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로 진심이시군.’
아인테르 형제님이 후작 영애와 결혼 예정이라는 소식은 제국을 넘어 온 대륙에 퍼졌다. 그야 현 황제의 유일한 동생이 유목민과 결합하는 희대의 사건이다. 세속의 왕족과 귀족들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간에서는 이 결합을 제국의 점령지 유지를 위한 정략혼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나, 후작 영애의 모습과 아인테르 형제님의 미소를 보니 억측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의 보우하심이다.’
저 모습은 정략으로 나올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마음에 품어야 가능한 모습이다.
과거의 나라면 몰랐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알 수 있다.
나 또한 아인테르 형제님과 비슷하기에.
“형제님. 제 친우의 가족이 될 분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오히려 제가 두 분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습니다.”
내 부탁에 아인테르 형제님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한 중년 사내를 가리켰다.
“저분이 제 예비 장인어른 되시는 바란디가 후작입니다.”
“바란디가 후작인 바탈 구르트입니다. 차기 성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형제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년 사내─ 바란디가 후작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과연. 이분이 바란디가 후작인가.
“저 역시 같은 길을 걷는 동포를 뵐 수 있어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그 말에 바란디가 후작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동포. 설마 차기 성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기운이 청명하십니다. 깨달음이 있으셨는지요?”
“…제 눈을 가린 미혹을 걷어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뿐입니다.”
“훌륭하십니다.”
뜬구름을 잡는 듯한 짧은 문답이었지만 나도 바란디가 후작도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짧게 말해서 통하는 것이 있는 법이니.
“사제끼리 마음이 통한 것 같아 흐뭇하지만, 소개를 이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그리고 아인테르 형제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형제님은 밝은 미소를 머금으며 바란디가 후작 영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북방 제일의 여걸이자 내 유일한 아내가 될 샤티입니다.”
“후, 후작님!”
애정이 가득한 소개와 화들짝 놀란 영애의 모습에 그저 웃음만 터뜨렸다.
같은 여인을 마음에 품었던 동지가 좋은 상대를 찾은 것 같아 다행이다.
‘다른 분들도 잘 살아가고 있는 건가?’
에리히 형제님은 두 약혼녀가 있고, 아인테르 형제님은 한 약혼녀가 있으며, 나에게는 깊은 관계를 맺은 자매님이 있다.
류티스 형제님과 라테르 형제님도 짝을 찾았다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다.
***
예비 장인어른은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순례단을 대접하며 북방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벌판, 북방의 핏줄이나 다름없는 조르톤강, 겨울이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말과 양, 가장 먼저 완공된 바란디가 후작령의 신전까지.
처음 북방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광경에 순례단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리도 아름다운 지평선은 체네스의 곡창 지대 이후로 처음 봅니다.”
“체네스에서 황금빛의 풍요를 느꼈다면, 이곳에서는 싱그러움과 쾌활함이 느껴지는군요.”
“아쉽습니다. 여름에 왔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순례단의 수군거림을 들으니 내가 다 뿌듯했다.
나 역시 북방의 자연을 보며 감탄했고, 이제는 북방의 일원이 될 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비 장인어른과 머리를 맞대 균형 있는 발전을 추구하고 있을 정도다.
물론 드넓은 북방과 적은 유목민 인구를 생각하면 마구잡이로 개발해도 이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겠지만, 그 발전이 몇 세대에 걸쳐 이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북방의 보물이 훼손될 바에는 첫 삽을 뜨는 우리가 조금 더 고생하는 게 맞다.
‘기존 건물을 고치는 것보다 허허벌판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게 편하지.’
우리 세대가 지나면 이러한 균형 추구도 사치스러운 행동이 될 테니까.
“유목민들에게 있어 하늘은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온 대지를 누비는 저희가 유일하게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 하늘이었기에 저희의 선조는 하늘을 숭배하였지요.”
“여명 교단의 기원과 비슷하군요. 저희도 따사로이 저희를 비추고 인도하시는 태양의 은혜로부터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하, 환경만 다르지 사람 사는 건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법이지요.”
어느새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예비 장인어른과 타니안을 보며 몇 걸음 물러났다. 사제들의 대화에 세속의 황족이 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조금 신기한 광경이기는 하다. 장인어른이 저런 신앙적 대화가 가능한 분이셨나.
‘유일한 제사장이라는 건 알았지만.’
장인어른이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의 유일한 제사장이라는 건 안다. 바란디가 부족장에서 바란디가 후작이 된 것도 제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허나 지금까지 본 장인어른은 썩 신앙심이 투철한 분이 아니셨다. 제사장의 껍데기는 두르고 있으나, 그 알맹이는 누구보다 신앙에 냉소적이고 시큰둥한 분이었다.
그런 장인어른에게 저런 신앙적 지식이 있다라. 실로 놀라운 일이다.
‘애초에 지식이 있으니 냉소적이게 되는 법이지만.’
아는 것이 적다면 불만을 가질 수조차 없다. 아는 게 많기에 뒤틀리는 법.아마 장인어른도 그러한 과정을 거친 게 아니었나 싶다.
“기운이 청명하십니다. 깨달음이 있으셨는지요?”
“…제 눈을 가린 미혹을 걷어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뿐입니다.”
그 뒤틀림이 최근에 교정된 것 같지만.
“즐거워 보이네요.”
옆에서 들리는 샤티 영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누군가와 신앙에 대한 논의를 나누신 적이 없으세요. 제 조부이신 전대 제사장께는 가르침을 받으신 거고, 저 역시 아버지에게 배우는 입장이거든요.”
“지루한 길이었겠군요.”
오직 배우고 가르치는 것만 존재했다는 말이기에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영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장인어른에게 있어 신앙과 믿음은 상호 작용이 아닌 일방적 계승이었다. 자신의 지식과 깨달음을 타인과 나눌 수 없다는 것. 배우는 자에게 있어 얼마나 지루한 일이겠나.
만약 내가 장인어른처럼 홀로 검을 배웠다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대륙 제일 검이라는 스승을 두었더라도, 에리히와 류티스 같은 친우가 없었다면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었을까?
‘장인어른은 다른 부족과도 거리가 있었지.’
하다못해 다른 부족의 제사장들과 연이 있었다면 모를까, 바란디가 부족은 타 부족과의 연계에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장인어른의 신앙은 공허히 한 곳에만 맴돌 뿐이었다.
“아무래도… 무엇보다도 귀한 손님이 방문한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영애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루한 신앙에 갇혀있던 장인어른과 말상대를 해주는 차기 성자. 아무리 많은 금화를 사용하더라도 감히 가질 수 없는 행운이 스스로 찾아왔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에넨과 영원한 푸른 하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 둘이 보우함이겠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쉬지 않고 장인어른과 대화를 나누는 타니안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예비 사위로서 이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떤 표현이 타니안의 마음에 들까.
‘둘을 같은 방에 배정할까?’
고민 끝에 타니안의 바로 뒤에서 걷고 있던 여성을 바라봤다.
시성성 성장인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 타니안을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중간중간 타니안도 따뜻한 눈빛으로 대답하는 인물.
내가 샤티 영애와 연이 닿은 것처럼, 타니안의 인연이 된 듯한 인물.
흐으으으음…
‘일단 가두고 생각해야지.’
내 예상대로 둘이 깊은 연을 맺었다면 좋아할 것이다.
설령 아니라도 저렇게 애틋한 시선을 주고받는다면 관계지 않나. 분명 갇힌 방 안에서 일이 생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손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