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
아카데미에서 그리 오래 지낸 것은 아니지만, 교장의 표정이 그렇게 편안해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만사 모든 시름을 내려놓은 것 같은 현자의 표정. 우화등선을 눈 앞에 둔 노고수가 딱 그러했을까.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국의 마법사라면, 특히 군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교장이라면 마종공과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몇 년 정도 만난 나도 이런데 수십 년을 시달렸을 교장의 심정은 실로 참담했을 것이다.
이제 겨우 아카데미 교장으로 지내며 마종공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마종공의 고유 마법을 직관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겠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루이제가 마종공의 애제자인가? 그걸 명분으로 아카데미에 들락날락 하지는 않을까?
“마종공 각하께서 루이제를 잘 봐달라고 하셨습니다.”
– 그렇군요. 각하께서 제자를 맡기시다니, 감찰부장이 큰 신뢰를 받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내 말에 교장의 불안감은 사라졌다. 마종공이 나에게 루이제를 맡겼다는 건 적어도 마종공이 직접 아카데미로 강림할 확률이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희소식이다. 아카데미에서 공작을 맞이하라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황자, 왕자, 차기 성자에 공작까지 얹혀져서 보살펴야 한다면, 당장 세상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탈주해도 무죄 판결이 나올 것이다. 사법성이 양심이 있다면 그래야 한다. 사법성 장관실에 공작 하나가 와드 박고 지낸다면 버틸 수 있겠냐고.
순식간에 몰려오는 씁쓸한 생각에 잠시 고개를 저었다가 애써 행복한 기억으로 덮어씌웠다.
– 혹시 급하게 오신 것은 아니십니까? 감찰관님이 부재 중이실 때 일이 터지면 저희가 최대한 수습할 테니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 무사히 끝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교장과의 연락을 끝내고 교감과 빌라르에게도 복귀했다는 연락을 돌렸었다. 그리고 반응은 실로 감동적. 내 걱정과 안부를 묻는 그 사소한 반응이 어찌나 기쁘던지.
대화 중에 수틀리면 마법을 날릴 것 같은 어르신, 아무리 감사한 분이지만 혹여 내가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높으신 분. 그런 분들과 대화를 하다가 평범히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이게 옳게 된 근무지.’
감찰부에서는 너무 툭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지냈다. 부하라고 있는 것들도 절반이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개새끼들이고. 정말 내가 키우지 않았다면 걔네 뭐하고 지냈을까.
반면 아카데미는 교장을 포함해도 명백한 내 윗사람이 없다. 주시해야 할 고귀한 혈통은 여럿이지만 고문이라는 직함과 ‘어차피 졸업하면 느그 왕자’ 라는 마음으로 그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교감이나 빌라르처럼 정상적인 업무 동료가 존재.
‘지나고 나서야 봄인 줄 안다더니.’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다 끝내고 감찰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정작 감찰부에 몇 시간 있어보니 아카데미가 선녀였다. 그동안 욕해서 미안해 아카데미. 내 옆에 이리도 따뜻한 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선녀가 하늘에서 춤추듯 내려오는 봄을 만끽하며 동아리실에 가니 이 시간에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 있었다.
“오라버니, 오셨어요?”
동아리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손님이 온 것 같아 서둘러 들어가니, 볼을 끌어안고 휘핑크림을 만드는 루이제가 밝게 웃으며 반겨줬다. 혹시 내가 동아리 시간이 지나서 왔나 했지만 그건 아니다. 애초에 동아리 시간이라면 루이제만 있지는 않았겠지.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동아리실 내부를 훑어보다 오븐 앞에 있는 에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아, 에리히도 있었네. 에리히도 오븐 안을 들여다 보다가 루이제의 인사에 내가 온 걸 눈치챈 모양.
“아, 형 왔어?”
“어. 그런데 너희 왜 벌써 왔어?”
예상치 못한 상황이 조금 당혹스럽다. 물론 에리히 입장에서는 루이제와 단 둘이 있다는 것이 마냥 기쁜 일이겠지만, 동아리를 관리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일정과 어긋났다는 것 자체가 아찔한 일이다.
“담당 교사님이 사정이 있어서 수업이 일찍 끝났거든. 갈 곳도 없어서 미리 왔어. 정작 형이 없을 줄은 몰랐지만.”
“루이제도?”
“같은 반이잖아.”
아, 그랬지. 실기만 다르지 둘이 같은 반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어디 가셨던 거예요?”
에리히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니 여전히 볼을 끌어안고 있는 루이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동아리실 지박령인 내가 자리를 비웠으니 의문이긴 하겠지. 에리히도 궁금한 모양이고.
“잠깐 일이 있어서. 아침부터 밖에 좀 다녀왔어.”
“네? 어디 나가시는 건 못 봤는데요?”
“너 내가 수업에 집중하라고 했지.”
순간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내가 던전 털러 갔을 때처럼 수업은 듣지 않고 창 밖만 바라봤다는 이야기다. 마종공의 유일한 제자니 앞날이 티타늄 고속도로 수준인 건 맞는데, 너는 정작 스승이 마종공인 거 모르지 않니?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필 1과장의 입을 잡아당기고 오는 길이라 그런지 손이 움찔거렸다. 손이 올라가면 대형 참사다. 그나마 튼튼한 1과장이라 버티는 거지, 루이제한테 했다가는 정말 울릴지도 모른다.
“형이 밖으로 나갈 일이 있어?”
“제도.”
“아.”
내 지적에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리는 루이제 대신 에리히가 말을 이었다. 제도라는 한 단어에 바로 납득하고 신경을 껐지만.
에리히도 제국 의회 의원인 가주와 공무원인 나를 가족으로 둔 입장이라, 나라 녹을 먹는 사람이 제도로 소환당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공무원이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하던 일이 있어도 오라면 달려가야 하는 입장이니까.
유감스러운 일이 있다면 나는 업무 문제가 아니라 공작의 사생활 침해라는 대형 사건으로 인해 압송당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점. 이건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니 함구하고 있자.
‘제도라는 말로 알아들을 정도면 쟤도 반은 공무원인데.’
문득 에리히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에리히 정도면 예비 노예로 잡아가기 충분하다 못해 과한 수준이지만, 동생에게도 나의 업을 물려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나와 가주의 꼴을 보고 자란 에리히가 순순히 이쪽 세계에 올지도 의문이고.
“형?”
아, 너무 쳐다봤나.
여기서 에리히에게 ‘너를 노예로 잡아가도 될까 고민 중이었어.’ 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겨우 좁힌 관계가 다시 멀어질 것이다. 나였어도 형이라는 새끼가 나를 노예로 팔아치울 생각으로 가득하면 손절했겠지.
다행히 변명할 거리가 있어서 에리히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아니, 변명보다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거기도 하고. 그 와중에 오라는 대로 별 반항 없이 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이제야 좀 보편적인 형제 관계가 되는 것 같네.
“마침 둘인데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지 않고 뭐하는 거야.”
“그러려고 했는데 이젠 셋이네.”
작게 귓속말을 하자 에리히도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그러려고 하기는 개뿔이. 내가 그동안 본 게 얼만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루이제 얼굴에 크림 묻었는데, 무슨 생각 안 들어?”
“아, 저거? 휘핑 다 끝나면 말해주려고.”
“…….”
동생이 아니었으면 대가리에 화살 박혔냐고 욕부터 박았을 거다.
“가서 닦아줘.”
그렇게 말하고 에리히의 등을 루이제 쪽으로 살짝 밀었다. 당황한 듯 돌아보는 에리히에게 당장 가라는 의미로 턱을 까딱이자 그제야 걸음을 옮기는 모습.
‘못난 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가까워지라고 하늘이 내린 기회마저 제대로 잡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나에게 중립을 부탁한 라테르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무튼 들키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
등이 밀려 루이제에게 향하는 에리히는 아까부터 느껴지는 위화감에 기분이 영 찝찝했다. 분명 무언가 다른데, 무언가 이상한데 정작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슬쩍 뒤를 돌아보자 이쪽을 바라보는 칼이 다시 턱짓을 했다. 입은 다물었지만 눈은 빨리 가지 않고 뭐하냐고 욕을 내뱉고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 앞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위화감은 더욱 커졌다.
칼을 볼 때 마다 느껴지던 위압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되던 그 분위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리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버틸 수는 있는 수준.
계기가 있기는 있다. 어제 있었던 대련에서 하나뿐인 형의 인정을 받고 싶었고, 실제로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이끄는 것에 성공했다. 아카데미 성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다. 스스로 껍질을 한꺼풀 벗은 기분이었고.
‘좀 다른 느낌인데.’
인정 받고 싶은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졌다. 짓눌리지 않고 당당히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기에 내가 받는 위압감이 줄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에리히는 생각했다. 그런데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다. 다른 무언가가 섞여있다.
‘집사장?’
그나마 비슷한 느낌을 찾자면 간혹 집사장에게 느꼈던 그 느낌이다. 피곤해 보이고, 초췌하고, 일에 치여 사는 자를 보면 느껴지는 애잔함. 그것이 칼에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단순히 일이 많아서 피곤한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칼이 일이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제국백이자 제국 의회 의원인 가주도 일이 만만치 않게 많으니까. 이건 과로에 시달리는 자가 아닌, 무언가가 더 얹혀진 애잔함이다.
퍼즐 한 조각이 사라진 듯한 위화감과 거슬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한 조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도저히 모르겠네.’
다행히 급한 일은 아니다. 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진 것도 아니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도 된다. 이제 유일한 형제를 향한 시선도 조금은 정상적이게 된 것 같으니까.
“루이제, 뺨에 크림 묻었다.”
“으, 응?”
손수건을 꺼내 루이제의 뺨을 닦아주자 귀가 붉게 물드는 모습이 보였다. 과연… 단순한 행동에도 효과가 있기는 하구나.
***
계속 뒤를 돌아보길래 혹시 그냥 돌아오나 걱정했다. 그래도 내 동생이 그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구나.
‘이게 뭐 그리 대수라고.’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 괜히 기쁘다. 기역 니은 디귿도 모르던 아이가 갑자기 가나다를 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다. 물론 아직도 가나다를 논하는 수준인 건 절망적이지만.
그것보다 아까부터 졸음이 조금 몰려오는 것 같다. 동아리실에 오면 눈 좀 붙이려고 했는데, 지금이라도 자둘까. 다른 놈들 오면 깨워달라고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