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1)
로판 속 공무원 621화(622/945)
전설급 탈것(큰오빠)을 타고 저택을 누빈 테레사가 곤히 잠들고, 하늘은 어느덧 붉게 물든 시점.
“뭐야, 형도 있었네?”
제국의회의 막내를 담당하는 에리히가 나타났다.
“아, 오빠.”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그것도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세라, 제노비아와 함께.
“다들 어서 와.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확실히 세라와 제노비아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 웃는 얼굴로 맞이해줬다. 아직 내 결혼이 끝나지 않아 순서를 기다릴 뿐이지, 사실상 에리히의 부인이나 마찬가지인 둘이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로서 가족처럼 대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둘이 오자마자 방구석에 몰아넣었던 의자를 들고 와 건네주었다. 소중한 제수들이 서있는 건 보기에 좋지 않다.
“내 거는?”
“넌 서있어.”
물론 제수들 것만 줬다. 형도 서있는데 어딜 동생 따위가 앉아있으려고.
이 자리에서 앉을 수 있는 건 테레사를 돌보느라 고생한 어머니와 유모, 크라시우스 가문의 귀빈인 세라, 제노비아뿐이다.
“테레사가 자고 있는 건 오랜만에 보네.”
그 단호한 명령에 에리히는 짧게 혀를 차더니 테레사에게 다가갔다.
순간 움찔했다. 테레사는 에리히의 목소리에 귀신같이 반응해서 울음을 터뜨린 전적이 있다. 만약 이번에도 테레사가 깬다면 내 등의 희생은 쓰레기가 되는 거다.
“우웅…”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의 테레사는 체력이 전부 바닥난 모양이다. 에리히의 목소리에도 꿈틀거리기만 했지 눈을 뜨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인 일이다.
“잘 때는 이렇게 천사 같은데.”
테레사를 내려다보던 에리히는 쓴웃음을 지은 채 물러났다. 에리히도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테레사 곁에 오래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현명한 선택이다. 테레사의 총애를 받을 수 없다면 분노라도 피해 다니는 게 최선이지.
“그런데 용케 셋이 같이 왔네? 의회는 요즘 바쁘지 않아?”
“요즘이 아니라 늘 바쁘지.”
내 말에 에리히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네가 막내 나부랭이라 그런 거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으나, 굳건한 이성에 막혀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나를 대신해서 고생하는 동생에게 잔혹한 진실을 알려주는 건 너무한 일이지 않나.
“그래도 테레사 때문에 어떻게든 셋이 같이 와야 돼. 한 명이라도 안 오면 울어.”
“운다고?”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탄식을 내뱉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으니까.
테레사는 사소한 걸로도 울음을 터뜨리는 중이다. 오죽하면 세라와 함께 왔던 에리히가 다음에는 제노비아와 함께 오자, 동행인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울 정도겠나. 낯선 사람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우는 게 테레사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세라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제노비아로 밀고 나가는 것도 아닌 동시에 방문을 한다?
“누가 오든 우는구나.”
“어.”
내 추측에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아마 테레사는 처음 세라를 봤을 때도 울었을 거다. 그러다 겨우겨우 세라에게 익숙해졌는데 제노비아가 나타나서 울었고, 제노비아에게 익숙해지려던 찰나에 세라가 오니 다시 울었을 터.
결코 끊기지 않는 울음의 연쇄. 평생 테레사와 떨어져 지낼 것이 아니라면 번갈아 방문하는 건 최악의 수다. 덕분에 에리히는 무조건 셋이 방문한다는 규칙을 세운 거고.
“힘들겠네.”
“어쩌겠어. 어른이 애한테 맞춰줘야지.”
해탈한 듯 중얼거리는 에리히를 보다가 어머니, 유모와 인사를 나누는 두 제수들을 바라봤다.
에리히와 달리 둘의 표정은 딱히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밝고 온화했지.
‘성에 올 수 있는 명분이 생겨서 좋은 건가?’
생각해 보면 둘 입장에서는 성에 자주 방문할수록 예비 시부모님에게 얼굴도장을 찍을 수 있다. 결혼이 임박한 예비 신부로서는 조금이라도 많이, 조금이라도 길게 성에 머물고 싶겠지.
물론 예비 시부모님과 있는 걸 어색해하는 예비 신부도 있지만, 그런 나약한 멘탈의 소유자는 에리히를 상대로 짝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길고 긴 짝사랑으로 단련된 둘에게 예비 시부모님과의 동석 따위는 시련조차 되지 않는다.
“점점 테레사 얼굴에서 어머님이 보이는 것 같아요.”
“후후, 세라도 과장이 심하구나. 아직 태어난 지 반 년도 안 된 아이란다.”
“아니에요. 정말 어머님 얼굴이 그대로 있는걸요?”
“비아도 그렇게 말하기니? 민망하게.”
화목하게 대화를 나누는 예비 고부를 보니 괜히 흐뭇해졌다. 그 와중에 제노비아에게 애칭이 생겼다는 것도 고부 관계의 청신호나 마찬가지다.
“형.”
“왜.”
“아기들 평균이 테레사는 아니지?”
묘하게 떨리는 에리히의 목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막둥이가 평균이었으면 제국은 무조건 외동만 낳았어.”
그러자 에리히는 크게 안도한 듯 안색이 온화해졌다.
그 꼴을 보니 조금 열받았다. 우리 막둥이가 뭐 어때서 저런 표정이지? 네가 막둥이를 위해서 등을 바친 적이라도 있어?
‘나약한 녀석.’
아이가 울면 달랠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나약한 놈.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보다 애초에 울지 않게 하는 것이 제일이거늘.
결혼도 하지 않은 애송이 따위가 깨닫기에는 너무 과분한 진리지만.
“그런데 가주님은 어디 계셔?”
“네 앞에.”
“아, 아니. 아버지는?”
이제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한 에리히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얼자도 아닌 것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꼴이 얼마나 기괴하던지.
20년 가까이 아버지를 가주라고만 불렀으니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버지가 가주직에서도 은퇴하셨으면 지금처럼 아버지라 부르는 게 옳다.
“피신하셨어.”
“…어?”
“피신하셨다고. 여기 안 계셔.”
그리고 아버지의 엄격 근엄 진지한 면모만 알던 에리히에게 아버지의 가벼운 모습을 알려준다면 에리히가 쌓은 마음의 벽도 더욱 낮고 얇아질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
발터의 저택에서 하루, 게오르크의 저택에서 하루, 호숫가에서 하루. 그러다 나흘째부터는 다시 발터의 저택에서 신세를 지는 형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부인이 허락해 준 휴식 기간을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 앞으로 기약 없이 이어질 육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이제 돌아가야겠지.’
그렇게 며칠이나 자유로운 상태로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고 나니 부인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커졌다.
부인은 나에게 구체적인 복귀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쉬고 오라는 말만 남겼지. 내가 진정으로 괜찮아지면 그때 오라는 것처럼.
솔직히 100% 회복한 건 아니나 이 이상 시간을 끌면 부인이 기절할 거다. 아무리 시녀장과 다른 가신들이 있다지만 결국 최고 책임자는 부인이니.
“난 이만 가보겠네.”
“잘 가게나, 겁쟁이. 다음에 올 때는 나는 딸에게서 도망친 슈퍼 겁쟁이입니다─ 라 외치면서 들어오고.”
휘적휘적 손을 젓는 게오르크의 말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솟았다.
허나 참았다. 분하지만 내가 도망친 건 사실이고, 게오르크에게 신세를 진 것도 사실이었으니.
“제노비아한테 연락이 오면 마음의 준비하고 받게. 자네가 요 며칠 동안 퍼마신 술의 절반만 말해도 기겁을 할 거야.”
“내 집이다 생각하고 언제든지 오게나. 경비병한테는 미리 말해두겠네.”
그래도 나 역시 게오르크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는 비수가 있었다. 일방적으로 당하기에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너무 잘 안다.
덕분에 게오르크의 눈물겨운 배웅을 받으며 성에 복귀했고,
“우우!”
“경! 조금 더 속도를 내게! 아가씨가 불만스러워하시잖나!”
“이, 이 이상은 무리입─”
“우우우…!”
“그아아아앗!”
눈을 의심하게 하는 기괴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성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고함. 바닥에 등을 붙인 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가문의 기사. 그 기사의 배에 올라타 옹알거리는 테레사.
혼란스럽다. 혹시 게오르크와 마시던 술이 덜 깬 건가? 그게 아닌 이상 어찌하여 이런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거지?
“우- 아!”
그러던 중, 기사의 배에 있던 테레사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가, 각하!”
“각하를 뵙습니다!”
뒤이어 근처에 있던 기사들도 하나둘 나에게 경례를 올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테레사를 품에 안으며 묻자 근처에 있던 기사 중 가장 상급자인 에밀 경이 입을 열었다.
“테레사 아가씨께서 이렇게 노는 것을 좋아하셔서, 임무가 없는 기사들이 아가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간단명료한 대답이었으나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다 테레사가 이런 놀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지, 왜 그 놀이를 위해 기사들까지 동원된 건지, 자존심 강한 기사들이 순순히 바닥에 눕게 된 건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 각하.”
“말하라.”
“어제 가주께서 왔다 가셨습니다.”
“칼이?”
그 말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내가 하루만 빨리 돌아왔다면 칼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가주께서 친히 테레사 아가씨를 품에 안고 성 전체를 돌아다니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에밀 경은 품에 안았다는 말로 간단히 표현했으나, 현 상황을 보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안음과 거리가 멀 것이다. 이 기괴한 모습의 기원이 칼이라는 뜻이다.
그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현 가주가 친히 바닥을 누비고 다녔는데 어찌 기사들이 꺼려 할 수 있을까.
“…다들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각하. 가문의 기사로서 아가씨를 즐겁게 하는 것도 저희의 의무입니다.”
에밀 경의 말에 다른 기사들, 심지어 바닥에 누워있던 기사도 재빠르게 일어나 예를 표했다.
실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충성심이지만─
아니, 이 이상 생각하지 말자. 저들은 충성심 넘치는 훌륭한 기사들이다.
“아- 우-!”
기사들이 일제히 표하는 예에 테레사는 방긋 웃으며 양팔을 파닥였다.
태양보다도 해맑은 웃음이라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졌다. 테레사가 기뻐한다면 아무리 보기 기괴한 광경이라도 용납할 수 있다.
“그렇죠? 그러니 당신도 힘 좀 써주세요.”
“뭣.”
나도 기사들처럼 바닥을 누벼야 한다는 건 부인을 만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