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2)
로판 속 공무원 622화(623/945)
내가 방문한 후로 타일글레헨에 기묘한 규칙이 생겼다고 한다. 업무나 훈련 일정이 없는 기사들은 테레사를 태운 채 성을 누벼야 하는 기묘한 규칙이.
어째 타일글레헨에 독을 뿌리고 간 것 같아 미안하지만, 테레사가 스스로 기어다닐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아무리 길어도 반 년은 가지 않을 터이니 기사들도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 빌리는 매일 테레사를 안아주고 있단다. 테레사도 다른 사람의 품보다는 아빠의 품을 더 좋아하고.
사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현 가주와 전대 가주조차 가족을 위하여 품위를 내던졌는데, 일개 기사가 자존심을 세운다면 크라시우스 가문에서 나가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신분을 내세운 횡포지만 뭐 어쩌겠나. 이 세상은 신분제 사회인데. 꼬우면 민주주의가 발호한 세계로 떠나면 된다.
“기사들이 테레사하고 놀아준 횟수는 잘 기록해둬라. 업무 외 노동이니 보상은 줘야지.”
– 예. 빠짐없이 기록하겠습니다.
반대로 기사들이 우리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면 가주로서 그만한 대가를 줘야 하는 법. 보편적인 기사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를 시켰으니, 마땅히 추가적 보상을 주는 것이 맞다.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것이 상사의 사적 지시지 않나.
그래서 집사장에게 기사들의 노동 횟수를 기록하게 했다. 횟수에 비례한 은화나 휴가면 무난할 거다.
“테레사는 잘 지내고 있나?”
– 전대 가주님과 기사들의 헌신 덕에 매일 웃고 있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보다는 웃음소리가 더 듣기 좋은 법이지. 기사들에게는 조금만 힘내라고 전해라.”
– 예, 각하.
집사장의 대답을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아버지와 기사들의 헌신, 집사장의 철저한 기록이 있다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다. 앞으로는 매주 주말마다 얼굴을 비추러 가면 충분할 터.
“우리 프리드리히는 고모보다 조용해서 다행이야.”
“우-?”
옆에 있던 프리드리히의 볼을 만지작거리자, 프리드리히는 양팔을 내 쪽으로 뻗으며 허우적거렸다.
신기한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인데 한 명은 너무 활발하고, 다른 한 명은 너무 조용하다. 마치 프리드리히의 호기심과 성질이 전부 테레사에게 간 것처럼.
‘리제를 닮아서 그런가?’
아니, 그렇게 따지면 테레사는 대체 누구를 닮았길래 그러는 거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활발함과는 거리가 먼데.
‘돌연변이네.’
아무리 생각해도 테레사가 돌연변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내 조부되는 분도 무뚝뚝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철저히 정략으로 이어진 조모님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외조부님과 외조모님도 온화라면 모를까 활발함과는 거리가 멀지.
‘그나마 비슷한 친척이 있으면 현명공인가.’
그런데 테레사랑 현명공은 피가 이어진 친척이 아니잖아. 가계도를 뒤적여도 짚이는 사람이 없다.
‘…돌연변이면 뭐 어때.’
이윽고 머릿속 가계도를 접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가족 중에 활발하고 쾌활한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는 게 좋다. 그래야 가족이 모였을 때 분위기가 우중충하지 않고 밝아지는 법이니까. 솔직히 나와 부모님, 에리히 중에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새 머릿속에는 열정적인 재롱 잔치를 펼치는 테레사가 그려졌으니까.
“아우-”
“왜 그러니? 안아줄까?”
“우-!”
새해 기념 그랜절을 하는 테레사를 상상하던 중, 프리드리히의 옹알거림에 정신이 들었다.
상상에 불과했지만 테레사의 그랜절을 보자마자 홀린 듯 금화 주머니를 열 뻔했다.
***
목에 건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바람을 느끼며 픽 웃음을 흘렸다.
수련으로 인해 적당히 달아오른 몸, 열기를 배출하는 땀, 그 모든 걸 감싸 안는 바람. 이 감각을 느끼기 위하여 단련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제의 나보다 강해지기 위한 것도 단련의 이유지만, 강해지는 건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없지 않나.
그렇기에 몸으로 느끼는 쾌감. 뜨겁게 몸을 불태운 듯한 기쁨. 그것들이 나를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오늘도 어울려줘서 고맙네, 페로사 경!”
“여, 영광입니다…!”
오늘도 내 상대를 해준 페로사 경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페로사 경은 우렁찬 대답과 함께 드러누웠다.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두 발로 서있다가 대련이 끝나고 나서야 쓰러진다니. 이 얼마나 참된 기사인가.
‘가까운 곳에 이런 보석이 있었어.’
흐뭇한 마음으로 널브러진 페로사 경을 바라봤다.
사실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때만 해도 조금은 우울했었다. 내 인생에서 에리히만큼 적절하고도 훌륭한 대련 상대는 본 적이 없는데, 아카데미라는 접점이 없다면 평생 에리히와 만날 일이 없으니까.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친구이자 적수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하나 두렵기도 했다.
허나 우연히 페로사 경과 대련을 한 날부터 우울함과 불안감은 사라졌다.
‘객관적으로 보면 에리히와 비교하는 건 무리지만.’
일단 페로사 경이 에리히 수준이라는 건 아니다. 애석하게도 내 또래 중에 나와 에리히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게 무방하다.
그러나 페로사 경에게는 실력 외의 매력이 있었다. 나를 상대할 수 없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 몇 번을 막혀도 물러서지 않는 의지, 상대가 왕자임에도 대련에 돌입하면 기사 대 기사로 싸우는 신념까지.
덕분에 페로사 경이 마음에 들었다. 치열한 대련은 무리일지언정 기분 좋은 대련은 가능했으니.
‘좋은 기사가 되겠어.’
이 호감은 좋은 대련 상대를 만난 기쁨이자 왕국의 인재를 본 행복이었다.
페로사 경은 빌라르 경의 딸이자 젊은 나이에 정식 기사가 된 실력자. 앞으로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노련하고 실력도 출중한 기사단의 기둥이 될 터.기사 류티스로서도, 아르메인의 왕자 류티스로서도 당연히 좋아해야 할 일이다.
“자, 받게.”
“가, 감사합니다!”
그런 페로사 경에게 다가가 물병을 건네자, 페로사 경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병을 받았다.
격렬한 반응이라 웃음이 터졌다. 왕족이 건넨 물건을 누워서 받았다면 역적이나 다름없으나, 막 열정을 불태운 무인이 누워있는 것 정도는 용납할 수 있다. 내가 그 정도 융통성은 가지고 있다.
“일어난 김에 한 번 더 붙어보겠나?”
그 말에 페로사 경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몸이 한계에 이르렀기에 차마 그러자는 말도 못 하고,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못하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기사인가.
“농담이네, 농담. 매일 나하고 어울려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두 번이나 떼를 쓰는 건 너무한 일이지.”
그러자 빠른 속도로 떨리던 페로사의 눈동자가 잠잠해졌다.
알기 쉬운 성격이라 더욱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상대에게 호감을 가지니 사소한 것도 긍정적으로 보─
“저하!”
“음?”
저 멀리서부터 왕궁 시종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내가 이 시간에는 단련 중이라는 건 왕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곧 신성교국의 순례단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오.”
이어지는 말에 의문이 풀렸다. 곧 순례단이 이 라두스로 온다고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구나.
‘오랜만에 보겠군.’
이윽고 시종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순례단을 이끄는 순례단장은 타니안. 약 1년 전에 헤어진 나의 친우였으니.
“먼저 가보겠네, 경. 내일도 잘 부탁하지.”
“예, 전하! 내일도 최선을 다하여 전하의 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동등한 대련임에도 자신이 나에게 배우는 중이라는 발언.
역시 기특하고 훌륭한 기사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부왕께 향하니, 이미 다른 왕족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류티스 왔느냐?”
“예, 부왕 전하.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괜찮다. 네 형도 방금 막 왔으니.”
부왕께서 턱으로 왕세자인 큰형님을 가리키자, 큰형님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전하. 소자는 전하께서 넘기신 레온 왕국 주둔군 문제를 처리하느라…”
“나보다 늦은 녀석이 말이 많구나. 네가 처리하는 일이 더 많겠느냐, 내가 하는 일이 더 많겠느냐.”
“참으로 치사하신 말씀입니다.”
큰형님의 볼멘소리에 둘째 형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형님을 볼 때마다 제가 둘째라는 것이 이리도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넌 이 형님이 과로로 죽어야 정신을 차릴 놈이다.”
언제나와 같은 두 형님의 말다툼에 나도 입꼬리를 씰룩였다. 어떻게 만날 때마다 저렇게 투닥일 수 있는 걸까.
“다들 조용히 하세요. 부왕 전하께서 보고 계십니다.”
정확히는 누님까지 포함해서 셋이지만.
왕세자, 2왕자, 1왕녀의 말싸움. 외부인 입장에서는 왕위 계승을 노리는 왕족들이 치열한 견제를 날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저 나이가 비슷한 남매들의 다툼에 불과했다.
“살리아! 너도 듣지 않았느냐! 저 망할 것이 아르메인의 왕세자인 나를 능멸했다!”
“능멸이라니요. 이 동생은 왕세자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 중인 형님께 존경을 표한 것인데요.”
“둘 다 조용히 하라니까요!”
점점 고성이 오고 갔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또한 평소와 같은 일이었으니.
“조용.”
그나마 부왕 전하께서 제지하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떠들면 차가 식는다. 네 어미가 직접 타 준 차를 버릴 셈이더냐?”
제지한 이유는 왕족의 품위와 예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가장 놀라운 것은 저런 명분이 먹힌다는 것이고.
‘우리 같은 왕실이 어디 있을까.’
조용히 찻잔을 드는 큰형님과 형님, 누님을 보다 픽 웃음을 흘렸다.
가족의 우애를 강조한 부왕 전하와 어머니 덕에 우리는 역사 속 왕실, 타국의 왕실보다 압도적으로 화목했다. 향후 수백 년 동안 우리를 능가할 왕실은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류티스?”
“아,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친우를 본다는 것이 설레어서 그만.”
둘째 형님이 내 웃음소리에 반응했기에 재빨리 타니안을 팔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형님들과 누님의 모습을 보니 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라는 말을 하면 1 대 1 대 1이었던 언쟁이 3 대 1로 돌변할 거다.
그건 아무리 나라도 무섭다. 차라리 검으로 3 대 1인 게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