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3)
로판 속 공무원 623화(624/945)
순례단을 맞이하는 자리에는 부왕 전하를 비롯한 왕족들 전원이 나서기로 했다.
손님을 맞이하기에는 너무 과한 인사 배치가 아닐까 싶지만, 순례단에는 훗날 성자가 되는 것이 확정된 타니안과 시성성 성장인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포함되어 있다. 성자는 여명 교단에서 교황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존재. 부왕 전하가 나서더라도 의전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순례단이 제국을 떠날 때, 황제와 황태녀가 직접 배웅을 해줬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아르메인에 입국할 때 왕인 내가 맞이해주어야 감동이 유지되겠지.”
“그렇게 자세히 말씀해 주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왕 전하의 친절한 설명과 큰형님의 한숨 섞인 대답.
제국에게는 질 수 없다는 듯한 이유였으나 어머니도 큰형님도 이유 자체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부왕 전하의 말씀이 맞다.’
황제와 황태녀의 배웅을 받으며 화려하게 제국을 떠난 순례단. 그 고양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아르메인에 입국했는데, 왕이 아닌 왕세자나 일개 왕자가 맞이한다? 3년 동안 지켜본 타니안은 그런 것에 연연할 성품이 아니지만 다른 순례단은 어떨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부왕 전하의 말씀대로 왕실이 전부 나서는 것이 옳다. 왕이 황제보다 아래인 건 어쩔 수 없으나, 수적으로는 우리 왕실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류티스.”
“예, 부왕 전하.”
“학창 시절의 친우를 다시 만나는 것은 몹시 기쁜 일이지. 이 아비도 충분히 이해한다만, 차기 성자와 편히 대화하는 건 사적인 자리에서 하거라.”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내 확답에도 부왕 전하의 표정에는 희미한 의심과 걱정이 남아있었다.
“…그래. 잘 할 거라 믿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미한 감정에 불과했다. 내가 사적인 자리에서는 모를까, 공적인 자리에서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치기 직전까지 간 것까지 포함한다면 또 모를까.
‘미수와 실행은 다른 법이지.’
조금 특이한 짓을 할지언정 국익과 왕실의 체면에 타격을 준 적은 없는 아들. 그것이 부왕 전하 마음속의 내 위치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신기하기도 하지. 네가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했을 때는 대련을 하다가 머리를 다쳤나 싶었는데, 그 입학이 이런 인맥으로 이어질지 누가 알았겠냐.”
부왕 전하의 뒤를 이어 둘째 형님이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몰랐다. 제국 3황자인 아인테르가 입학 예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라테르나 타니안까지 입학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다 에넨께서 인도하심이 아니겠습니까?”
“크흐, 에넨께서 차기 성자를 엄하게 키우실 생각이셨나 보군.”
둘째 형님의 말에 조용히 차를 마시던 누님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님?”
“미, 미안하구나. 갑자기 재미있던 기억이 떠올라서…”
황급히 변명을 하는 누님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고 했으니 더 추궁할 필요는 없다.
순례단은 외교부에 알려준 시간에 맞춰 라두스에 도착했다.
“어서 오시오. 아르메인에 온 것을 환영하오.”
“주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국왕 전하와 로벤스 왕가의 성대한 환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순례단 선두에 있던 타니안을 향해 부왕 전하가 악수를 청하자, 타니안은 부왕 전하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살며시 목례를 했다.
“성대라니. 바람이 차가워 더욱 화려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오.”
타니안의 목례에 부왕 전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로 예를 보이며 겸양을 표하는 인사. 첫인사로서는 최고의 상황이다.
“신성교국에서 겨울 삼국을 거쳐 제국까지 갔었다고 들었는데, 추운 날에 고생이 많았겠소. 부디 아르메인에서는 편히 지내다 가시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 말을 끝으로 타니안은 큰형님을 쳐다보더니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제 친우의 용맹하고도 훤칠한 모습은 전하께서 자식들에게 공평히 하사하신 거였군요.”
“하사하다니. 오히려 이 아비보다 훌륭한 녀석들이오.”
“그렇다면 왕후께서 많은 도움을 주신 것이군요. 이해했습니다.”
직설적인 자식 칭찬, 덩달아 그 자식들의 부모인 부왕 전하와 어머니까지 포함한 덕담에 부왕 전하의 입꼬리는 더더욱 올라갔다. 세상에 대가 없는 칭찬을 싫어할 사람은 없는 법이지 않나.
그것이 가족에 대한 칭찬이라면 더더욱.
“데니오 추기경은 무뚝뚝해서 대화를 하기도 어려웠는데, 차기 성자께서는 실로 태양처럼 따스한 분이시군요. 혹시 신성교국 사람들은 전부 데니오 추기경 같은 사람들이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큰형님도 타니안의 말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데니오 추기경 예하는 교국에 계실 때에도 말이 없는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허나 자신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지는 분이라 말을 아끼시는 거니,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십시오.”
“하하, 물론입니다. 추기경이 신중하고 책임감 넘치는 분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렇게 큰형님과 의례적인 대화를 나눈 타니안은 둘째 형님, 누님을 거쳐,
“오랜만입니다, 형제님.”
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예, 오랜만이로군요.”
조금 어색했다. 타니안에게 존대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오랜만에 만난 것을 기념하며 거하게 어깨동무라도 하고 싶었으나, 부왕 전하께서 친밀감을 표하는 건 사적인 자리에서 하라 말씀하셨지. 아들로서 부왕 전하의 뜻을 어길 수는 없다.
어차피 아르메인은 넓다. 제국 수준은 아니지만 순례단이 아르메인에 머무는 기간은 결코 짧지 않을 거다. 그중 타니안과 사적으로 만나는 건 가능하니─
“서운합니다. 아인테르 형제님이야 그렇다 쳐도, 류티스 형제님의 존대를 들으니 마음의 벽이 생긴 기분이군요.”
“형제님?”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의 3년은 다른 사람들의 30년이지 않았습니까.”
…
흐으음.
“10년 만에 보는군. 그동안 잘 지냈나?”
“하하, 주의 보우하심 덕에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형제님도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나야 언제나 즐겁지.”
자연스러운 대화에 부왕 전하가 뒷목을 잡는 것이 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
귀빈인 차기 성자의 요청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자로서 손님의 요청에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여기서 차갑고 단호하게 존대를 고집했다면 극진히 대접해야 할 타니안이 서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나는 당당하다. 나는 사적인 감정이 아닌 공적인 대의를 위하여 말을 놓은 것이다.
“참, 저희가 헤어진 동안 아인테르 형제님은 약혼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냈더군요.”
“바란디가 후작 영애를 말하는 건가?”
“예.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짝이었습니다.”
조금 의외인 말이다. 아인테르가 유목민 출신 귀족 영애가 약혼을 맺었다는 건 알고 있으나, 철저히 정략인 줄 알았는데.
‘그새 정이 들었나 보군.’
시작은 정략이지만 그 끝은 진정한 사랑이라. 제법 아름다운 이야기다.
“류티스 형제님은 좋은 소식 없습니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설마 어머니에게 듣던 말을 타니안에게도 들을 줄이야.
“네 친우인 아인테르 황제(皇弟)는 약혼녀가 생겼다더구나. 타일글레헨 백작의 동생인 하디네르 남작은 둘이나 있고. 너도 분명 같은 학창 생활을 보냈을 터인데 어찌 너는 소식이 없느냐.”
“혹시 상대의 신분이 낮아 고민하는 것이면 괜찮단다. 3왕자인 너라면 하위 귀족이나 기사 가문이어도 응원하마.”
“평민이면 많이 힘들겠지만, 일단 데려오기만 하렴. 없는 것과 힘든 것은 다른 법이니.”
“없다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데리고 와야 할 것 아니니! 네가 약혼녀조차 없어서 네 동생들은 결혼도 못 하고 있어!”
당연히 어머니의 잔소리가 더욱 강렬했지만.
“없으신가 보군요.”
아무튼 내 웃음을 본 타니안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본디 인연이란 바람처럼 잡을 수 없지만, 바람처럼 말없이 곁에 다가오는 법이지요. 언젠가는 형제님도 좋은 상대를 만날 겁니다.”
진심이 가득한 위로에 기분이 오묘했다. 나나 타니안이나 다를 게 없는데 왜 이런 위로… 를…?
‘설마.’
설마 타니안 이놈. 아인테르나 에리히처럼 짝을 찾은 건가?
그렇다면 저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따뜻한 위로를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은 나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 중이니 가능한 행동이니까.
‘…대단하군.’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타니안까지 짝이 생겼다면 제과 동아리 부원 다섯 중 절반 이상이 새로운 사랑을 찾은 것이다. 이제 미혼자는 다수파가 아닌 소수파다.
아니, 라테르가 유벤 연합왕국의 둘뿐인 왕자라는 걸 생각하면 지금쯤 정략 얘기가 진행 중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유일한 미혼자가 된다.
‘허어.’
다섯 명 중 나 홀로 미혼자인 상황.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
사흘 정도는 아르메인의 수도인 라두스에서 머물기로 했다.
아무리 텔레포트를 통해 편하게 이동했지만 국경을 넘은 대이동이다. 바로 일정에 돌입하는 건 몸을 과도하게 혹사시키는 꼴이다. 그리고 아르메인 국왕의 말처럼 아르메인의 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북방 수준은 아니나, 제국 본토보다는 추울 정도로.
“제국과 아르메인은 대국입니다. 덕분에 서로 국경이 붙은 국가임에도 각국의 수도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요. 아우스엔과 라두스의 차이를 느끼며 관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대신 사흘 동안 아르메인이 제공해 준 숙소에만 머무를 생각은 없다. 이왕 타국에 왔다면 그 국가의 문화, 종교적 특징을 구경하는 것이 도리인 법.
그래서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과 느긋한 데이트를 즐기려 했는데,
“오호.”
왕궁을 빠져나오는 길에 흥미로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대련을 하는 류티스 형제님과 이를 악물며 검을 막고 있는 어느 자매님.
아마 이름이, 페로사 가넬리라고 했었나? 가끔 얼굴을 본 기억이 있다. 분명 빌라르 가넬리 형제님의 딸이었지.
‘재미있는 조합이야.’
잠시 그 광경을 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류티스 형제님에게 자그마한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본 것으로 만족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