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4)
로판 속 공무원 624화(625/945)
신성교국의 순례단이 라두스에 도착한 다음날.
“이러고 있으니 동아리 생각이 나는군요.”
타니안이 대면을 요청하여 단둘만의 미니 다과회가 열리게 되었다.
원래는 다과회가 아닌 식사를 같이 할 생각이었으나, 라두스 관광을 즐긴 타니안이 예전 분위기를 내자며 쿠키를 사 왔다.친우가 학창 시절의 추억을 재현하자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때는 하루하루가 재미있었지. 가끔 쿠키를 굽던 게 생각나서 주방을 기웃거린 적도 있었어.”
마침 나 또한 아카데미 시절을, 동아리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했었다. 불과 1년 정도 전의 일이었지만 너무도 그립고도 즐거운 시절이었기에.
“사실 저는 몇 번 구워봤습니다. 신도들을 위한 봉사라는 명분으로 주방을 자주 들어갈 수 있거든요.”
“허, 그건 좀 부러운데. 나는 주방 근처에만 가도 요리사들이 기겁을 해서 원.”
타니안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3년 동안 제과 동아리 부원으로 지낸 덕에 내 제과 실력은 보통 이상은 된다. 허나 왕자라는 신분 덕분에 이 왕궁에서는 제과는커녕 주방에 진입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타니안은 나와 달리 제과 실력을 여전히 뽐낼 수 있었다. 고귀하디 고귀한 차기 성자이나, 그 고귀함과 비례하는 봉사와 헌신을 중요시하는 사제니까.
‘부럽군.’
제과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부러운 거다.
생각해 보면 왕족으로 태어난 내가 가장 자유롭게 지냈던 시기도 아카데미 3년이었지. 왜 아카데미 교육 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 6년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고문 선생이 쫓아냈으려나.’
무심코 든 생각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 아마 그랬을 확률이 높다. 고문 선생 정도 되는 인력이 3년이나 아카데미에 묶인 것도 기적이었는데, 6년이나 아카데미에서 외부 인사들을 관리한다? 제국도 고문 선생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전에 우리를 어떻게든 출국시키거나, 하다못해 고문 선생이 아닌 다른 인력이 왔을 터.
그러나 고문 선생이 아닌 다른 관료가 왔다면… 우리를 제대로 관리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문 선생만한 사람이 없어.
“그러고 보니 고문 선생은 잘 지내고 있나?”
고문 선생이 생각난 김에 안부를 확인하자, 타니안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으나 만족스럽다. 어떠한 미사여구보다 신뢰가 가는 대답이었으니.
“고문 형제님의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라는 중이고, 늦둥이 여동생도 귀엽더군요.”
“아, 그랬지. 고문 선생에게 동생이 하나 더 생겼다고 했었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당황스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오던지. 설마 고문 선생과 에리히에게 늦둥이 동생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그것도 고문 선생의 자식보다도 어린 동생이.
‘사랑이 넘치는 가문이야.’
물론 우리 왕가보다는 덜하겠지만.
“아인테르 형제님과 에리히 형제님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년쯤에는 결혼할 예정이라던데, 어떤 선물을 보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졸업하자마자 다들 가정을 꾸리는군. 이러다 나만 혼자가 되겠어.”
그 말과 함께 슬쩍 타니안의 안색을 살폈다.
여기서 타니안이 부정하지 않는다면 타니안에게 짝이 생긴 것이 확실해진다. 타니안은 지난 3년 동안 과하게 솔직해서 문제였지, 거짓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아직 라테르 형제님의 근황은 확인하지 못해서 류티스 형제님이 혼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군요.”
그리고 타니안의 대답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가능성 높은 가설이 진실로 확정됐다. 도대체 요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타니안도 짝을 찾은 것이 확실하다.
‘이러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데.’
이윽고 미세한 위기감이 몰려왔다.
아인테르와 에리히에게 밀리는 건 납득할 수 있다. 아인테르는 황제의 유일한 동생이기에 언제든지 정략에 사용될 카드였고, 에리히에게는 세라와 호르펠트 백작이 존재했다. 나보다 빨리 결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제인 타니안에게도 밀리는 건 심각한 문제다. 여명 교단이 사제의 결혼을 금하는 건 아니나, 사교계의 중심인 왕족보다 차기 성자가 먼저 연인을 찾는 건 심각한 문제 아닌가. 상식적으로 신앙에 몰두하는 차기 성자보다 왕족인 내가 먼저 결혼을 하거나 짝을 만드는 것이 옳다.
‘…미혼으로 살아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사실 결혼에는 딱히 미련이 없다. 내 인생에서 사랑을 경험한 건 루이제에게 반했던 약 반 년의 시간뿐이었다. 그 반 년을 제외하고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호감을 가진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련이 없는 것과 달리 어머니는 미련이 넘치는 상태시다.
“네 친우인 아인테르 황제(皇弟)는 약혼녀가 생겼다더구나. 타일글레헨 백작의 동생인 하디네르 남작은 둘이나 있고. 너도 분명 같은 학창 생활을 보냈을 터인데 어찌 너는 소식이 없느냐.”
내가 언제 결혼을 하는지 오매불망 기다리는 어머니. 왕세자인 큰형님은 어쩔 수 없으나, 이왕이면 자식들이 정략이 아닌 연애로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학창 시절 친우들 중 나 혼자 미혼이라는 걸 알면 어떻게 돌변할지 장담할 수 없다. 지금도 분노와 이성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시잖아. 당연히 아들로서 위기감을 느낄만한 사안이다.
“형제님.”
“응?”
어떻게 해야 이 참담한 소식이 어머니 귀에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타니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인연이라는 것은 바람과도 같다 말했었지요.”
그 말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에게 짝이 없다는 걸 확인한 타니안은 그렇게 말했었다.
“바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혹시 오는 길에 시집이라도 읽었나?”
갑자기 너무 문학적인 표현을 남발하는데.
“하하, 옛 성서를 해석하다 보면 이렇게 됩니다.”
내 농담에 타니안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리고 형제님이 조금만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면 바람을 느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온화하면서도 진중한 얼굴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바람을 느낀다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몸으로 느낄 수 있다라.
‘어렵네.’
타니안도 역시 사제기는 사제다.
이렇게 미묘하고 헷갈리는 말을 던지는 걸 보면 전형적인 예배 시간의 사제야.
미니 다과회를 마치자마자 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단련을 하루라도 빠트리면 몸이 뻐근한 것도 있으나, 타니안이 던진 화두로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할 필요도 있었으니까.
사악한 녀석. 오랜만에 만난 친우에게 이런 고난을 선물하고 가다니.
‘바람이라…’
그렇게 연신 검을 휘두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명확한 방법을 제시했거나 목적지가 보인다면 기꺼이 나아갔을 거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가시밭길이어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 눈에 목적지가 보이는 이상 언젠가는 도달하는 법이다.
그러나 타니안이 준 조언은 타니안의 말대로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바로 코앞에 있는지, 죽을 때까지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전하.”
기약 없는 전투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숫자를 알 수 없는 적, 위치를 알 수 없는 적진처럼 공포스러운 것은 없다.
“전하?”
심지어 그 적이 외부가 아닌 내부라면 더더욱─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
뒤늦게 정신이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로사 경이었다.
‘이런.’
민망했다. 검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검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다니. 만약 이곳이 연무장이 아니라 전장이었다면, 페로사 경이 아니라 암살자였다면 나는 수십 번 정도 죽었을 거다.
“미안하네, 경. 잠시 친우에게 받은 선물을 생각 중이었네. 워낙 인상적이어서 말이야.”
애써 민망함을 감추기 위하여 과장되게 웃었다. 대련 상대 앞에서 정신이 불안정함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친우라면… 차기 성자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아르메인에 내 친우라고 할 사람이 타니안밖에 더 있겠나.”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페로사 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친우라는 건 무엇인가.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서로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자주 만나는 사이라면 그것이 친우다. 그 관계에 나이와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면 페로사 경도 내 친우가 아닐까?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도 2년 반 동안 함께 지냈고, 졸업 이후에는 거의 매일 대련을 하고 있다. 기사로서 같은 즐거움을 나누고 있으니 친우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형제님이 조금만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면 바람을 느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흐으음.’
문득 타니안이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물론 타니안은 언젠가 나도 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의미의 조언이었겠지만, 짝이라는 것이 꼭 연인 사이의 관계라는 법은 없다. 기사로서 훌륭한 짝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과장된 웃음이 아닌 진심 어린 웃음이 터졌다.
“페로사 경.”
“예, 전하.”
“경이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여, 영광입니다!’
페로사 경의 어깨를 토닥이며 소소한 감사를 표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덕에 친우를 잃은 나, 훌륭한 대련 상대를 잃은 나.
즐거움을 잃고 우울감에 빠졌을지도 모를 나를 구한 건 다름 아닌 페로사 경이었다. 그것을 지금까지 당연한 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됐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바람을 느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
이번 주말에도 테레사를 품에 안고 성을 누비다가 에리히와 마주쳤다. 얘도 주말마다 시간을 내서 성에 방문하는 모양이다.
“맞다, 형.”
“어, 왜.”
“류티스도 약혼이나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던데?”
그리고 내 옆에서 걷던 에리히의 말에 우뚝 몸이 멈추고 말았다.
“우- 우-!”
어트랙션이 자기 멋대로 작동을 멈췄기에 테레사가 성을 냈으나, 예상치 못한 충격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거 어디서 들은 거냐?”
“타니안한테. 걔 이번에 아르메인으로 건너갔잖아.”
정보의 출처가 차기 성자라는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녀석이 이상한 말을 할지언정 거짓말을 하는 녀석은 아닌데.
…
잠깐만.
“타니안한테 들었다고?”
“어. 저번에 통신구 번호 교환했거든. 직접 보는 건 힘들어도 연락 정도는 가능하지.”
당연한 말이기에 납득했다. 확실히 친구였던 놈들이 번호를 교환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그 당연한 걸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바로 옆에 차기 성자 직통 전화가 있었네.’
내 동생이 생각보다 귀한 몸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