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5)
로판 속 공무원 625화(626/945)
타니안을 비롯한 순례단은 성지 순례 여정을 떠났다. 이제 순례단이 출국하기 전까지는 타니안과 만날 기회가 없을 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괜찮다. 아쉬움은 출국 배웅을 할 때 달래면 되는 것이고, 타니안이 매정하게 순례를 떠난 것도 아니지 않나. 나에게 귀중한 조언을 남긴 채 떠났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바람은 보거나 잡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마땅히 느낄 수 있는 것. 누구에게도 듣지 못할 보석 같은 조언을 남겼으니.
‘확실히 차기 성자는 맞아.’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고작 몇 마디로 그 마음을 일깨워줬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도 경이로운 언변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3년 동안 같이 쿠키를 굽거나 체스를 하거나 족구를 해서 잊고 있었으나, 타니안은 신성교국 내에서도 여러 사제들과 신앙 토론을 했을 지식인이다. 지혜나 통찰력을 따지면 나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날 수밖에 없다.
‘역시 친구는 잘 사귀고 볼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르메인 내의 교육 기관이 아닌 제국의 교육 기관을 택하자 화려한 교우 관계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가 제국의 황족, 타국의 왕족, 차기 성자, 제국의회 의원 대리를 친구로 만들 수 있을까. 이건 왕세자인 큰형님도 불가능한 업적이다.
그렇기에 조금은 걱정이다. 내가 선례를 잘 만들어도 너무 잘 만들었기에, 아르메인 왕족 중에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히 말리기에는 즐겁고 좋은 경험이기는 했어.
‘차라리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삼아야 하나?’
제국 아카데미는 명목상 모든 대륙인에게 열린 중립 지대. 그러한 중립의 장에 제국의 황족과 아르메인의 왕족이 나란히 있다면 양국의 우호적 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마치 지금의 나와 아인테르처럼. 아무리 양국 관계가 파탄에 이르러도 최소한의 안전 장치이자 소통 창구가 될 수 있는 우리 둘처럼.
물론 내 동생들은 아르메인의 교육 기관에서 공부할 예정이니 괜한 걱정이지만, 내 자식이나 조카들은 어떨지 모르니까.
‘그때쯤이면 고문 선생의 아이들도 학생으로 있겠지.’
은근히 미취학이라는 학력에 신경 쓰던 고문 선생이다. 자신의 자식들만큼은 반드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시킬 것이 분명하다.
‘매력적인 조건이야.’
휘두르던 검을 바닥에 꽂은 채 턱을 매만졌다.
고문 선생의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더더욱 입학해야 할 것 같은데? 황실은 물론 실세 가문과도 연이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전하.”
“아, 페로사 경.”
그렇게 고문 선생의 자식들과 내 미래 조카들의 나이가 비슷한지 계산하던 중, 페로사 경이 다가왔다.
“어서 오게. 평소보다 빨리 왔군.”
“슬슬 날씨가 풀리는 것 같아 이르게 나왔습니다. 혹시 전하의 시간을 방해하였는지요?”
“하하, 그럴 리가! 오히려 같이 검을 휘두를 상대가 와줘서 고맙지!”
날이 풀려서 조금이라도 더 단련하기 위해 왔다? 기사로서 만점이나 다름없는 답변이라 흐뭇했다.젊은 기사가 이리도 열정적이니 아르메인이 기사왕국이라 불리며 군림하는 것이겠지.
아니, 어쩌면 빌라르 경의 딸이기에 부친의 성격을 닮은 걸 수도 있다. 빌라르 경은 견습 기사 시절부터 뼈를 깎는 수준의 노력을 이어왔다고 들었으니.
‘부녀가 나란히 왕국의 홍복이군.’
그렇다면 2대에 걸친 충신 가문을 위해 작은 조언이라도 줘볼까.
“페로사 경.”
“예, 전하.”
“경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제국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도 고려해 보게.”
그렇게 되면 가넬리 가문의 3대는 막강한 인맥을 갖출 수 있다. 아카데미에서 고생만 한 1, 2대와 달리 즐거운 추억만 쌓을 수도 있지.
물론 아르메인의 기사가 제국의 교육 기관에서 가르침을 받는 건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일. 아무리 이득이라고 해도 강하게 권할 수는 없다. 지금처럼 가능성만 언급하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자식… 말씀이십니까?”
허나 내 말에 페로사 경은 당혹감에 빠지지도, 깊은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만 깜빡이며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송구하오나 소신은 아직 변변찮은 약혼자도 없어서, 자식이 생길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이윽고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 페로사 경도 나와 같은 상황이었군.
‘진정한 친우가 여기 있었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온함과 만족감이 솟구쳤다. 학창 시절 친우들은 하나둘 짝을 찾아가는 중이다. 국경이라는 벽 때문에 매일매일 대련을 하던 친우와 갈라진 상황이다.
헌데 페로사 경은 나처럼 홀로 나아가는 중이고, 나와 매일 어울려주는 중이다. 앞으로 수 년에서 수십 년은 함께할 수 있는 둘도 없을 친우다.
왕국의 충신이 미혼인 걸로 기뻐하는 건 너무한 일이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나. 가끔은 이성보다 본능이 더 강한 법인데.
“나도 혼자고 경도 혼자니, 남들이 보면 우리가 연인이 된 줄 알겠어.”
민망한 본능을 억누르며 페로사 경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주제는 이만 접고 슬슬 대련 준비를─
“화, 황공한 말씀입니다! 어찌 일개 기사가 아르메인의 자랑이신 저하와 연인이 되겠습니까!”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농담으로 건넨 말에 저리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면 조금 상처인데. 그냥 영광입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정도로 넘어가도 충분하지 않나?
“소인 따위가 전하의 대련 상대가 될 수 있는 것도 영광인데, 전하의 연인이라고 오해받는 것은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결례입니다!”
다행히 내가 싫어서 거부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한없이 낮은 존재로 생각해서 거부하는 것이었지만.
아니, 이게 다행이 맞나? 그건 좀 헷갈린다.
“진정하게. 그만큼 경과 친밀히 지낼 수 있어서 기쁘다는 의미였어.”
일단 바닥에 엎드려버린 페로사 경을 억지로 일으켰다.
남들이 보면 페로사 경이 나에게 무례를 저질러 목숨으로 사죄하려는 줄 알겠다.
***
제국 아카데미에서 3년이라는 세월을 불태운 대가는 확실했다.
영광스러운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 류티스 저하를 보호하며 타지에서 고생한 대가로는 적절하다 못해 과분할 정도였다.
“고생 많았네, 빌라르 경. 앞으로는 조국의 품 안에서 편히 지내게나.”
허나 노환으로 은퇴한 전대 부단장.
“경의 능력이라면 언제든 오를 수 있는 자리였지. 파견이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긴 거라 생각하게.”
나에게 부단장의 증표를 달아준 현 단장의 위로와 격려는 내 가슴을 자비 없이 헤집었었다.
나는 이제 그때의 일을 과거의 일로, 조금 특이했던 파견으로 묻어두고 싶다.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당시의 일을 언급하며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당사자는 괜찮다는데 제삼자들의 관심이 너무도 깊었다.파견 업무가 끝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생 낙인처럼 남겠군.’
요즘 들어 검보다 더 자주 잡는 듯한 펜을 내려놓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메인의 사내로서 기사의 길을 택했고, 남들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노력한 끝에 왕실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 왕실 기사단 내에서도 제법 고위직인 자리에도 올랐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내 눈물과 피가 어린 길은 어디로 가고 남들의 동정을 받는 길이 남아버렸는가. 나는 절대 누군가의 동정을 받을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는데.
‘탈퇴를 할 수도 없고.’
내가 걸어온 길이 동경과 경외가 아닌 동정과 측은함의 시선을 받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명예로운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이 동정의 대상이라는 건 나 개인의 치욕이 아닌 왕실의 명예를 더럽히는 꼴이다.
그렇지만 차마 왕실 기사단을 나올 수는 없었다. 아직 현역인 주제에 명예로운 자리를 던진다는 건 국왕 전하를 향한 불충이요, 이 시기에 내가 하야를 한다면 ‘부단장이 결국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은퇴했다.’ 라는 흉악한 소문만 퍼질 터.
씁쓸하다. 아카데미 파견이라는 산을 넘으니 타인의 시선이라는 호수가 맞이해주는구나.
– 똑똑.
“부단장님. 페로사 경이 복귀했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그렇게 뻐근한 뒷목을 매만지던 중, 류티스 저하와 함께 단련을 하던 페로사가 복귀했다.
이 아비의 고통과 별개로 페로사가 류티스 저하의 대련 상대가 된 것은 기뻐할 일이다. 류티스 저하의 실력은 또래 중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며, 그런 실력자와 매일 검을 나눌 수 있는 건 기사로서 둘도 없을 행운이니까.
다만 하필 나처럼 아카데미 파견 경력이 있던 페로사인지라, 페로사도 파견에 대한 보상 명목이 아니냐는 동정의 시선을 받는 중이다.
‘부녀가 나란히…’
다시 씁쓸함이 몰려왔다. 지금이라도 페로사는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하나?
“부단장님. 류티스 저하와의 대련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수고 많았다. 1시간 휴식 후 업무에 복귀하도록.”
“예.”
그러나 페로사가 기껏 입단한 왕실 기사단에서 나갈 것 같지는 않다. 강제로 내보내려고 한다면 의절을 각오해야겠지.
…음?
“페로사.”
“네, 아버지.”
휴식에 돌입하자마자 바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페로사의 모습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저하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페로사의 표정이 평소보다 붉었다.
격한 대련을 하고 왔다는 걸 감안해도 심각하게.
“그, 그것이.”
내 질문에 페로사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무슨 일이지? 설마 저하께 무례라도 저지른 건가? 아니, 저하의 열렬한 추종자인 페로사가 저하 앞에서 그럴 리는 없다. 게다가 정말 무례를 저질렀다면 진작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고해성사를 했을 거다.
“저, 저, 전하께서, 너무도 과분하고도 황공스러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페로사가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고,
“…….”
나는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저하께 그런 말을 듣는다면 동요할 영애들이 한둘이 아닐 터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아카데미 시절, 눈치가 다소 부족했던 류티스 저하를 보는 기분이었으니까.
‘여기는 감찰관도 없거늘.’
만약, 만약 그 시절의 저하가 단발성으로 나타난 게 아니라 지속성이라면… 나 홀로 저하의 기행을 수습해야 하는 건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