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6)
로판 속 공무원 626화(627/945)
어느덧 겨울을 넘어 봄이라고 할만한 날씨가 찾아왔다.아침마다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은 추위가 느껴지는 건 여전하지만, 적어도 정원에 가득 쌓인 눈을 볼 일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외부 온도가 급격히 변화하면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는 육체도 놀라는 법. 이 시기에 방심을 하면 감기에 걸리거나 이상한 병에 걸릴 확률이 존재한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지?”
그렇기에 만삭에 돌입 중인 린의 배를 쓰다듬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플란벨 백작령의 튤립 동산에서 보냈던 오붓하고 따뜻했던 시간. 그때 우리 곁으로 찾아온 소중한 보물인 바다.
혹여나 임산부인 린이 만삭일 때, 태아인 바다가 나올 준비를 할 때 병이라도 걸린다면 마음이 찢어질 거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아이가 병부터 안게 되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움직이기 힘든 것 빼고는 괜찮아요.”
다행히 내 질문에 린은 아무런 근심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린이 튼튼하기는 하지.’
그런 린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린은 상계에서 맹활약을 하는 요룬 백작가의 영애이며, 아카데미 3년 동안 꽃꽂이 동아리에 몸을 담은 레이디다. 단순히 이력만 보면 동화 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에 가깝다.
그러나 실상은 아카데미 반 대항전 때마다 승마 1등을 당당히 거머쥐는 기수이자 졸업 이후에도 승마를 즐긴 체육인. 단순 육체적 능력만 따지면 어지간한 남성보다 건강할 수도 있다.
‘나랑 린을 닮았으면 건강하겠네.’
이윽고 린의 품에서 곤히 자고 있을 바다를 떠올렸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혈통과 린의 건강이 결합된다면 바다는 뛰어난 무인으로─
“…응?”
“아, 방금 발로 찼어요.”
손에서부터 올라오는 둔탁한 충격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린이 태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그게… 바다가 발길질을 한 거라고…?
‘주먹으로 팬 것 같은데.’
뭔가 얼떨떨하다. 페디와 세쌍둥이, 프리드리히의 발길질은 수도 없이 느꼈다. 당연히 바다의 발길질도 수십, 수백 번은 더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 느낀 발길질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둔탁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나올 준비를 하는 것처럼.
‘순산하겠어.’
그래도 얼떨떨함은 금방 흐뭇함으로 변했다. 바다가 나올 준비를 만전으로 갖추었다면 린이 출산에 난항을 겪을 일도 없을 터. 어쩌면 어머니처럼 순탄한 출산을 겪을 수도 있다.
기대된다. 이 준비만전인 아이는 어떤 아이로 자랄까. 얼마나 활기가 넘치는 아이로 자라서 저택을 누비고 다닐까.
페디처럼 티티의 등을 타고 저택을 누빌까? 아니면 세쌍둥이처럼 성수들을 물고 빨까? 그것도 아니라면 의외로 프리드리히 같은 얌전한 아이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못 본 유형일 수도 있고.’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아이는 아빠와 엄마 곁에 있다는 것 자체로도 행복을 주는 존재니까.
“우리 바다는 아빠를 더 닮았을까, 엄마를 더 닮았을까?”
“방금 발길질을 보니까 아빠를 닮았을 것 같은데요?”
“엄마를 닮아서 똑똑하면 위리디아를 물려주고 싶은데.”
내 말에 나와 함께 배를 쓰다듬던 린의 손이 우뚝 멈췄다.
“위리… 디아요?”
“아, 변두리라서 좀 그런가?”
“누가 위리디아를 변두리로 보겠어요. 본토랑 북방을 잇는 요충지인데.”
조금 당황한 듯한 린의 반응에 픽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북방 정벌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위리디아는 본토와 북방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거점이지.
“그래서 린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우리 중에 상재가 있는 건 우리 린밖에 없잖아.”
위리디아는 이미 두 지역의 중계 무역지로 특색이 잡혀가는 중이다. 북방의 말이나 가죽, 광석은 위리디아를 거쳐 제국 각지에 퍼지는 중이고, 본토의 공산품이나 기호품이 북방에 가려면 반드시 위리디아를 거쳐야 한다.
때문에 내 뒤를 이어 2대 위리디아 백작이 될 아이는 상재에 능해야 한다. 솔직히 상재가 쥐뿔도 없는 내가 위리디아를 붙잡고 있는 건 북방 영주들과의 상하관계와 직접 작위를 하사받은 초대 백작이라는 권위 덕분이니까. 2대도 상재에 까막눈이면 좀 그래.
“물론 교양 정도만 알아도 충분해. 어차피 실무는 아랫것들이 하잖아.”
아직도 당혹감을 밀어내지 못했는지, 멍하니 내 눈을 보는 린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엄마를 닮으면 말도 잘 타겠지? 그럼 위리디아가 딱이네.”
“그럼 바다는 말을 잘 타서 작위 귀족이 되는 거네요?”
슬쩍 농담을 건네고 나서야 린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일에 린이 당황할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웃기만 해도 충분하다.
‘아빠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 재산 중 일부가 조금 큰 땅에 불과한 거고.
물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뭘 물려주니 마니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원래 후계 구도는 뒤흔들 여지가 없이 깔끔한 게 좋다. 이건 저승에서 지옥불 찜질 중일 2황자가 자기 몸을 불살라 증명한 진리다.
딱히 고맙지는 않다. 백 번 죽어도 부족한 씹새끼.
“그러니까 몸 관리 잘해. 날이 풀려가기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감기 걸리기 쉬워.”
“걱정 말아요. 어릴 때부터 잔병 하나 없이 자랐어요.”
결국 돌고 돌아 몸조심하라는 말로 끝나자, 린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말뿐인 장담이었지만 묘하게 신뢰가 가는 대답이었다.
“그럼 가볼게. 에리가 늦었다고 화낼라.”
“아, 어서 가봐요. 늦으면 언니가 삐질 수도 있어요.”
바로 이해해 주는 린의 모습에 다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에리는 임신이 확정되자마자 바로 임신 휴가를 신청해서 우리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 정보차장도 제발 휴가나 즐기라며 광속으로 신청서를 결재했을 정도니 모두가 행복한 휴가를 즐기는 중이다.
“그동안 일하느라 따로 지냈잖아요! 앞으로는 매일매일 나랑 하양이 만나러 와줘요!”
허나 그동안 떨어져서 지낸 설움이 터졌는지, 에리는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자기 방으로 와달라며 떼를 썼다.
딱히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떼를 쓰지 않았더라도 당연히 들어줄 일이었지.
‘너무 떨어져 지내기는 했어.’
다른 부인들이 저택에 상주하는 동안 피네와 더불어 감찰성 생활을 하던 에리. 그동안 얼마나 씁쓸하고 외로웠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사실 트릭시도 마탑주라는 직책이 있어서 나와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마탑주가 오붓한 신혼 생활을 즐기겠다는데 누가 출근하라고 독촉하겠어. 부탑주가 알아서 잘 일하고 있다더라.
그렇기에 에리에게 죄가 있다면 일개 과장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실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임신 2개월 정도라 티도 잘 나지 않는 배를 빵빵하게 내밀며 임신을 과시 중인 에리.
그런 에리를 여왕님처럼 보살피며 놀던 도중,
‘뭐야.’
품 속에 두었던 통신구가 반짝반짝 빛을 뿜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내가 휴가 중이라는 건 제국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지라, 정말 어지간히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직통 연락이 아닌 문자를 보내는 편이다. 이렇게 통신구가 자체발광하기보다는 진동 상태에 돌입해야 정상이다.
“무엄하다! 감히 이 에르제베트 님 앞에서 거슬리는 빛을 내뿜다니!”
“잠깐만 조용히.”
“넹.”
통신구의 빛을 보며 이상한 말을 하던 에리를 제지한 후, 통신구를 꺼내 구석으로 향했다. 급한 용무라면 바로 받아야 하니까.
“감찰성 장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입니다.”
– 오랜만입니다, 백작 각하.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고 말았다.
3년 동안 나와 함께 지옥을 굴렀던 마음의 동지.이제는 아르메인 왕실 기사단 부단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거물.
“빌라르 경?”
아카데미 졸업 이후로 소문으로만 근황을 접했던 인물이 먼저 연락을 걸었다.
놀랍지만 반갑기도 했다. 빌라르가 없었다면 내 아카데미 생활이 더욱 지옥이었을 테니까. 내가 지옥에서 건져올린 몇 안 되는 보물 중 하나가 빌라르다.
– 갑자기 일방적으로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친우끼리 그럴 수도 있지요.”
내 말에 빌라르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올라간 입꼬리와 상반되는 짙은 다크서클이 눈에 들어왔다.
‘업무에 치이는 중인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왕실 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자리는 기사의 무력은 물론, 행정력과 정치력도 요구되는 자리. 그런 자리에 일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빌라르는 제국 아카데미라는 타국 한가운데에서, 아르메인-유벤-신성교국 삼국 호위단을 조율하고 이끌었던 능력자다. 지금은 낯선 업무에 골골거리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터.
“그러고 보니 최근 부단장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축하드립니다.”
– 저야말로 각하께 축하를 드릴 일이 많습니다. 가문이 번창하고 있다던데, 앞으로도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아무튼 의례적인 축하 인사를 주고받은 뒤, 빌라르가 무언가 고민하는 듯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 각하, 실례지만 근처에 듣는 귀가 있습니까?
이윽고 조심스레 주변 환경을 확인했다. 혹시 우리의 대화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있느냐고.
“부인이 있기는 합니다만…”
– 그럼 됐습니다. 각하의 부인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순간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지만 참았다.
– 이미 아카데미 파견도 끝났고, 아르메인과 아무런 연도 없는 각하께 이런 연락을 드리는 건 정말 죄송스럽고도 민망한 일입니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혀가 길어지기 시작한 빌라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문장을 마쳤다.
– 저하께서 그 시절로 복귀하셨습니다.
“…예?”
침통한 목소리에 절로 반문이 나왔다.
저하가 그 시절로 복귀해? 그게 무슨 소리야. 저하는 누구고 그 시절은 뭔데.
‘류티스 말하는 건가?’
정황상 류티스기는 할 거다. 빌라르와 내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아르메인의 ‘저하’는 류티스밖에 없으니.
그럼 그 시절로 돌아갔다는 건…
‘…77년도 시즌?’
소름이 돋았다. 빌라르가 나에게 급히 연락을 할 정도로 끔찍한 사태라면 그것밖에 없다.
– 몇 번이나 고민했습니다. 아르메인의 일에 각하의 도움을 받는 건 죄송스러운 일이라, 요 몇 주 동안 제 선에서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내 침묵에 빌라르는 다시 구구절절이 입을 열었다.
– 허나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도 저하의 눈치나 행동은 제가 아닌, 각하가 조정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눈물겨운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조정이라니.’
난 마지막까지 그 금쪽이 같은 새끼 조정하지 못했어.
그놈이 리제한테 차이고 나서야 상대적 제정신으로 변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