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7)
로판 속 공무원 627화(628/945)
빌라르의 처절한 고백에는 듣는 사람이 절로 숙연해지는 힘이 깃들어있었다.
왕실 기사단이 어떤 기사단인가. 왕족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방패이자 왕국 제일의 무력을 자랑하는 검이다. 그런 왕실 기사단 소속이라는 자부심은 기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긍지이며, 자신이 수호하는 왕족에 대한 충성심과 경외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아무리 3년 동안 같은 지옥을 구른 동지라지만, 타국인에게 ‘우리 왕자님 병신 됐어 시발.’ 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것도 부단장이라는 사람이.
‘오죽했으면.’
보통 신하가 왕족에게 무례를 저지르면 신하를 탓한다. 그러나 만고의 충신이 왕족을 비판하면 왕족이 잘못한 거다.
빌라르는 두 사례 중 후자에 가깝다. 내가 본 빌라르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왕실 기사단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 충신이다. 그 충신이 자기 왕족이 이상해졌다며 타국인에게 조언을 청하고 있다.
‘나도 뭐 방법이 없는데.’
문제는 빌라르의 큰 결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빌라르를 도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류티스의 행동을 조정해? 류티스는 77년도 시즌부터 79년도 시즌까지 내 통제에 따른 적이 없는 녀석이다. 77년도의 폭주는 말할 것도 없고, 상대적으로 잠잠해진 것은 리제에게 차인 덕분이지 않나. 내 영향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류티스의 트롤링을 수습해? 그건 24시간 내내 애타는 마음으로 부원들을 감시해서 가능했던 거지, 지금 나와 류티스 사이라는 국경이라는 장벽이 존재한다.
애초에 아카데미를 졸업한 순간부터 나와 류티스는 고문과 학생이 아닌 제국 공무원과 아르메인 왕족의 사이잖아. 류티스의 행보에 제국 공무원이 개입하면 외교적 문제로 이어진다고.
‘그걸 모르는 사람도 아니면서.’
더욱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속이 터졌으면…
“빌라르 경. 제가 아르메인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지 못하나, 경이 얼마나 노력하였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본 경은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분이었지요.”
– 과찬이십니다.
“그렇기에 경이 저에게 연락을 건 것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습니다. 경께서는 조금 막힌다고 타인의 손을 빌릴 분이 아니니까요.”
내 말에 빌라르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최후의 수단이다. 빌라르가 자기 입으로 자기 선에서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했고,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선언했다. 더 이상 빌라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빌라르 경. 경의 신뢰에 보답하지 못해 안타까우나 지금의 저는 류티스 저하와 접촉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 저하는 제 학생이 아니지 않습니까.”
– 아무리 졸업을 했더라도 사제의 연은─
“그렇게 따지면 제국 아카데미 교장은 제국 위에 서는 존재가 됩니다. 선생이었다고 졸업한 학생의 일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단호한 선 긋기에 아무런 반박도 돌아오지 않았다. 빌라르도 내심 자기가 억지를 부린다는 걸 알 테니.
솔직히 사제지간이었다고 졸업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하는 건 정말 드문 경우다. 스승 입장에서는 매년 수백이 넘는 제자가 생기는 거고, 제자 입장에서도 3년 동안 만난 수십의 선생 중 하나일 뿐이니까.
게다가 나는 정식 선생도 아니고 동아리 고문이었다. 이걸 사제지간이라고 하기는 민망한 일.
“그러니 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때문에 빌라르에게는 내가 아닌 다른 동아줄을 소개해 줘야 한다.
– 좋은 방법, 말입니까?
“예. 아마 제가 나서는 것보다 확실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어느 통신구의 고유 번호를 빌라르에게 말해줬다.
어느 제국백 가문의 차남이자, 어느 의회의 막내이자, 과분한 약혼녀를 둘이나 가지고 있는 남자의 통신구 고유 번호를.
“졸업한 제자에게 간섭하는 스승은 보기 추하지만, 멀어진 친우에게 안부 연락을 거는 친우는 아름다운 모습 아닙니까.”
– 각하. 설마…
“짝이 있는 친우의 연락이면 류티스 저하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겁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빌라르는 내가 말해준 고유 번호를 빠르게 종이에 적었다.
이걸로 에리히는 아르메인 왕실 기사단 부단장과도 직통 전화가 가능한 거물이 되었다.
– 감사합니다, 각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저와 경 사이에 은혜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주지는 마십시오.”
고개를 숙인 빌라르를 향해 조금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이건 은혜가 아니라 폭탄 돌리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니까.
그래도 류티스나 에리히나 77년도에 내 속을 터뜨린 건 똑같으니, 이건 정의로운 폭탄 돌리기라 믿는다.
“와, 동생한테 떠넘겼어.”
뒤에서 에리가 중얼거리는 건 듣지 못한 걸로 했다.이건 정의로운 폭탄 돌리기다.
“맞다, 형. 류티스도 약혼이나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던데?”
그리고 에리히는 얼마 전, 함부로 입을 놀린 죄가 있다.
약혼이나 결혼은 개뿔. 왕실 기사단 부단장이 제발 살려달라며 연락까지 걸고 있잖아.
***
오늘도 어김없이 의회의 일을 떠맡았다.
서럽다. 고작 막내라는 이유 때문에 의회의 존재하는 대다수의 서류가 내 집무실로 모이고 있다. 내가 행정 관료였다면 승진해서 부하라도 둘 수 있지, 이 제국의회는 승진이라는 개념도 없잖아. 나보다 아래인 사람이 생기려면 기존 의원이 은퇴해야 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제국의회 의원직에서 물러나는 건 황제 폐하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 최소 10년에서 20년 동안은 은퇴자가 나올 것 같지 않다.
‘막내 생활이 10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나마 비아 누나가 도와줘서 망정이지, 비아 누나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뭐야.’
그렇게 가까운 사람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끼는 사이, 통신구가 강렬한 빛을 뿜었다.
이제 통신구가 작동하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 시간에 오는 연락이면 99%는 업무적 연락이니까.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후환이 두렵다.
“의원 대리, 에리히 크라시우스 오브 하디네르입니다.”
그렇기에 씁쓸한 심정으로 통신구를 작동시켰고,
– 오랜만입니다. 하디네르 남작.
“빌라르 경?”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빌라르 경의 말처럼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만 저 얼굴과 목소리는 빌라르 경이 맞다. 고작 1년이라는 세월 때문에 빌라르 경을 잊기에는 아카데미 3년의 추억이 너무 강렬했으니.
‘…뭐지?’
반갑기는 했지만 당혹스러웠다. 류티스가 내 통신구로 연락을 걸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테지만, 빌라르 경이 연락을 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반갑습니다. 다시는 뵐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에넨께서 저희의 연을 아름답게 여기신 모양이군요.”
허나 금방 당혹감을 밀어내고 미소를 지었다.
의외지만 꺼릴 연락은 아니다. 타국인의 연락이라면 적어도 업무를 떠넘기기 위한 연락은 아니잖아. 내가 외교 담당도 아닌데 빌라르 경이 업무적 이유로 연락을 걸었을 리는 없다.
─라고, 잠깐 착각을 했다.
“예?”
–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빌라르 경의 입에서 류티스가 초심을 되찾았다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게 뭔.’
통신구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류티스의 초심이라면 결코 좋은 초심이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동아리 부원 다섯이 가장 추했던 시절. 사랑에 눈이 멀었던 주제에 정작 사랑을 이루는 법을 몰랐던 어리석었던 시절.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시절의 내 눈을 뽑아버리거나 세 번째 다리를 걷어차지는 않을까 고민할 시절.
꿈에 나올까 두려운 그 시절이 류티스의 초심이다.
‘하필 돌아가도 그때로 돌아가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나와 아인테르는 짝을 찾은 와중에 누군가는 홀로 퇴행 중이라니.
…
‘그런데 그걸 왜.’
이윽고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의문이 솟구쳤다.
류티스가 초심을 되찾은 건 끔찍한 일이 맞다. 업무에 치이는 중인 나조차 서명을 하던 손을 멈추고 심각하게 통신구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정도잖아.
하지만 빌라르 경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문제를 제기하려면 내 통신구 번호를 아는 것부터가 문제기는 하지만…
– 사실 처음에는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각하께서는 저하의 친우인 남작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미친.’
형이 또 나를 팔았다는 말에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원통하다. 동생을 의회에 처박은 걸로도 모자라 타국 왕자의 일도 떠넘긴다고?
‘그러고도 사람이냐.’
물론 검으로 하늘을 베는 인간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애매하기는 하다.
– 타국인이신 남작을 아국의 일에 끌어들여 죄송합니다. 허나 저하의 친우이신 남작께서는 훌륭한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하는데, 저희 저하께서는 홀로 다른 방향으로 가시니 신하로서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 합니다. 지켜보는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형에 대한 원망과 별개로 이건 진심이다. 단순히 통신구로 전해 듣는 나조차 정신이 아찔하니 빌라르 경의 충격은 더욱 심할 터.
‘조만간 약혼이나 결혼할지도 모른다며.’
그리고 초췌한 빌라르 경을 보니 타니안을 향한 원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분명 타니안은 류티스가 약혼을 하거나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다. 그게 고작 몇 주 전의 일이었다.
혼란스럽다. 타니안이 사기꾼인 것인가, 아니면 류티스가 몇 주 사이에 초심으로 돌아가버린 것인가.아니면 류티스는 처음부터 미친 놈이었는데 타니안이 착각을 한 건가…
어느 쪽이든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태로 류티스에게 연락을 걸었다.
– 오, 에리히! 오랜만이다!
아카데미에서 보던 것처럼 쾌활한 표정이 반겨주었지만 딱히 반갑지는 않았다. 좋은 용건으로 연락한 것도 아닌데 반가울 리가 있나.
‘졸업 이후 첫 대화가 이딴 대화라니.’
씁쓸하다. 적어도 타니안과의 재회는 평화롭고 화목한 분위기였는데.
– 헌데 무슨 일이지?
“혹시 내가 바쁠 때 연락한 건가?”
– 하하, 그건 아니다! 하지만 그리워서 연락했다기에는 우리가 1년 못 봤다고 연락까지 걸 성격이 아니잖나. 당연히 용무가 있어서겠지.
“뭐, 그건 그렇지.”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4년 전 병신 시절로 돌아갔다길래 연락했다. 지금 대련하면 내가 완승할 것 같아서.”
그리고 고민 끝에 그냥 직설적으로 내뱉기로 했다. 너 병신같이 행동하는 거 국경 너머까지 들리고 있다고.
– …뭐?
류티스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어쩌라는 듯 쳐다봤다.
뭐 시발. 꼬우면 네가 국경 넘어서 올 거야?
오면 난 바로 형 저택으로 도망갈 거다. 그러면 나도 처맞을지언정, 초심을 되찾은 류티스도 더 처맞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