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28)
로판 속 공무원 628화(629/945)
빛을 잃은 통신구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지럽다. 말에도 물리력이 있다면 턱을 서너 대 정도 후려맞은 기분이다. 아주 턱부터 뇌까지 짜릿하기 짝이 없어.
– 너 4년 전 병신 시절로 돌아갔다길래 연락했다. 지금 대련하면 내가 완승할 것 같아서.
“핫.”
에리히가 했던 말을 되새기자마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복잡한 기분이다. 졸업 이후 처음으로 연락을 한 친우가, 설마 먼저 연락을 걸 줄은 몰랐던 친우가 다짜고짜 욕설을 입에 담았다. 그것도 우회적인 비꼼이 아닌 정정당당하게 정면에서.
너무 화끈한 언행이라 얼떨떨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왕족으로 태어난 이래로 누군가에게 병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겠는가. 부왕 전하조차 자식들에게 그런 말은 쓰지 않았다.
– 너 병신.
이제는 머릿속에서 자체 편집되는 문장에 슬쩍 마른 세수를 했다.
병신. 병신이라. 이 내가 병신이라.
‘그랬던 시절이 있긴 했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내가 병신이었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모두가 사이좋게 병신과 머저리로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약 4년 전, 루이제에게 반했던 시기. 루이제에게 다섯이 나란히 차이기 전까지─ 우리는 누구보다 용맹하고 당당한 병신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뒤로 젖혔던 고개를 다시 내린 후,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나와 같은 추억과 흑역사를 공유하는 에리히다. 그런 에리히가 나에게 4년 전을 언급하였다.
– 누군가가 눈치 없이 행동하면 주변이 고통스럽다는 건 잘 알잖아. 우리는 누군가가 된 적도 있고, 주변이 된 적도 있으니까.
그것도 반박할 수 없는 말과 함께.
에리히의 말이 맞다. 우리는 주변에 고통을 준 ‘누군가’로 활약한 적이 있고, 반대로 누군가에게 고통받은 ‘주변’이 된 적도 있다. 둘 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자고, 적어도 내가 ‘누군가’로 전락하는 일은 없게 하자고 다짐했었다. 왕자인 내가 눈치가 없다면 그 누가 제지할 수 있겠나. 부왕 전하나 형님들은 내 사생활에 하나하나 관여할 만큼 여유로운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국경 너머에 있는 친우가 1년 만에 연락을 할 정도로 뒤틀렸던 모양이다.
– 나랑 아인테르는 이제 결혼이 코앞인데, 왕자라는 놈은 혼자 시대나 역행하고 말이야. 혹시 기사가 아니라 시간 마법을 쓰는 대마법사가 꿈이신가? 그러면 마종이라는 칭호는 네가 물려받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뒤틀린 만큼 에리히도 만만치 않게 뒤틀린 것 같지만.
기묘한 일이다. 에리히가 말을 부드럽게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듣는 사람의 탄식이 절로 나올 언변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옥에서 올라온 아가리가 된 것인가.
‘일이 사람을 망치는군.’
무섭다, 제국의회.
내가 제국의회에 갈 일은 없지만 앞으로도 평생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 그래도 네가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하는 놈은 아니잖아. 정신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네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 거다.
그리고 입은 험해졌지만 심성은 여전한 친우의 안녕을 기원했다.
부디 심성만은 지옥에 물들지 않기를.
친우에게 쌍욕을 들은 뒤, 언제나처럼 검을 휘둘렀다.
다만 육체가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것과 달리 머리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느라 바빴다.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
국경 너머의 친우에게 소식이 닿을 정도면 사태는 심각한 거다. 어떻게 닿았느냐가 아니라 왜 닿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한동안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떠올려보자. 구체적으로는 대인 관계, 그중에서도 눈치와 관련된 일, 최종적으로는 이성과 관련된 일을 중점으로.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다만 아카데미 졸업 이후로 내 대인 관계는 썩 넓은 편이 아니다.
많고 많은 남매 중에서 사교계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것은 왕세자인 큰형님과 풍류를 즐기는 둘째 형님, 사교계의 꽃인 누님 정도다. 나는 아카데미 입학 전에도 사교계 참가나 인맥 다지기에 열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아르메인의 교육 기관이 아닌 제국 아카데미에서 3년을 지냈다. 그나마 있던 인맥이 초기화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를 따라 제국 아카데미까지 온 귀족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귀족들은 막 졸업했거나 아직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다. 만나려고 해도 만날 기회가 매우 적다.
애초에 단련에 집중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페로사 경 정도밖에─
“경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제국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도 고려해 보게.”
페로사 경 정도…
“나도 혼자고 경도 혼자니, 남들이 보면 우리가 연인이 된 줄 알겠어.”
페로사 경…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 여자는 가족과 제과 동아리를 제외하면 페로사 경뿐인 것 같아.”
…
‘흠.’
있었다.
눈치 없이 지껄인 과거가 너무 생생하게 존재했다. 왜 이걸 이제야 눈치챘나 의문일 정도로.
‘환장하겠군.’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말한 문장이었지만, 그 문장들을 한 사람에게만 말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다. 누가 들어도 오해의 소지가 가득한 문장이지 않나.
그렇기에 뒤늦게나마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페로사 경이 내 앞에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딸을 보며 빌라르 경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마 빌라르 경이 고문 선생에게, 고문 선생이 에리히에게 이 끔찍한 상황을 말한 거겠지.
‘사과부터 해야겠어.’
문제를 알았으니 해결은 쉽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괴롭힌 페로사 경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약속하고, 참다못해 타국인에게 도움을 청한 빌라르 경을 다독이면 된다.
왕족이 신하에게 함부로 감사나 사과를 하는 건 자제해야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맞으니까.
그런 다짐을 하며 페로사 경이 오는 걸 기다렸고,
“괜찮습니다, 저하!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확실히 밝아진 안색의 페로사 경을 볼 수 있었다.
“저하께서 아랫사람들에게도 자비롭고 유쾌하신 건 이 아르메인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련 상대인 저를 배려하여 농담을 던져주신 것인데, 어찌 그것을 불편해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계속 불편했을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니 저하께서도 마음에 담아두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허나 사과를 받아준 상대에게 ‘정말 괜찮냐?’라고 되묻는 것은 부담스러운 행동. 기껏 밝아진 페로사 경이 다시 굳을 수도 있다.
그러니 여기서 멈추자. 페로사 경에게 하는 사과는 이걸로 끝내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게 하면 된다.
그래, 그거면 충분한데…
‘너무 좋아하는데.’
내가 그동안 오해의 소지가 큰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명확히 선을 긋자 좋아하는 페로사 경.
당연하고도 다행인 모습이다. 왕족이라는 놈이 아르메인의 미래를 이끌어 갈 기사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 그러지 않겠다고 했으니 페로사 경으로서는 좋아할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기쁨과 평온함이 가득한 페로사 경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쉬워하지는 않는 건가?’
이 분위기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미친 짓이다.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왕족이다. 제국 바로 다음가는 강대국인 아르메인의 왕자이자, 이미 어지간한 기사의 수준은 가뿐히 뛰어넘은 무인이고, 솔직히 외모도 괜찮은 인물이다. 내가 결혼에 뜻이 없어 홀로 지내는 것이니 신랑감으로서는 괜찮은 수준을 넘어 훌륭하다.
그럼에도 페로사 경은 내 말이 오해라는 걸 알자마자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신분의 격차 때문에 부담스러웠을 걸 감안해도 아무런 미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지? 나와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잠깐이나마 눈앞에 아른거렸다면 관심이 가지 않나? 이 류티스의 연인인데? 어쩌면 부인까지 나아갈 수도 있었는데?
‘복잡한 기분이군.’
어째서인지 굴욕감과 수치심이 느껴졌다. 동시에 페로사 경을 향한 흥미도 짙어졌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낀 건 루이제 이후로 처음이다.
“페로사 경.”
“예, 전하.”
“아까 말한 것처럼 앞으로는 눈치 없이, 경을 오해하게 할 말은 하지 않겠네.”
굳이 했던 말을 반복하자 페로사 경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오해할 말을 하지 않을 거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다.
‘앞으로는 오해가 아닐 테니.’
이제부터 페로사 경에게 건넬 모든 말과 행동은 철저히 내 의지일 테니.
***
제국의회에 방문한 적은 몇 번 있지만, 의원 집무실까지 들어온 적은 극히 드물었다. 일단 아카데미 파견 이후로는 확실히 처음이다.
아무튼 집무실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감회가 색달랐다. 그것이 처음 방문한 집무실이 동생의 집무실이라는 것 때문인지.
“몸 내려간다.”
“크으윽…”
아니면 동생의 집무실에서 동생을 갈구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망할 새끼.’
바닥에 대가리를 박고 있는 에리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빌라르에게 에리히를 팔고 하루. 딱 하루가 지났다. 고작 하루 만에 빌라르가 다시 연락을 걸었고, 동생분 덕에 류티스 저하가 제정신을 차렸다는 감사 인사를 받았다.
나도 놀랄 정도의 속도라 곧장 에리히를 찾아갔다. 어려운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한 것은 격려와 칭찬을 받기 마땅한 일이니까. 게다가 무슨 방법으로 77년도 시즌 류티스를 퇴치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 그거?”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에리히를 바닥에 꽂아버렸다.
‘아무리 친구여도 시발…’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히는 류티스에게 극약 처방을 했다. 그것도 조금만 잘못하면 극독으로 돌변할 극약을.
아니, 어떤 귀족이 왕족한테 병신이라고 욕을 박아 버리냐고. 여차했으면 친구 사이의 다툼이 아니라 외교 문제로 번질 뻔했잖아. 다행히 류티스가 그냥 넘어가서 친구 문제로 끝났지만.
‘나도 못 해본걸.’
공적으로는 아찔했다면, 사적으로는 괘씸했다. 류티스에게는 내가 더 시달리면 시달렸지 에리히는 딱히 피해자가 아니다. 그런 주제에 내가 아닌 에리히가 면전에서 쌍욕을 박은 거다.
감히 형이 누려야 할 권리를 동생이 빼앗은 것 같아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