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3)
라테르와의 약속을 어기고 에리히에게 조언을 준 것에 대한 페널티인지 이상하게 눈을 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분명 눈만 감으면 바로 잠들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라테르의 저주인가? 결국 동아리 시간이 돼서 다른 넷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루이제 영애, 에리히 영식. 먼저 왔었군요.”
선두로 들어온 아인테르가 루이제와 에리히만 있는 것을 보고 흠칫하더니, 구석에 박혀있는 나를 보고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 둘이 있던 게 아니라 셋이 있었으니 별일 없었을 거라 생각했나 보지.
아인테르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단 둘이 있던 시간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단 둘이 있던 때에도 별일 없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졸업 전에 결판이 나긴 할까.’
이 녀석들이 졸업하기 전에는 어떻게든 루이제 쟁탈전이 끝나야 한다. 적어도 패배라는 결과가 나와야 인정하고 귀국하지, 경쟁이 이어지면 졸업 후에도 제국에서 버틸 수도 있으니까. 생각만 해도 정말 즐거운 일이다. 너무 즐겁네.
그래도 연장전까지 가면 내가 직접 이 녀석들을 감시할 필요는 없겠지. 그럴 것이라 믿는다.
“이런, 셋만 있었습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도중에 나와서 같이 놀 걸 그랬습니다.”
당당히 수업 탈주를 논하는 류티스의 말에 시선을 조용히 바닥으로 내렸다. 절대 졸업 이후 2부는 안된다. 만약 원작이 2부, 3부까지 있었어도 난 무조건 아카데미 1부에서 끝낸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인생을 걸고 해내야 한다.
***
어젯밤, 칼이 갑자기 제도로 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 마종공이 그놈을 찾았다더구나.
“아버님.”
– …그래, 칼을 찾았다더구나.
혼담을 거절한 칼을 언짢게 보시는 아버님이지만, 한편으로는 칼을 마음에 들어하기도 하셔서 아직까지 사윗감으로 생각 중이시다. 그렇기에 칼에게 조금 나쁜 말을 쓰셔도 내가 정정을 부탁드리면 들어주시고. 아버님도 정말 솔직하지 못하시다.
아무튼 예상하지 못했던 칼의 제도행. 다행히 오후에 돌아왔다고 하지만 마종공께서 직접 찾으셨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종공께서는 그, 그… 솔직히 많이 신경 쓰이는 분이니까. 그래서 아침이 되자마자 제과 동아리실로 향하는 중이고.
‘설마. 아닐 거야.’
마종공 각하의 외모가 떠오르고, 그리고 그 분의 연세에 생각이 뻗어나가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아닌 엘프의 피가 흐르신다는 걸 떠올리게 된다. 짧은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고 가던지. 만약에, 만약에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그 분도 칼을 노리시는 거면 어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입술을 깨물었다.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칼의 옆에 설 자격이 있는 건 오직 이 마르게타 바렌티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마종공께서 개입하시면?
‘아니야, 그럴 리가.’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불안한 생각을 털어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지내신 분이다. 갑자기 마음을 바꾸실 리가 없잖아. 공적인 일로 만나신 거겠지. 분명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
그래, 지금은 한동안 보지 못한 칼을 만나러 가는 것뿐이야. 마침 오늘 찾아가려고 했는데 우연히 어젯밤에 소식을 들은 것뿐이고. 절대 불안해서가 아니야. 칼을 너무 방치하면 칼이 속상해 할지도 모르잖아? 응, 그런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몇 번이나 진정시키며 동아리실 앞에 도착했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에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칼 영식. 있나요?”
하지만 반응이 없다. 이상하다, 분명 이 시간에는 있을 텐데?
‘설마 또?’
이틀 연속으로 마종공께서 잡아가신 건가? 말도 안돼, 권력을 그렇게 쓰는 게 어딨어. 치사하잖아. 난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억울함을 겨우 억누르며 문을 열었다. 칼이 없다면 여기서 기다리자. 부재 중이어도 결국 동아리실로 돌아올 테니까. 칼이라면 내가 기다렸다는 거에 미안해할 거다.
“…칼 영식?”
그리고 동아리실에 들어가자 보이는 모습은 상당히 의외였다. 칼이 있기는 있었다. 단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는 것이 평소와는 다른 점. 자느라 대답하지 못한 거였구나.
처음 보는 광경에 흥미가 동하여 조용히 칼에게 다가갔다. 칼이 자는 모습은 처음인데, 설마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부부의 연을 맺고 같은 저택에서 살고 나서야 볼 줄 알았는데.
‘역시 잘생겼어.’
칼의 얼굴을 보다가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얼마나 예쁠까? 검은 머리에 초록 눈일까? 아니면 붉은 머리에 검은 눈? 어쩌면 완전히 칼을 닮은 딸이 나오거나, 나를 닮은 아들이 나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검은색과 붉은색은 잘 어울리니까 무엇이든 예쁠 거다. 후후, 후후후…
‘…하얀색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검은색에 하얀색이 무슨 조합이야. 절대 안 어울려.
타들어가는 내 속과 별개로 편안히 자고 있는 칼을 보자 조금 심통이 났다. 나는 어젯밤부터 불안했는데 누구는 속 편하게 자고 있고. 아무리 칼이지만 지금만큼은 미웠다.
아무리 칼은 내 거나 마찬가지지만, 충분히 내 곁에 오기까지 기다릴 수 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마다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거?’
내 시선이 칼의 입쪽으로 향했다. 내 거, 지금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내 거. 그렇다면… 주인의 마크가 필요하지 않을까?
무언가에 홀린 듯이 칼에 얼굴로 향했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어 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아니야, 처음을 이렇게 허무하게 낭비할 수는 없지. 정작 칼이 기억하지 못하는 처음이 무슨 의미야.
민망함에 몸을 돌려 부채로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아무리 불안했다지만, 아니, 불안하기는 무슨. 아무리 그동안 방치한 칼에게 미안하지만 너무 급하게 나갈 뻔했다.
“마르? 언제 오셨습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 큰일 날뻔했다…
***
어제 이루지 못한 수면의 꿈은 동아리실로 출근하자마자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몹시 당황한 것 같은 마르게타가 보였다.
‘눈 떴으면 큰일 날뻔했네.’
사실 깨기는 진즉에 깼다. 문 열리는 소리까지는 긴가민가 했는데, 마르게타가 가까이 오니 인기척 때문에라도 깨게 되더라. 피곤한 몸을 억지로 세우면서 인사하려고 했지만 본능이 막았다.
단순히 가까이 다가오는 수준이 아니라 마르게타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눈을 감고 있어서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을 뜨면 마르게타와 당분간은 만나지 못할 어색한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마르게타가 멀어지는 게 느껴지자마자 바로 눈을 뜨고 일어났다. 다행히 본능이 경고한 끔찍할 정도의 어색함은 성공적으로 피한 것 같다.
“아, 칼 영식. 일어났나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마르게타지만, 이미 마르게타의 얼굴은 머리카락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붉은 상황이다. 아니, 기껏 모른 척 넘어가려는데 당사자가 아직도 그러면 어떡해.
“미안합니다, 마르. 손님을 자는 모습으로 반겨버렸군요.”
“괜찮아요. 제가 갑자기 찾아온 거잖아요?”
부채로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짓는 모습. 딱 한 마디지만, 내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자 필사적으로 동참하는 게 느껴졌다. 가엾게도. 만약 빨리 눈을 떴다면 정말 울면서 도망치는 마르게타의 모습을 봤을 것 같다.
눈을 감아서 마르게타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못 봤어도 짐작이 가는 건 있으니까. 아니, 애초에 눈치채지 못하면 그게 머저리지. 난 에리히가 아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후후, 고맙긴요.”
마르게타의 미소에 씁쓸히 웃었다. 내가 에리히에게 머저리라고 할 자격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난 어떻게 보면 에리히보다 더한 악질이니.
“아, 손님을 계속 세워뒀군요. 앉으시죠.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그것보다 마르게타에게 자리도 권하지 앉았다는 게 떠올랐다. 둘 다 여러의미로 정신이 없어서 아직까지 서있었네. 그리고 뒤늦은 내 권유에 마르게타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는 칼 영식이 걱정되는데요? 많이 피곤한 것 같아요.”
“그런 건 아닙니다. 몸이 조금 무거워서 말입니다.”
“그걸 피곤하다고 하는 거예요.”
고개를 갸웃거린 마르게타가 동아리실을 훑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피곤한다면 부회장실에 있도록 해요. 거기는 누울 곳이 있잖아요.”
그건 나도 박람회 준비 기간 동안 부회장실을 들락거려서 알고 있다. 거기 있는 소파가 사람 하나 눕기에는 충분했지.
“괜찮습니다. 마르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죠.”
“그래요? 저는 폐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오셔도 되겠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모습은 거절을 받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그런데 마르, 제가 자고 있을 때 뭐하셨습니까?’ 라는 말을 하면 바로 격퇴가 가능하긴 하지만.
‘불편하긴 한데.’
동아리실은 기껏해야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 전부다. 피로를 풀려고 자면서 오히려 피로가 쌓이는 상황. 애초에 제과를 위한 부실에 수면 공간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렇다고 숙소에 계속 누워있는 건 너무 월급 루팡 같아서 양심에 찔린다. 게다가 숙소에 있다가 아카데미에 일이 터졌을 때 다시 출근해야 하는 거리를 생각하면 더욱 곤란하고.
“그러면 신세를 져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뭔가 빌붙어 사는 기둥서방이 된 것 같지만, 그렇게 되었다.
동아리실에서 육체가 힘들게 잤다면 부회장실에서는 마음이 힘들었다.
“어머, 칼 영식. 더 자고 있어도 돼요.”
“괜찮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소파에 누우라길래 누웠지만 정작 마르게타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3살 어린 아가씨가 바로 옆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팔자 좋게 자고 있는 어른? 어지간히 마음 속 삼각형이 닳아버린 사람도 통증을 느낄 참사다.
그래서 기겁하며 일어났더니 마르게타가 말없이 바라보며 도로 누우라고 압력을 주더라. 덕분에 진짜 잤다. 피곤함은 사라졌지만 마음이 아파졌다. 철혈공이 이 소식을 들으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피곤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저는 괜찮으니까요.”
안타깝게도 내가 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