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31)
로판 속 공무원 631화(632/945)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 순백으로 뒤덮인 초원에서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나는 시기.
그 아름다운 시기에 초원을 누비는 건 제법 즐거운 일이었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정원이나 후원에서는 볼 수 없는 멋이 초원에 펼쳐져 있었으니.
– 푸르릉!
그리고 자연의 선물에 감동한 건 나뿐만 아니라 등을 빌려준 흑마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당근이나 먹던 애를 억지로 끌고 나오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내가 고삐를 잡으니 오히려 꼬리를 광속으로 살랑거릴 정도더라. 마치 마구간 밖으로 나갈 날만을 기다린 것처럼.
의외인 반응이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심지어 나는 저 흑마 입장에서 난생처음 보는 외부인이지 않나. 당장 꺼지라며 뒷발킥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얘도 심심했나 보네.’
먹던 당근도 내팽개치고 처음 보는 외부인을 기꺼이 태운 흑마.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나, 아무래도 겨울 동안 마구간에만 있느라 지루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갈 기회가 생기니 바로 흥분한 거고.
“조금만 천천히.”
– 푸릉…
그래도 이번 외출은 피네와의 느긋한 승마 데이트를 위해서다. 흑마의 적극적인 협조는 고맙지만,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데이트의 풋풋함을 즐길 수 없다.
다행히 내 마음을 이해해 준 듯, 잔뜩 흥분 상태였던 흑마는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굿 홀스.’
성으로 돌아가면 유드허 백작한테 까만 녀석이 유독 총명했었다고 말해줄게. 그럼 맛 좋은 먹이와 예쁜 암컷들을 만날 거다.
“같이 한 말에 탄 건 오랜만이지?”
살며시 흑마의 갈기를 쓰다듬은 후, 내 앞에 앉은 피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녀석의 덩치가 큰 덕분에 무난히 두 명이나 앉을 수 있었다. 원래 승마 데이트는 둘이 같은 말에 앉으면서 해야 제맛인 법이니.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
아무튼 오랜만에 피네를 앞에 태워서 그런지 예전 기억이 소환되었다.
대토벌 전쟁이 끝나며 내가 감찰부장이 된 직후. 이래저래 바쁜 와중에도 제도 바깥을 제법 싸돌아다녔었다. 대토벌 전쟁 과정에서 전사한 4과의 유가족들을 챙기기 위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부 국경 지대를 살피기 위해.
피네는 그중 국경 지대를 살피다가 발견한 전쟁고아였다. 유목민들의 약탈로 고향 마을과 가족, 친구, 이웃들을 전부 잃어버린 가련한 아이였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나보다 연상이지만, 당시의 피네는지금보다 훨씬 왜소했지.
‘제대로 먹지를 못 했으니까.’
피네는 안 그래도 먹고살기 힘든 국경 지대의 평민이라 발육이 더뎠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거치며 영양 섭취가 더욱 줄었으니, 그 또래로는 보기 힘든 외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과장 좀 보태면 유리스나 소피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피네를 내 말에 태우고 같이 복귀했었는데,
“…혹시 군인이십니까?”
“군인이 될 뻔했지. 탈주에 실패해서 감찰부에 남았지만.”
“그럼 저도, 귀족님처럼 감찰부가 될 수 있습니까?”
설마 가련한 아이가 자발적 노예 희망자로 돌변할 줄은 몰랐다.
흙과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 제대로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몸, 지방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빼빼 마른 몸.
정말 극악의 육체였으나 나를 올려다보던 눈만큼은 또렷하게 빛났다. 나에게 주워진 순간부터, 내가 제국의 공무원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정확히는 내가 인력 부족으로 골골거린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그때부터 은혜 갚기 모드였지.’
생각해 보면 피네는 그때부터 어마어마한 정신력을 선보였다. 내가 다른 곳에서 주워온 다른 고아들, 전사한 가족의 뜻을 잇고 싶다며 감찰부 투신을 다짐한 유가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빠른 성취를 보였다.
솔직히 내가 주워온 고아만 아니었다면 귀족 출신인 줄 알았을 거다. 피네의 성장은 영양 부족에 시달리던 일개 평민이 보일 속도가 아니었으니까.
“저는 이미 죽었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에게 새 생명과 인생을 주신 부장님께 충성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보답하기 위한 각성이었다는 건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고.
피네의 말에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부하 중 절반이 개노답이었던 상황 속에서 나를 향한 존경과 호감이 MAX인 능력자가 유입된다? 내가 괜히 피네를 4과장 시절부터 물고 빤 것이 아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내 앞에 태웠던 전쟁고아. 그 고아가 수 년의 시간을 거쳐 내 연인으로서 나와 같은 말을 타고 있다.
“저, 저, 저도, 장관, 각하와 같은 말을 타서, 기쁩, 니다…”
회상을 끊은 건 피네의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흡족스러운 대답이라 피네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우리 둘만 있음에도 나를 주인님이 아닌 장관 각하라 부른 것. 영광이라는 표현이 아닌 기쁘다는 표현을 쓴 것. 이렇게 조금씩 내 위주가 아닌 피네 위주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전 대답은 훌륭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는 장관 각하가 아닌 여보나 칼이라는 호칭을 쓸 수 있게 노력하자.
승마 데이트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이유는 별거 없다. 우리를 태운 흑마가 동선을 비비 꼬아가며 복귀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굿 홀스.’
역시 말은 북방의 말이 최고다. 기수가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잖아. 유목민들의 기병 전력이 흉악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너 같은 애가 위리디아에도 많으면 좋겠는데.”
– 푸힝.
그 말에 흑마는 내 뺨을 핥더니 유유히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놀 만큼 놀았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것처럼.
탐난다. 유드허 백작한테 저 녀석 판매 가능하냐고 물어볼까? 솔직히 정말 아끼는 말이었으면 후원의 작은 마구간에 박아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가격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팔겠지.
“…장관 각하.”
“응?”
그렇게 멍하니 흑마를 바라보고 있자 피네가 스르륵 다가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데이트라고, 하셨으니… 지금은 저 말이 아닌 저만… 봐주십시오.”
‘와.’
순간 귀를 의심했다. 피네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렸으니까.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피네를 품에 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피네가 자기를 봐달라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나에게 요구했다. 그것도 평범한 요구가 아닌 미약한 질투심이 깃든 요구를.
질투 대상이 말이라는 건 조금 유감스러운 일이나, 피네가 자기감정에 솔직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만에 성과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뿌듯하다. 혹시 둘이 같은 말을 탄 효과인가? 아니면 주인님이 아닌 장관 각하라고 부르게 한 효과? 그도 아니라면 영광이라는 자신을 깎는 발언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게 한 효과일 수도 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내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원인이 아닌 결과잖아.
‘내일이면 더 좋아지겠지.’
피네가 하루 만에 질투를 표할 정도면 그동안 꾹꾹 억눌렀던 감정이 터졌다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면 내일의 피네, 모레의 피네는 그 전날의 피네보다 솔직해질 터.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피네. 상상만 해도 두근거린다.
***
얼굴이 화끈거린다. 입술은 파르르 떨려서 짧은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미쳤던 것 같다. 아니, 반드시 미친 것이어야 한다.
‘감히 주인님께.’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주인님을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나, 그건 주인님의 요구에 따른다는 완벽한 이유라도 있다.
하지만 방금 언행은? 감히 주인님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주인님에게 나를 봐달라고 말한 것은? 그것도 주인님의 요구였나?
그렇지 않다. 그 행동은 내 의지로 한 것이다. 주인님과 같이 있는 걸로도, 연인인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낸 것이다.
주제넘은 짓이다. 주인님에게 먼저 요구하다니. 주인님께 새로운 인생을 하사받은 내가 그래서는 안 된다.
분명, 분명 그런데…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부드러운 목소리와 따뜻한 포옹에 죄송하다는 말도 제때 하지 못했다.
주인님에게 나를 봐달라고 부탁한 후, 가슴을 가득 채우는 기묘한 감정에 도망조차 치지 못했다.
이상하다. 이상해. 예전부터 주인님을 보면 언제나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지금 느끼는 두근거림은 평소와 달랐다.
“피네.”
“예, 예…”
“이제 들어가서 쉬자. 해가 떨어지려고 해서 그런지 좀 춥네.”
그 말과 함께 주인님은 내 손을 잡으며 빙긋 웃으셨다.
지금이라도 죄송하다고 해야 한다. 주제넘은 말을 했다고 주인님께 용서를 빌며,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예, 장관 각하.”
사죄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무릎을 꿇는 대신 주인님과 나란히 걸었다.
이 두근거림을 더 느끼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고 말았다.
***
저녁이 되자 유드허 백작은 소리 소문 없이 복귀했다. 자기 성인데 왜 이리 식객처럼 행동하는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아무튼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자는 유드허 백작의 제안에 응하였고,
“흑마? 후원에 있는 그 아이 말씀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흑마 구매를 시도하였다.
“허어.”
그러나 유드허 백작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의외인 상황이다. 후원 구석에 박아둔 말이길래 간단히 팔 줄 알았는데?
“그 녀석, 이 북방에서도 제법 뛰어난 혈통을 자랑하는 녀석입니다. 역천자가 타던 말과 같은 조상을 두고 있을 정도지요.”
“…예?”
아니 씹. 그런 말을 왜 후원에 처박아 둔 건데. 귀한 놈이니 근처에 보관하겠다는 심보였나?
“허나 자기가 귀한 몸인 걸 아는지, 성격이 아주 지랄맞─ 아니, 난폭한 녀석입니다. 저는 물론 제 휘하의 전사들은 전부 그 녀석의 등에 올라타려 했지만, 번번이 거부당해서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지요.”
유드허 백작의 한탄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랑 피네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타고 왔는데…?
“그래서 다른 부족장에게 판 적도 있었는데, 그 망할 녀석은 팔려간 곳에서 탈출하고 저희 부족의 영역까지 복귀했습니다. 자기가 지낼 곳은 자기가 정하겠다는 뜻이지요.”
“그, 주인을 사랑하는 충마로군요.”
“죽어도 주인을 태우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는 유드허 백작의 모습에 절로 숙연해졌다.
“그러니 그 녀석은 백작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돈은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백작의 말을 사는 것인데…”
“하하, 솔직히 그 녀석은 제 말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냥 제 후원에 사는 손님 수준입니다.”
오히려 제발 데려가라는 듯한 간절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드허 백작령에 공급되는 공산품은 20%에서 30%로 늘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