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4)
처음에는 꺼려지던 일도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그렇기에 마음 속 삼각형은 결국 닳기 마련이라는 말이 생긴 것.
“마르. 저 왔습니다.”
“어서 와요, 칼 영식. 좋은 아침이에요.”
그리고 지금의 내가 그렇다. 아무리 아카데미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제과 동아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이 머무는 공간은 아니다. 잠깐 제과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곳이지.
그런 상황에서 부회장실의 안락함을 맛보게 되었고, 마침 오랜 시간 동안 홀로 동아리실에 지내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던 차였다. 책이라도 장만해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누군가와 같이 지내니 은근히 반갑기도 했고.
마르게타도 정말 아무 때나 와도 괜찮은 것 같아 보이길래 실례를 무릅쓰고 매일 출석 체크 중이다.
“오늘도 가져왔습니다.”
“늘 고마워요. 정말 빈손으로 와도 괜찮은데.”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물론 ‘자신보다 어린 아가씨가 열심히 업무를 보는 사이 옆에서 노는 글러먹은 어른’ 이라는 타이틀을 계속 달고 있는 건 곤란한 일이다. 그렇다고 마르게타의 업무를 도와주기는 박람회 준비 때와 달리 내 영역이 아니라 힘든 일이고.
그래서 고민 끝에 아침마다 간식거리를 가져왔다.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니까. 머리를 쓰는 사이 중간중간 간식으로 당분을 채우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 쿠키라서 간편하게 먹을 수도 있으니.
하지만 마르게타는 그마저도 사양했었다.
“저는 괜찮아요. 빈손으로 편하게 오면 충분해요.”
“제가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면목이 없어서 찾아오지 못할 것 같군요.”
“그렇다면야…”
그리고 내 간곡한 설득에 겨우 쿠키를 받기 시작했다. 싸구려 숙소에 묵을 때도 돈을 내야 하는 법인데, 이런 고급진 방에 머무르면서 무엇도 내지 않는 건 미안한 일이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마르게타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먹고 있으니 흐뭇하다.
‘더 가져와도 괜찮겠어.’
오늘도 루이제에게 평소보다 많이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
칼은 오늘도 쿠키를 가져왔다.
‘정말 빈손으로 와도 괜찮은데.’
사실 칼이 처음 쿠키를 가져왔을 때는 안 좋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었다. 박람회 전, 제과 동아리실에서 겪은 그 사건.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맛과 혹시 칼이 나를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공포를 동시에 겪었으니까.
다행히 칼이 호의로 줬다는 걸 알고 안심했지만, 다시 먹고 싶지 않은 그 맛은 여전히 뇌리에 남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했는데 하필 칼이 이거라도 받지 않으면 오지 않겠다는 말을 해버려서.
끔찍한 쿠키를 먹고 칼과 같이 지내기와 미각을 보호하는 대신 혼자 지내기.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다. 잠깐의 고통만 참으면 행복이 찾아오니 감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쿠키를 먹자마자 의미 없는 고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왜 맛있지?’
오늘도 칼에게 새롭게 받은 쿠키를 하나 꺼내며 베어 먹었다. 맛있다. 왜인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지만 정말 맛있다. 바닥 밑의 바닥을 각오해서 상대적으로 맛있는 게 아니라, 다른 것들과 비교해도 맛있는 수준.
쿠키를 받은 첫날, 동아리실에서 먹은 그 수준을 각오하고 먹었지만 맛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상적인 쿠키가 있으면서 왜 그때는 그런 쿠키를 줬는지 혼자 고민했었다. 정말 나를 밀어내려고 그랬다가 다음날에는 기분이 풀려서 반겨준 거였나?
극심한 혼란으로 머리가 어지러웠을 때, 칼이 했던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르가 좋아하는 것 같아 많이 가져왔습니다.”
진심으로 내가 잘 먹는다고 생각해서 그 쿠키를 챙겨왔다는 말. 표정을 보니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잘 먹는다고 생각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칼 앞에서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 명백히 맛이 다른 쿠키를 가져왔다고? 단순한 실수라고 하기에는 하루 이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소파에 누운 칼을 바라봤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이상 증상을 호소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나도 바렌티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들은 건 많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칼에게서 그 증상 중 하나가 보인다는 것도 안다.
‘어쩜 좋아…’
안타까운 일이다. 당장이라도 칼을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괜히 어설프게 접근했다가 칼이 더 숨는 게 아닐까?
결국 첫날부터 지금까지 고민만 하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회는 반드시 생길 거다. 시간이 지나면 칼이 상처를 보여주고, 내가 그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겠지. 그래, 반드시 그럴 거다. 언젠가는 나에게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게 언제나 함께할 거니까.
‘…그래서 이건 왜 맛있는 거지?’
칼이 이전과 다른 쿠키를 가져온 이유는 알겠지만, 아직 그 다른 쿠키가 동아리실에서 튀어나온 이유는 모르겠다. 분명 칼은 늘 먹던 걸 가져온 걸 텐데 맛이 이렇게 달라질 이유가 있나?
***
동아리 시간이 끝날 무렵. 루이제는 내 쿠키통에 쿠키를 가득 담아서 건네줬다.
“여기요! 평소보다 더 만들었어요!”
“고마워. 마르도 잘 먹더라.”
“헤헤, 다행이에요.”
루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자신의 쿠키를 먹는 게 기쁜지 밝게 웃었다. 며칠 동안 대량 생산을 부탁하는데도 싫은 티 하나 내지 않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물론 처음에 내가 두 배 정도로 만들어달라고 했을 때는 의아해하기는 했었다.
“두 배면 너무 많은데요? 하루 안에 못 드실 텐데.”
“마르한테 선물로 주려고.”
그 말에 눈빛이 돌변하더니 만들던 반죽도 치우고 새롭게 시작하더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너무 단호해서 차마 말리지 못했다. 장인 정신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멋지기도 했고.
그렇게 루이제의 열정이 가득 담겨 만들어진 쿠키는 마르게타도 만족하며 먹고 있다. 원래도 잘 먹던 쿠키를 더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내일도 부탁할게.”
“네!”
훌륭한 부장을 두니 이렇게 편하네. 이 고문은 몹시 흡족스럽다.
부회장실은 학생회실에 딸려있기에 필연적으로 학생회실을 거칠 수밖에 없다. 공무원 프리 패스권으로 회장과의 우애를 다진 상태라 학생회실을 거치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이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학생회실 문을 열자 학생회 일곱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뭐야, 평소에는 흩어져 있던 애들이 왜 다 모여 있어.
“아, 감찰관님.”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나를 보고 인상을 푸는 회장. 자리에서도 일어나려는 것 같길래 손짓을 해서 만류했다.
“내가 바쁠 때 왔나? 실례했다.”
“아닙니다. 마침 회의도 다 끝나서요.”
“다행이군.”
끝나기는 무슨. 누가 봐도 내가 도중에 들어온 것 같은데.
하지만 ‘서로 할 말이 없어서 회의 진척은 안되고, 끝내기에는 끝낼 명분이 없는 상황인데 마침 윗사람이 오셔서 접대를 위한 회의 종료.’ 라는 상황을 노리는 회장의 눈빛은 실로 익숙하기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벌써부터 저러는 것을 보니 훌륭한 공무원의 자질을 타고 났다.
“감찰관님은 부회장이 모시고.”
“알겠어요.”
그리고 자연스레 내 목적인 마르게타와 붙였다. 1년만 지나면 저런 아이가 공무원이 되는구나. 제국의 미래는 역시 밝다.
“미안해요, 칼 영식. 중요한 일이 있어서 딱딱하게 맞이했네요.”
“방해한 건 저니 오히려 제가 사과해야죠.”
“후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부회장실로 들어가니 마르게타가 먼저 사과를 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방금은 내 잘못이니까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일이지.
“그런데 마르. 방금 회의는 무슨 일입니까?”
“아. 그거요?”
마르게타는 내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학생회 회의가 예정됐다면 마르게타가 미리 알려줬을 거고, 애초에 시험이 끝난 지금은 학생회가 모일 정도의 사안도 없다. 그렇다면 예정에 없던 무언가가 터졌다는 것.
“원래 아카데미 일정은 이맘때면 비어 있었어요.”
“예, 알고 있습니다.”
박람회와 시험을 연달아 치른 직후에는 아카데미에 마땅한 일정이 없다. 이미 몸도 마음도 불사른 학생들의 체력 회복을 위한 배려. 일단 작년까지는 그랬다.
“그러면 올해부터 수학여행이 시작되는 것도 들었나요?”
“물론입니다.”
안다. 아카데미 파견이 결정되자마자 아카데미 일정부터 확인했으니까. 분명 작년까지는 없던 수학여행이라는 넉자가 당당히 일정표에 박힌 것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수학여행? 유럽 분위기인 판타지에 뭔 수학여행이야. 아무리 주연들을 위한 로판이어도 이건 너무하잖아. 대놓고 일이 터질 거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데.
“첫 수학여행이라 장소를 두고 고민이 많았어요. 원래는 처음이니 적당한 인근 영지로 갈 생각이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마르게타가 갑자기 내 눈치를 살폈다. 뭐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그, 중간에 일이 있어서요. 보야르로 가는 걸로 됐어요.”
“예?”
조심스럽게 입을 연 마르게타의 말에 머리가 잠시 굳었다. 보야르? 내가 아는 그 보야르인가? 아니, 혹시 보야르라는 지역이 여러 곳이었나?
“보야르라면?”
아니기를 바라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물었지만, 마르게타는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도 단호하게 답했다.
“칼 영식이 생각하는 그 보야르 맞아요.”
‘망할.’
처참한 확인 사살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그래, 보야르라는 지역이 여러 곳일 리가 없지. 크펠로펜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보야르라 불리는 곳은 단 한 곳이다.
놀라운 일이다. 단 하루만에 마종공에게 붙잡히고 전승공과도 연이어 대면했다. 이게 불과 며칠 전의 일. 이제야 공작 듀오의 충격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이번엔 황금공이냐.’
트리플을 달성했다. 보야르, 공식 명칭은 보야르 공작령. 황금공이라 불리는 보야르 공작이 버티고 있는 영지.
기껏 아카데미가 선녀라는 걸 깨달았는데, 아카데미를 나가는 것도 모자라 수학여행으로 보야르까지 가라고? 재미없는 농담이다. 안타깝게도 마르게타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유머 감각이 조금 부족하구나.
제발, 차라리 농담이라고 해줬으면. 발단 전개 위기가 아니라 위기 위기 위기만 겪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