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41)
로판 속 공무원 641화(642/945)
드래곤의 말과 눈동자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저 눈동자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오래된 과거도 아닌 불과 몇 년 전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아내도, 아이도 잃은 자가 홀로 살아가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내 삶을 지탱하던 기둥은 무너졌고, 뜨겁게 타오르던 혼은 식은 지 오래다.”
드래곤이 한 말을 곱씹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아내나 마찬가지였던 연인을 잃었다. 연인처럼 소중했던 친구들을 잃었다. 귀여운 아이를 얻을 것이라 꿈꾸었던 미래를 잃었다.
‘기둥이 무너지고 혼이 식었다라.’
실로 맞는 말이다.6년 전의 내가 그랬다. 대토벌 전쟁이 끝난 직후, 모든 걸 잃었던 내가 그랬다.
나를 지탱하던 기둥은 무너졌고, 나에게 활력을 불어넣던 혼은 무엇보다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과거의 뜨거움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참하게.
사실 당시의 나도 삶을 포기할 수 있었다. 모든 걸 잃어버려 삶에 미련이 없었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기에 녀석들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이유는 단순했다.
‘난 포기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었지.’
그 녀석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살린 내 목숨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었기에.원래 주인을 쫓아내고 몸을 차지한 가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기에.
게다가 죽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없던 미련도 무럭무럭 자라날 만큼.
‘내가 죽으면 기껏 얻은 평화가 박살 났을 테니.’
아무리 도르곤을 놓친 반쪽짜리 평화여도 평화는 평화였다. 심지어 겨우 2황자를 몰아내고 올바른 후계자가 생긴 판국에, 그 후계자의 심복이 되어야 할 신임 감찰부장이 죽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그리고 나는 2황자와 함께 만악의 근원이었던 애실론 가문을 응징하고 싶었다. 그걸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고, 복수를 이루고 나니 그동안 달려온 관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저 드래곤이 딱 그 시기겠지.’
아내와 자식을 잃은 드래곤이 자신의 소망을 위해 리브노만의 손을 들어줬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황상 드래곤의 가족이 죽은 것은 아펠스 때문.
다행히 드래곤은 나처럼 복수를 이루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에 동력을 잃었고, 의욕이 사라진 것이다. 그저 과거의 나처럼 달려온 관성으로 살아온 것뿐이다.
아펠스 멸망이 300년 전의 일이니 관성으로 300년을 살아가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드래곤은 장수종 수준을 넘어 영겁을 살아가는 존재이지 않나. 300년 따위는 충분히 관성으로 커버할 수 있었을 거다.
‘나도 저렇게 됐을까?’
공허한 드래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그런 생각을 가졌다. 저 드래곤의 모습이 어쩌면 내 미래가 되었을 수 있다고.
관성으로 살아가던 내가 변할 수 있었던 건 마르의 고백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수 같지만 정을 나눌 수 있는 상사, 부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도 셀 수 없는 가족들이 생기고, 거리를 두었던 가족들에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에게는 새로운 기둥이 생겼다.
하지만 저 드래곤은 어떠한가. 복수를 마치고 나니 모든 것이 끝났다. 새로운 연이 생기지도, 살아갈 이유가 생기지도 않았다. 과거의 나처럼 누군가의 몸을 빼앗았다는 죄책감도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설득할 수 있을까?’
마음이 무겁다. 저 드래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어서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가 저 드래곤과 같은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떤 위로도 내뱉을 수 없었다.
저 드래곤에게는 무슨 말이든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 테니까.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은 이미 수백 년 동안 스스로 되뇐 말일 테니까.
이성으로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설득은 무의미하며, 그냥 돌아가는 게 서로에게 편한 일이라고.
‘그럴 수는 없지.’
동시에 마음은 강렬하게 외쳤다.
저 가련한 드래곤을 외면하지 말라고. 나의 미래였을지도 모르는 존재를 방치하지 말고, 나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라고.
그 이유 역시 간단하다. 저 모습은 내가 겪었을지 몰랐을 미래임과 동시에, 내가 겪게 될 미래이기도 하니까.
‘내 수명이 늘어나면 저렇게 되겠지.’
트릭시처럼 수백 년의 수명을 살아가게 된다면 나도 부인들과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내겠지.
물론 내 곁에는 트릭시라도 남아 있겠지만, 소중한 인연을 먼저 떠내보내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다른 존재의 고통을 무시하면 나에게 그 고통이 찾아왔을 때, 누가 나를 위로하고 보듬어주겠나.
“많이 힘드셨겠군요.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이 이해될 정도입니다.”
그 말에 드래곤의 눈이 잠깐 커졌다.
“의외로군. 로드께서는 내 말을 듣자마자 새로운 기둥을 세우라고 하셨는데.”
“그분과 달리 저는 어르신의 호의로 어르신의 마음을 들을 수 있던 겁니다. 그런 주제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흐으으음…”
그러자 커졌던 눈동자가 스르륵 실눈으로 변했다.
“짧게 말하면 돌아갈 것 같지 않아 할 말을 정리해뒀는데, 괜한 짓이었어.”
이윽고 미약한, 아주 미약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했지만 말이다.
“어르신.”
“이제 돌아갈 생각이냐? 나 때문에 이 외진 곳까지 왔으니 텔레포트라도 써주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슬쩍 주변을 살피다가 토끼들이 모여 있던 바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대화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 의자라도 마련해야지.
마침 드래곤도 ‘감히 필멸자가 내 앞에서 앉다니!’ 같은 말을 할 성격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런 말을 한다면 생각보다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제 얘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네 얘기?”
내 제안에 드래곤은 침묵을 지키더니,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마음대로 해라.”
다행히 허락이 떨어졌다.
***
로드께서 누군가 보낼 거라는 건 예상했다. 워낙 정이 많은 분이기도 하고, 에이만카 대제를 기억하는 존재들과 대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분이시니.
헌데 이렇게 이상한 녀석을 보내실 줄은 몰랐다.
“제가 나름 수석 팀장인데 어찌나 부려먹던지. 아무리 제가 막내라지만, 직급도 신분도 제가 위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위아래도 모르고 저에게 온갖 일을 떠넘기거나 괴롭혔습니다.”
“그렇군.”
“어떤 놈은 소독용 알코올도 알코올이라며 술 대신 마시려던 적도 있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최대한 희석해서 먹겠다고 물에 타거나 빵을 거름망으로 사용하기는 했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자고 일어났더니 눈이 안 보인다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렇, 군.”
분명 나를 설득하러 왔을 텐데 내 말을 듣더니 이해한다고 일축한 녀석.
그 뒤로 나를 설득하기는커녕 내 얘기조차 듣지 않고, 자신이 겪은 일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녀석.
“지금 생각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이었죠. 어찌 보면 술 퍼마시다 죽은 게 아니라 싸우다 죽어서 다행인 녀석입니다.”
심지어 죽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는 녀석.
이상한 일이다. 인간의 수명이 우리에 비해서 티끌이라는 건 알지만, 이 인간 아이는 인간 중에서도 어린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친구를 먼저 떠나보냈다는 것도, 연인을 잃었다는 것도, 그걸 웃으며 말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지? 설마 충격으로 마음이 비틀린 미치광이인가? 아니면 누가 죽든 신경 쓰지 않는 또라이인 건가?
‘그건 아니다.’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만 빠르게 털어냈다.
로드께서 영면을 결정한 드래곤에게 그런 놈을 보냈을 리는 없고, 이 아이의 말은 가벼울지언정 광기가 깃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이 아이는 연인과 친우의 죽음을 웃으며 말하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가. 인간의 삶이 짧기에 충격도 짧고 작은 것인가?
“어르신.”
“말해라.”
복잡한 심정으로 인간 아이를 내려다보자, 인간 아이 또한 나를 올려다보며 눈빛을 바꾸었다.
“어르신의 사모님과 자제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뭐?”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건방진.’
그래도 로드께서 보낸 존재기에, 나를 귀찮게 하지 않고 앞에서 떠들기만 한 녀석이기에 그냥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감히 내 앞에서 그녀와 그 아이를 들먹여?
감히, 인간 주제에?
‘내 모든 걸 앗아간 종족 주제에.’
손이 꿈틀거렸지만 참았다. 내 심장에 칼을 꽂은 아펠스 놈들과 지금의 제국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고작 일부의 업보로 모두를 미워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도 많으며, 너무나 짧은 시간을 살아가니까.
“어째서 노하시는 겁니까?”
‘이 새끼가.’
겨우 진정시킨 감정이 다시 폭발할 것 같─
“누구보다 사랑하는 분들을 떠올리는데, 왜 웃지 못하고 화를 내시는 겁니까?”
은…
“이 세상에서 그분들을 기억하는 건 이제 어르신밖에 없을 텐데. 왜 어르신이 그분들을 외면하는 겁니까?”
…
“어찌 그분들과의 추억을 잊으려 하고, 기억조차 회상할 수 없는 영면을 택하십니까?”
“그만.”
인간 아이의 말을 제지했다.
더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으니.
“생긴 건 투박한 놈이 의외로 언변은 좋구나.”
“송구하오나 귀족은 언변이 부족하면 손해를 많이 보는 족속입니다.”
“하긴. 그건 그렇지. 그건 수천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으켰던 몸을 다시 바닥에 붙였다.
“인간 아이야.”
“예, 어르신.”
“너는 먼저 보낸 아이들을 사랑했느냐?”
“저 자신보다 사랑했습니다.”
“먼저 보낸 아이들을 그리워하느냐?”
“다시 만난다면 하루 종일 울 자신도 있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같은 심정이니.
“허면 그 고통을 어찌 이겨낸 것이냐.”
“애석하게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웃고 있느냐.”
“제 마음에 뚫린 구멍보다 더욱 드높은 기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나는 수백 년, 수천 년을 함께 지낸 가족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다.
“그 구멍과 같은 기둥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으냐?”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제 삶이 그에 이르지 못할 터인데, 어찌 자신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인간 아이는 바위에서 일어나더니, 근처에 있던 토끼들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기둥을 세울 준비가 되어있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아이의 말에 작디작은 토끼 녀석들을 바라봤다.
그 미약하고 하찮은 녀석들도 귀를 쫑긋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아이야.”
“예, 어르신.”
“너의 삶은 나에 비하면 찰나다. 비교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보잘것없는 시간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찰나 정도는 내 뜻을 미뤄두겠다.”
그래. 어차피 300년 동안 죽지 않고 버틴 삶이다. 거기에 다시 수십 년 정도가 추가되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로드께는 내가 말해두마. 적어도 너의 체면과 노력을 높게 샀기에, 너의 영면을 보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겠다고.”
“종종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러던지.”
픽 웃음을 흘리며 팔 부근의 비늘 하나를 뜯어줬다.
“넌 내 육체의 모든 것을 가져갈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를 포기한 미련함을 높게 사 그거라도 주마.”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인간 아이를 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인간 아이야.”
“예. 말씀하시지요.”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라 합니다.”
쓸데없이 긴 이름을 머리에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만카 대제 이후로 인간의 이름을 외운 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