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42)
로판 속 공무원 642화(643/945)
무사히 영면 희망 드래곤을 설득했다.
비록 내가 죽을 때까지 뜻을 미뤄두겠다는 조건부 선언이었으나, 영면을 선언했던 자가 잠깐이나마 뜻을 접었다면 긍정적인 일. 그 찰나가 계기가 되어 다시 삶에 대한 의지가 뜨겁게 타오를 수도 있다.
“노고가 많았네, 장관.”
그에 대한 보고를 올리자 황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착잡함이나 답답함보다는 안도가 가득 담긴 한숨을.
“황실의 큰어른께서 이 말예에게 친히 부탁하신 일이었지. 그분께서는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나, 어찌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겠나.”
“옳은 말씀입니다. 게다가 로드께서 설득을 부탁한 분은 제국 건국에 큰 공을 세우신 분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 분이 영면을 택한다면 제국의 황제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지.”
황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펠스 제국의 핍박을 받던 드래곤들이 크펠로펜 제국과 리브노만 황실을 지지하는 건, 천명이 아펠스에서 크펠로펜으로 옮겨졌다는 증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크펠로펜의 역대 황제들은 30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드래곤들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헌데 제국 건국 이후로 최초로 드래곤이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영면을 택해서?
‘뒷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지.’
드래곤이 스스로 영면을 택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온갖 얘기가 나왔을 거다. 아마 타락한 제국에게 실망했다느니, 황실이 무례를 저질렀다느니 흉악한 추측도 난무했을 터.
허나 검은 드래곤을 설득함으로써 그러한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황제 입장에서는 황실 큰어른의 부탁도 이루었고, 제국과 황실의 체면도 지킨 것이다.
“장관이 정말 큰일을 한 거야. 고맙네.”
“과찬이십니다, 폐하.”
이번에는 어깨까지 토닥이며 치하하는 황제에게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번 설득은 운이 좋았다. 검은 드래곤은 나에게 언변이 좋다고 했지만, 곰곰이 들어 보면 치밀한 설득보다는 감정에 호소한 직설적 화법이었다. 상대의 마음이 굳게 닫혀있었다면 ‘어쩌라고.’로 대응할 수 있는 말에 불과했다.
그러니 검은 드래곤이 설득된 건 내 능력이 아니다. 검은 드래곤 스스로가 품고 있던 티끌만큼의 미련 덕분이었다.
‘정말 모든 걸 내려놓았다면 토끼들을 보살피지 않았겠지.’
동굴에 오밀조밀 모여 지내던 토끼들. 그 토끼들이 검은 드래곤의 미련이자, 공허한 구멍을 대신하여 새로운 기둥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물론 검은 드래곤이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기에 토끼들이 동굴에 머무는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허나 생태계 피라미드에서 한없이 바닥에 존재하는 피식자가 토끼다. 그런 토끼가 거대한 드래곤과 공존을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드래곤이 가만히 있더라도 토끼들이 겁을 먹고 접근조차 피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토끼들이 동굴에 있는 것은 알게 모르게 드래곤이 돌봐주었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무서운 드래곤이어도 자기들을 돌봐주면 좋은 주인님이니.
‘작은 불씨가 산을 뒤덮는 화마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검은 드래곤에게 불씨를 보여줬다. 당신이 작고 하찮은 토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새로운 인연도 사귈 수 있을 거라고. 새로운 기둥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당신은 아직 모든 걸 버리지 않았고, 작은 감정과 인연을 가지고 있다고.
‘토끼가 살린 건가?’
문득 웃음이 터질 뻔했다. 드래곤 로드가 걱정하고, 황제가 전전긍긍하던 드래곤 영면 사태. 그 사태를 해결한 것이 작디작은 토끼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고맙다, 동굴 토끼. 네가 수명이 다해 죽더라도 나만큼은 널 기억할게.
“참. 장관.”
“예, 폐하. 말씀하소서.”
“로드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면 크게 기뻐하실 텐데, 공을 세운 장관이 직접 말씀드리는 게 어떻겠나?
“…예?”
갑작스러운 드리프트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직접 말하라니. 아직 영면 희망 드래곤과 1 대 1 대면을 한 충격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혹시 아는가. 로드께서 친히 그분의 손톱이나 비늘을 하사하실지.”
그런 거 필요 없다. 이미 검은 드래곤의 비늘이 저택 창고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실로 황송한 말씀이오나, 소신의 작은 공로로 그분 앞에 서는 건 부끄러운 일─”
“어차피 그분이라면 친우를 살린 은인인 장관을 직접 보고 싶어 하실 걸세. 그때는 짐도 함께 그분을 뵈러 가겠지.”
“소신이 그분의 작은 즐거움이 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나중에 자기랑 같이 간다는 짧은 협박.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라 그냥 지금 가기로 했다. 앞에 드래곤 로드, 뒤에 황제를 둘 바에는 로드만 만나는 게 그나마 편하지 않겠나.
‘망할.’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내가 로드가 아닌 다른 드래곤을 보게 될 줄은 몰랐고, 로드를 황태녀 즉위 이전에 다시 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제국 역사상 나 같은 신하가 또 있을까 싶다.
드래곤 로드가 머무는 동굴로 이동했다.
저번 방문 때는 황제와 전승공에 묻어가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나 홀로 방문하는 거라 부담이 컸다. 황제를 대하는 것도 피곤한데 황실 큰어른을 대하는 건 얼마나 피곤할까.
“어서 오거라. 기다리고 있었다.”
동굴에 발을 딛자마자 로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텔리우스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 너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여 영면을 보류했다고 하더구나.”
“그것이 어찌 제 덕이겠습니까. 아마 친우를 걱정하는 로드의 마음을 이해하여 생각을 바꾼 것일 겁니다.”
따뜻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반사적인 겸양을 출력했다.
그보다 검은 드래곤의 이름은 아텔리우스였구나. 생각해 보니 내 이름은 밝혔지만 정작 상대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말은 말거라. 나는 친우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오롯이 너의 힘으로 나의 친우를 살린 것이다.”
이윽고 동굴의 어둠 속에서 황금빛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올라오거라. 너를 가까이서 보고 싶구나.”
“…영광입니다.”
자기 손바닥 위에 올라타라는 요구에 잠시 당황했으나,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이미 독대까지 하는 중인데 손바닥이 대수냐.
“후후후…”
그렇게 나를 들어 올려 눈앞까지 가져온 로드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신기하구나. 길버트가 너와 함께 왔었으니 너의 능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리도 훌륭할 줄은 몰랐다. 설마 인간의 힘으로 드래곤의 결심을 꺾었을 줄이야.”
“아텔리우스라는 분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어찌 제가 수천 년을 살아온 드래곤을 설득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씨라.”
내 말에 로드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검은 아이야. 괜찮다면 아텔리우스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겠느냐?”
그리고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가, 호의로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반겨주었다.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친우가 영면을 보류했다는 것이 진심으로 기쁜 것 같았다.
로드는 아무 질문 없이 조용히 내 말을 들었다.
아텔리우스가 나를 보자마자 손톱을 뜯으려고 한 것. 그런 아텔리우스를 설득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들려준 것. 아텔리우스의 가족을 언급하여 감정을 끌어낸 것. 아텔리우스 자신도 모르고 있던 불씨를 보여준 것.
마지막으로 아펠스를 향한 복수를 마치고 수백 년을 공허하게 살아간 드래곤이, 고작 토끼들을 기르고 있었다는 것까지.
“토끼, 토끼라. 아텔리우스가 토끼를…”
그 사실은 로드 입장에서도 놀라웠는지 연신 토끼라는 말을 되뇌며 웃음을 흘렸다.
“다시 놀라게 되는구나. 그 아텔리우스가 토끼를 기르다니.”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인간보다도 아득히 작은 토끼가 드래곤의 옆에서 생활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란다. 설마 흉룡이라 불리던 아텔리우스에게 그런 면모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뒤늦게 위화감이 들었다.
‘흉룡?’
뭔가 엄청난 이름이 자연스레 지나간 것 같은데.
“너는 처음 듣는 이야기겠구나.”
내 표정에 스쳐 지나간 위화감을 눈치챘는지, 로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눈동자로 말을 이었다.
“나도 내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다만, 아텔리우스는 건국 이전까지 흉룡이라 불렸단다. 가족을 잃은 아텔리우스의 분노는 아펠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
“그렇군요.”
그 말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내와 자식을 잃은 남편을 흉룡 취급하다니. 어째서 대륙 역사에 흉악한 것이 나오면 대부분 아펠스에서 나온 문제인 거냐.
“그건 그렇고 확실히 작은 것부터 정을 들이는 중이었구나.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도 있겠어.”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여러 번 깜빡인 로드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검은 아이야. 너에게 부탁을 해도 되겠느냐?”
난데없는 연계 퀘스트에 잠시 당황했다.
“말씀하시지요. 친우분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나 금방 마음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이미 아텔리우스에게 종종 인사하겠다는 말도 남긴 상황이다. 까짓 연계 퀘스트 정도야 못 들어줄 것도 없다.
아텔리우스의 모습은 남의 모습 같지가 않으니까.
***
인간 아이─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을 돌려보낸 것이 고작 며칠 전의 일.
“칼.”
“…예, 어르신.”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헌데 고작 며칠 만에 재회하고 말았다.
“우와! 우와아아아!”
그것도 다소 이상한 모습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연신 감탄사를 흘리는 은발의 작은 아이. 그 옆에서 눈을 반짝이는 흑발의 작은 아이.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로드께서… 작은 동물과 교감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수명이 긴 인간 아이와도 대화를 나눠보라며…”
“허어.”
칼의 말에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내가 영면을 보류했다고 바로 이렇게 나오실 줄이야.
‘인간 아이라.’
작디작은 두 인간 아이를 내려다봤다.
물론 이 아이들이 토끼들보다는 크지만, 그럼에도 잘못 건드리면 부러질 것처럼 작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 아이들은 용케 나를 보고도 겁을 먹지 않는구나.”
“이 아이들이 비범한 아이들이기는 합니다.”
내 말에 칼은 뿌듯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반응을 보니 이 녀석의 자식들이로군. 아비를 닮아 자식마저 보통은 아닌 것 같다.
‘…은발 아이는 대제의 후손이군.’
자세히 보니 은발 아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칼의 자식이든 대제의 후손이든 정상적인 핏줄은 아닌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