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48)
로판 속 공무원 648화(649/945)
에리의 점진적 퇴직 소식은 정보차장에게 전달했다.
이미 감찰성 최고 결정권자인 내가 에리의 퇴직 결정을 들었으니 굳이 전달할 필요는 없으나, 조직도상 에리의 바로 위는 정보차장과 정보부장이다. 장관인 내가 곧바로 처리하는 것보다 아래서부터 차근차근 보고가 올라오는 것이 보기 좋다.
게다가 1과장 교체를 가장 먼저 제안한 건 정보차장이잖아. 얘 아이디어니까 얘가 책임지고 처리해야지.
– 아니, 저 성과 보고서 다시 취합했는데요.
내 연락에 정보차장은 뚱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새로운 보고서를 완성했는데 이제 와서 그러기냐고.
“그럼 에리가 복귀하면 사이좋게 같이 일하든가.”
– 기존 보고서는 아직 보관 중입니다. 1시간 내에 다시 제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장관 부인을 부하로 부리기 vs 새 보고서 작성한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라는 선택지를 던져주니 가차 없이 후자를 골랐지만.
“잘됐네. 그대로 올려.”
남의 부인을 역병 취급하는 것 같아 잠시 울컥했으나 이해한다. 나였어도 내 부하 중에 재무성 장관의 부인이나 황후가 있었다면 정신이 아찔했을 테니.
– …그거 한 번 기각된 보고서인데, 그대로 올려도 되는 겁니까? 살짝 수정하는 성의는 보여야 할 것 같은데요.
“됐어. 정보부장한테는 내가 잘 얘기해 둘게.”
정보차장의 걱정에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정보부장이 기존 보고서를 기각한 건 내가 버티고 있어서다. 그러니 내가 나서서 괜찮다고 말하면 정보부장 입장에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상사의 부인이 부하로 버티고 있는 건 차장뿐만 아니라 부장에게도 부담이니까.
다만 차장의 말대로 한 번 기각한 걸 다시 수용하는 것은 부장 체면에 말이 아니지만, 그게 같은 보고서라는 건 보고를 주고받는 부장과 차장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른다.
‘적당히 다독이면 되겠지.’
그리고 정보부장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하면 완벽하다.
정보부장이 이런 일로 빈정이 상할 성격은 아니나,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 상사가 먼저 사과와 양해를 구하면 정보부장의 심기가 뒤틀렸어도 무난히 넘어갈 것이다. 장기간 공무원으로 지낸 만큼 위계질서에 철저한 양반이니까.
– 예, 뭐…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보차장도 그동안 정보부장과 지내면서 자기 상사의 성격을 파악했는지, 별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부장이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귀찮고 피곤한 타입도 아니다. 오히려 결과만 괜찮으면 과정에서 작은 소란이 생겨도 넘어갈 사람이지.어찌 보면 자유분방한 주제에 결과는 꼬박꼬박 뱉어내는 정보차장과 궁합이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아. 1과장 내정자는 누구야?”
슬슬 연락을 끊으려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감찰성 출범 이후 첫 과장 교체인데, 누구인지는 알아두는 게 도리다.
– 안젤리카 위넨입니다. 현 정보부 1과 수석 팀장이고, 감찰부 시절부터 여러 성과를 낸 인재입니다.
“안젤리카 위넨이라.”
딱히 기억에 남은 이름은 아니다. 내가 감찰부장 시절에는 팀장까지 하나하나 통제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예전부터 공을 세운 인재라고 하니 과장에 올려도 괜찮겠지. 수석 팀장이면 과장으로 승진하는 루트기도 하고.
– 지금 1과장이랑 흡사한 녀석입니다. 미니 1과장이라고 보셔도 무방해요.
허나 이어지는 정보차장의 말에 움찔하고 말았다.
“너는 꼭 너 같은 부하 만나라.”
“이미 저런 애 있습니다.”
“대륙이 망할 때가 됐나.”
뒤이어 몇 년 전, 에리를 구박하던 중에 3과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스쳐 지나가는 대화에 불과했지만 너무 인상 깊은 말이라 아직도 기억이 난다.
무려 에리랑 똑같은 부하가 존재한다는 두렵고도 흉악한 말이었기에.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터.
“…얼마나 닮았냐?”
– 얼마나 다른지 묻는 게 더 빠를 겁니다.
그 말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설마 에리라는 독보적인 인물에게 후계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신임 1과장 내정자에 대해 에리에게 말했다.
“아, 걔가 신임 과장이에요? 그럼 맡길만하죠!”
믿음으로 가득한 답이 돌아왔다.
“아마 1과 내에서는 저 다음으로 지하실에 자주 있었을 걸요? 능력도 제 바로 아래 수준이고요.”
“그러냐…”
“생각해 보면 걔 말고 과장이 될 애가 없긴 하네요. 차장이 좋은 애로 잘 골랐네.”
히히 웃는 에리의 모습에 조용히 차를 마셨다.
오리지널이 인정하는 미니 후계자라니. 1과에는 마가 낀 건가.
‘마가 낄 수밖에 없는 구조기는 하지.’
지하실에서 온갖 비명과 유혈을 겪으며 근무하는 것이 1과다. 사실 마가 낀다면 백 번도 더 끼었을 부서기는 하다.
그래도 위안을 삼는다면 1과는 업무 특성상 도중에 탈주하는 부원들이 잦은 편인데, 신임 1과장이 에리처럼 과를 꽉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에리가 인정하는 후계자라면 1과가 휘청이거나 삐걱일 일은 없을 테니.
그래, 다행인 일이다. 다행일 일이기는 한데…
‘어떻게 에리 같은 과장이 연이어 나오냐.’
이쯤 되면 씁쓸함과 당혹감을 넘어 경이로운 수준이다.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캐릭터가 연달아 둘이나 출현하다니.
본래 부서의 성격은 그 수장의 영향을 짙게 받는 편인데, 에리 타입 수장이 2연속 집권하면 1과의 성격도 정상과는 광속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비정상적인 부서가 한계를 돌파할 거다.
‘1과는 전설이다…’
여러 의미로 전설이 될 거다.
“맞다. 저 걔 저택으로 초대해도 돼요?”
“엉?”
에리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초대? 누구를? 미니 에리를?
오리지널 에리가 있는 저택에 미니 에리까지 부르자고?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던데.’
아니, 그건 셋을 만나면 죽는 거였나? 빙의 전 세상 미신이라 가물가물하네.
“나름 아끼던 부하가 과장이 되는 건데, 저 휴가 중이라 직접 축하도 못 해주잖아요. 그러니 저택에서 차라도 같이 마시려고요.”
하지만 생각보다 상식적인 이유라 납득하고 말았다.
1과장 자리가 공석이었다면 모를까, 에리가 1과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임 1과장이 임명된다면 이취임식을 하는 게 옳다. 승진하는 후임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쳐주고, 물러나는 전임자에게는 고생했다고 박수를 쳐주는 것. 이게 사회생활의 기본 아닌가.
나야 좀 특이하게 승진한 편이라 이취임식은 못 겪어봤지만, 내가 못 했다고 남들도 못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청사에서 하기는 무리지.’
물론 이취임식을 청사에서 하기에는 에리의 배가 문제다. 외출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나, 다소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행사에 참여하는 건 부담이 크다.
그러니 저택에서 약식으로 축하 자리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에리를 닮은 성격이라면 격식에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닐 테고.
“뭐, 나야 신임 과장 얼굴 보면 좋지. 그렇게 해.”
“넹!”
내 허락에 에리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통신구를 품에서 꺼냈다.
“안젤리카! 나야!”
– 잉? 과장님?
그러더니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초대를 시도했다.
너무 빠른 속도라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수석 팀장이 과장으로 승진하는 건 공식 결재를 못 받은 안건인데.
‘뭐 어때.’
당사자 입단속만 제대로 하면 미리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현 정보부 1과 수석 팀장이자 미래의 정보부 1과장인 안젤리카 위넨.
“안녕하십니까! 1과 수석 팀장, 안젤리카 위넨입니다!”
“반갑다. 감찰성 장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다.”
에리처럼 새하얀 백발을 가진 안젤리카는 나를 보자마자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정상적인 모습이지만 속지 않았다. 에리랑 정보차장, 집행부장도 처음 봤을 때는 정상이었어.
“갑작스러운 초대지만 응해줘서 고맙다. 지금은 수석 팀장으로서 장관의 저택에 온 게 아니라, 한 명의 귀족으로서 친한 언니의 집에 놀러 왔다 생각하도록.”
“넵! 영광입니다!”
내 말에 더욱 굽신거리는 안젤리카의 모습을 보며 느꼈다. 적어도 위아래 몰라보고 날뛰는 광인은 확실히 아니라고.
사실 위아래도 몰라 보는 광인이었다면 에리가 아끼기는커녕 진작 날렸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상식이 있다면 정보부장과 정보차장의 마음도 편해질 거다. 적어도 시키는 일은 잘한다는 거니까.
…그런데 이건 개노답 삼과장 트리오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잖아. 걔네가 말을 안 들어서 내 속을 태운 건 아니었지.
‘아무렴 어때.’
짧은 고민 끝에 걱정과 불안을 털어냈다.일개 과장이 날뛰어봤자 감찰성 전체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어차피 고생하는 건 정보차장─ 더 나아가 봤자 부장까지다.
즉, 안젤리카가 기행을 펼쳐도 내가 고생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구르는 건 정보차장이 열심히 구르겠지.
‘어디 너 같은 부하 때문에 고생 좀 해봐라.’
흡족한 마음으로 막 허리를 든 안젤리카를 바라봤다.에리와 달리 새파란 눈동자였으나, 정보차장과 같은 색이라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정보차장의 업보를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의지 같았으니까.
***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매트가 깔려서 푹신한 복도,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장식품들이 걸린 벽, 깔끔하게 세련된 천장. 하나하나 구경하는 재미가 넘쳐났다.
물론 초대받은 곳이 이 저택이 아니라 시골 폐건물이었어도 응했을 거다. 휴가 중이라 오랫동안 보지 못한 과장님이 그립기도 했고, 과장님의 입에서 눈을 번뜩 뜨게 할 소식이 나왔으니까.
– 나 퇴직할 거야!
“넹? 왜요?”
– 퇴직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1과를 훌륭하게 이끌었던 과장님의 퇴직.
– 아, 내 뒤는 네가 이을 거야! 우리끼리 소소하게 이취임식 할 거니까 장관님 저택으로 와!
그리고 그 공백을 내가 메꾸게 되었다는 소식.
그 소식을 들으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내가 1과장이라니. 내가 1과의 수장이고, 내가 지하실의 지배자라니.
‘언제든지 지하실에 갈 수 있어!’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직 과장님만 가질 수 있는 지하실 열쇠. 과장님이 휴가 중인 지금도 그 열쇠는 철저하게 관리 중이라, 입장하려면 출입명부를 꼼꼼히 기록해야 하는 지하실.
내가 과장이 되면 그런 복잡한 절차를 생략해도 된다.
내가 과장이니까! 내가 지하실 책임자니까!
“야호!”
근처에 아무도 없길래 냅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늘은 안젤리카 위넨! 인생 최고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