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5)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제국 300년 역사에 등장한 역대 공작들은 하나하나가 비범한 인물이었다. 개인의 능력이 미쳤거나, 거느린 세력이 미쳤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그리고 현 다섯 공작은 전부 마지막에 속한다. 제국의 미래는 정말 밝구나.
그리고 나는 황제 직속 부서나 마찬가지인 감찰부의 부장인지라, 완전체인 다섯 공작들과 만나는 일이 다른 공무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황제에게 부려진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가? 내 관운은 정말 어둡구나.
아무튼 제도에 있는 공작에게 소환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본거지인 공작령으로 가야 하는 초유의 사태. 마르게타를 비롯한 학생회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운 변수.
“보야르 공작령에서 보낸 문서에요.”
“제가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그렇다고 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봤다. 보야르 공작령, 정확히는 황금공의 의지가 듬뿍 담겨 보내진 문서.
‘이렇게 일관성 있는 것도 굉장한데.’
오히려 문서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황금공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 황금공은 돈을 지배하고 돈에 환장하는 양반이다. 황금공이 웃는다면 큰 이득을 본 것이고, 움직인다면 이득을 내기 위함이라는 말이 돌 정도니.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학여행 장소가 보야르 공작령으로 정해진 이유도 간단하다. 딱히 이런저런 수가 깔려있는 건 아니고, 보야르 공작령에 새로 리조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새로 만든 리조트 홍보 겸 귀족 학생들로 인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힘을 쓴 것.
“제가 아는 황금공 각하군요.”
“그렇죠? 언제나 변함이 없으셔서 든든할 정도에요.”
그냥 황금공이 황금공 했다. 만약 공작의 힘으로 수학여행 장소를 어디 이상한 깡촌으로 정했다면 모를까, 보야르 공작령은 이미 휴양지로 유명한데다 경제 중심지 중 하나다. 학생들도 오히려 좋아하면 좋아할 장소.
“가까운 곳으로 하려 했는데, 아쉽게 됐어요.”
애써 밝게 말하는 마르게타의 목소리에 미세한 피곤함이 담겨있었다.
이번 수학여행의 피해자는 둘이다. 공작과 최대한 만날 일이 적었으면 하는 나. 그리고 학생과 교직원을 포함하여 수백이나 되는 인원이 제국 남쪽 끝으로 이동하는 일정을 짜야 하는 학생회. 적당히 가까운 영지로 가려 했던 학생회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날벼락이겠지.
심지어 황금공 성격상 마구잡이로 요청하지도 않았을 거다. 아카데미에 은근슬쩍 찔러준 것이 있어서 학생회도 밥값을 해야 하는 상황이겠지. 아무리 부회장으로 공녀가 버텨도, 공작 당사자가 등판하면 못 이긴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후후, 고마워요. 언제든 부를 테니 각오하세요?”
싱긋 웃는 마르게타의 눈에 잠깐이나마 익숙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예정대로 일을 진행하려다가 높으신 분의 의지로 드리프트를 하게 된 처량한 공무원의 눈빛.
‘공무원 공녀.’
신박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남들 위에서 고고하게 지낼 공녀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받고 있으니. 만약 과장 중 하나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어깨라도 두드려줬을 텐데.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르게타의 모습이 오늘따라 가엽게 보였다.
수학여행 장소는 오늘 공개적으로 밝힌 모양이다.
“바다는 처음 가봐요!”
“그래?”
흥분한 것 같은 루이제의 모습에 고개만 적당히 끄덕였다. 고작 바다를 본다는 거에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면 아직 순수한 것 같으면서도, 제국의 영토를 생각하면 그럴만하다. 땅은 더럽게 넓지만 교통 수단은 마차 정도니까.
물론 텔레포트라는 변수가 있기는 한데 그건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닌지라. 결국 작정하지 않는 이상 내륙 사람은 평생 바다를 볼 일이 없다.
“굳이 갈 일이 없으면 바다까지 가기는 힘들지. 나도 가본 적은 없어.”
“저도 그렇습니다. 우연이군요.”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정보가 들려왔다. 에리히는 워낙 영지에 있던 녀석이니 그렇고, 타니안도 내륙국인 신성교국에서만 자랐으니 마찬가지인 모양. 말 없는 아인테르는 두 형의 자강두천으로 황궁에서만 지냈으니 논할 것도 없고.
“그러면 아무도 안 가본 거야?”
“나는 가봤다. 해일 피해 지역 위문이기는 했지만.”
“업무로 간 것도 포함인가? 연합회의 때 간 적은 있다.”
두 왕자는 이리저리 업무로 끌려다닌 것 같았다. 가끔 까먹을 것 같지만 쟤네도 나름 왕족이니 대외 활동은 필연적이겠지. 오히려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아인테르가 특이 케이스다.
류티스와 라테르의 말까지 들은 루이제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도 업무 문제로만.”
무슨 질문을 할지 뻔하길래 먼저 선수를 쳤다. 바다? 가기는 했지. 여러 번 업무차 가기는 했지만, 유출 금지 품목을 밀수하던 개새끼들이 외국으로 튀려고 해서 바다까지 추격했던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제국 이곳저곳을 누빈 신나는 술래잡기라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서.
결국 배를 타는 건 막지 못해서 배와 함께 침몰시켰다. 바다로 가라앉는 물건들이 얼마나 아깝던지. 물론 밀수꾼은 죽어도 돼. 어차피 생포했어도 사형이다.
“그럼 다 같이 놀러 가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더니 가방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루이제. 푸른 표지의 얇은 책자 하나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짠! 보야르 공작령 팸플릿이래요!”
‘그게 왜.’
그게 왜 여기 있어.
갑작스러운 낯선 책자와의 만남에 어색함을 느끼는 사이, 에리히가 대신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팸플릿? 어디서 난 거야?”
“지난주에 이리나하고 도서관에서 봤어. 많이 있던데?”
아무리 봐도 수학여행 시즌에 맞춰서 일부러 아카데미 도서관에 쑤셔 박은 거다. 학생들이 보야르로 오기 전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 더 잘 알고, 미리 어디에 돈을 쓸지 생각하고 오라는 뜻. 황금공, 이 지독한 사람…
귀족 손님 수백이 우르르 몰려오니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겠지. 진심이다, 황금공 이 양반 진심이야.
“오, 그런 것도 있었군.”
“여행은 알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남자 다섯이 루이제에게 가까이 다가갈 명분이 생기자마자 귀신같이 다가가는 모습은 측은할 정도였다. 그런데 작은 책자 하나에 여섯이나 붙어 있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보야르 공작령은 제국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아펠스 시절부터 번영한 장소다.”
답답하게 붙어있지 말고 떨어지라고 얘기하려는 찰나, 루이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접 읽어주는 건 어쩔 수 없지.
잠깐 동안 루이제의 낭독회를 보면서 느낀 건데, 저 새끼들 내용에는 관심 없다. 빌라르에게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할 거다. 아무리 내용을 읽어준다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루이제 얼굴만 보고 있잖아.
“전전대 보야르 공작 때부터 휴양 시설을 개발하고…”
열심히 읽어주는 루이제에게는 조금 미안한 감상이지만 제과 유치원의 루이제 선생님이 철없는 다섯 원아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 같았다. 애들은 책 읽어주면 잠이라도 자지, 저것들은 대체.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밝은 표정의 에리히가 눈에 들어왔다. 좋냐? 저 못난 놈이, 차라리 대신 읽거나 도서관에서 더 가져올 생각을 해야지.
‘여섯 번째가 따로 있나?’
요즘 들어 근본적인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다섯이나 있으면서 한 명도 제대로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데, 정말 이게 맞는 건가? 아직 내가 모르는 여섯 번째가 튀어나와서 저것들에게 위기감을 줘야 진도가 나가려나?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더 추가되는 건 많이 골치 아픈데.
그렇게 나 홀로 심각한 고민을 하는 사이, 말하는 사람은 있지만 듣는 사람은 사실상 없는 기적의 낭독회가 잠시 멈췄다.
“대륙 제일의 카지노?”
순수하게 자란 우리 영애님에게 카지노의 등장은 많이 낯설었나 보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에게 시선을 돌리는 걸 보니 약간 당황한 것 같다.
“휴양지라 온갖 귀족들이 다 모이거든. 카지노 하나만 제대로 세워두면 수입이 꽤 괜찮아.”
“그래요?”
그러면서 어색하게 헤헤 거리는 것이 카지노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
‘정말 순수하게 자랐네.’
원작 작가가 현대인이라 그런지, 중세 유럽 정도가 배경임에도 이 세계에서 도박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은 아니다. 덕분에 귀족이어도 이리 순박한 아이가 튀어나오고.
그리고 실제로 보야르 공작령에 있는 카지노는 썩 당당히 운영되는 곳이 아니다. 그거 황실 ATM이나 마찬가지라서.
‘나도 거기 좀 사용했었지.’
가끔 출장 중에 보야르 지역을 지나가는 공무원이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형식으로 긴급 예산을 타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카지노는 손님이 아닌 카지노가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래서 황제에 충성하는 귀족들이 그곳에 가서 돈 좀 적당히 잃고, 그 돈은 황제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황제에게 간 돈 중 일부는 특무성이나 감찰부에 특별 예산이라는 명목으로 꽂히고, 또 일부가 내 월급이 되고, 그 월급을 다시 카지노에 가서 잃고…
시발 뭐지, 순환 경제가 많이 이상한데? 카지노에서 내 돈을 잃는 건지, 아니면 내 돈이 아니었던 걸 맡아뒀다가 반납하는 건지 묘하게 헷갈린다.
“그래도 그런 거 말고 즐길 곳은 많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혹여나 내가 빠진 기괴한 굴레에 이 녀석들도 묶일까봐 서둘러 덧붙였다. 나는 적어도 월급이나 예산이라도 받지, 얘네는 카지노에서 잃으면 그걸로 끝이다.
“네, 저는 해수욕장에 있으려고요.”
“바다면 역시 해수욕장이지.”
“그렇지? 기대된다.”
반응을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것보다 에리히 저 놈, 바다는 가보지도 않은 게 무슨 역시 타령이야.
“와, 특이한 과일도 많다는데?”
다시 루이제의 낭독회가 시작되자 슬쩍 품 속의 통신구를 매만졌다. 학생들은 마냥 신난 것 같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많은 어른들은 미리 준비할 것이 많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아카데미 인근이 아닌 제국 남쪽 끝까지 주요 인사를 보내야 하는 삼국 전력. 그 정도 거리면 삼국 전력이 보야르로 진입하는 것을 허락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아카데미 밖은 험악한 세상인데.’
애초에 어디를 나간다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거다. 위험한 세상으로 학생들을 내보내는 건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