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53)
로판 속 공무원 653화(654/945)
저녁 식사 직전에 에리히가 찾아왔다.
이 녀석이 우리 집에 무슨 일로 왔나 싶었지만, 그래도 퇴근하자마자 본인 집이 아닌 형과 형수들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 기특해 기꺼이 맞이해줬다. 몇 개월 후면 본인 결혼식이니 결혼식에 대한 조언이라도 들으려는 모양이지.
“형. 혹시 내일 시간 괜찮아?”
“내일?”
“그으… 내일 의회에 좀 와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방문 사유를 듣자마자 손이 움찔거렸다.
기특하기는 개뿔. 이 머리 검은 짐승 녀석이 형에게 대형 엿을 선사하고 있어.
“아니, 나도 어지간하면 형 부르기는 싫지. 휴가 중인 사람이 의회에 끌려가는 선례가 생기면 나도 귀찮아지잖아.”
허나 내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감정을 읽었는지, 황급히 손사래를 치는 에리히의 모습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건 에리히의 말이 맞다. 형인 내가 휴가 중에 의회에 출석하는 선례가 생기면 동생인 에리히도 곤란해진다. 아무리 에리히의 눈치가 기괴해도 그런 당연한 미래조차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대리가 멀쩡히 버티고 있으면 제국백 당사자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렇기에 일단 에리히와 식당으로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제국의회는 의원 대리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으면 굳이 그 뒤에 있는 제국백과 접촉하지 않는다. 그것이 대리인을 택한 제국백에 대한 배려요, 자신들과 함께 의회를 이끌어가는 대리인을 향한 존중이니까.
헌데 의회가 그 전통을 어기고 휴가 중인 나를 부른다? 별거 아닌 사유면 의사당 옥상에서 하늘 베기를 시전할 일이나, 절대 가벼운 사유일 수가 없다. 입법기관에서 전통과 관습을 깨부수는 건 어마어마한 각오가 있어야 되는 일이니.
“그게…”
내 질문에 에리히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충성스러운 사용인들이라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곤란하다는 것처럼.
“의장이 의원 정원 확충 안건을 올렸어.”
“뭐?”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에리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속기사랑 비서들, 호위병들도 전부 뺀 상태로 의원들만 모여서 논의한 거야. 소회의실에 30명이 모여서 숙덕거리니 미치겠더라.”
의원 정원 확충은 누군가가 언급했다는 것 자체로도 제국 정계가 술렁거릴 일이니까.
“지금 의장이 카도르 백작이지?”
“어. 아직은 그래.”
에리히의 답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 기억 속 의장은 급진적인 성향의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현상 유지와 전통 수호를 중시하는 보수파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의원 정원 확충이라는 폭탄을 던져? 제국 건국 이래 300년이나 이어진 전통을 부순다고?
‘황제인가?’
차라리 의장이 황제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는 게 더 그럴듯하다. 제국백 카도르 백작은 보수적인 인물이나, 제국의회 의장은 철저히 황제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의장의 성향이나 가치관 따위는 황명 앞에 무의미하다.
‘아니야.’
그러나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인 황제의 개입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능성 낮은 가설이기도 하다.
황제는 나와 만날 때마다 딱히 제국의회나 의원 정원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휴가자 앞에서 업무 얘기를 하지 않는 배려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황제는 그렇게 세심한 새끼가 아니다. 의장의 안건이 황제의 뜻이었다면 이미 나한테도 언급했을 거다.
즉, 이번 안건은 오롯이 의장의 뜻이라는 건데.
“…제국백을 늘리자는 의견이 제국백 입에서 나왔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홀로 중얼거렸다. 300년 동안 30명이 일치단결한 제국백이 늘어나는─
“아, 제국백을 늘리자는 건 아니야. 의원 자격만 넓히자던데?”
그 말에 에리히의 명치 쪽으로 시선이 갔다.
이 망할 동생 놈이.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단순히 의원만 늘리는 거라면야…’
빡침과 별개로 납득했다. 사실 의원 정원을 늘리는 것도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제국백을 늘리는 것보다는 양호하다. 의원들은 입법기관인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존재인데, 고작 30명뿐인 건 너무 적은 거 아니냐는 의견이 옛날부터 있었으니까.
당장 제국의회가 견제해야 하는 행정부는 팀 하나나 둘만 뭉쳐도 가뿐히 30명에 이르잖아. 그걸 과, 부, 성 단위로 넓히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의회를 유지하기 위해 의원을 늘리는 건가?’
이윽고 보수파인 의장이 의원 정원 확충이라는 강수를 든 이유를 깨달았다.
전통을 중시하는 의장은 ‘제국의회 의원 정원’이라는 작은 전통이 아닌, ‘제국의회 존재 자체’라는 거대한 전통을 살리고자 한 것이다. 30명 결사대가 그대로 이어지면 의회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으니 소를 버린 것이다.
“아무튼 제국백만 존재하던 의회에 다른 사람들도 들이자는 거니까, 내가 대리여도 제국백인 형이 오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에리히의 말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대리를 존중하고 배려해도 대리는 대리. 기껏 대리인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는데, 제국백인 내가 거품 물고 반대하면 의원들만 골치 아파진다.
“언제까지 가면 되냐?”
“오전 중에만 와 줘. 휴가 중인 사람을 부르는 거니까 형이 오는 시간에 맞추겠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다.
물론 애초에 초청을 받지 않는 것이 최고지만, 제국백 밥그릇이 걸린 안건을 휴가 중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 방문자가 아닌 관계자로서 제국의회에 오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어서 오시오, 타일글레헨 백작. 신혼을 즐기고 있을 백작을 불러 미안할 따름이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의회의 안정과 제국의 번영을 위함이 아닙니까. 저 또한 제국백이니 마땅히 의무를 다해야지요.”
그리고 의사당 정문까지 나와 맞이해주는 의장의 모습에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난데없는 출근이 불쾌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의장의 심정과 사태의 중대함을 알기에 순순히 출근길에 올랐다. 제국 정계와 향후 수백 년 역사가 흔들릴 수 있는 일에 ‘나 휴가임.’으로 일관하는 건 너무 철면피잖아.
“역시 백작의 애국심은 실로 감탄스럽소. 백작이 장관인 것이 아쉬울 정도로.”
“의회든 행정부든 결국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 아니겠습니까?”
의장의 말에 빠르고 단호하게 답했다. 방금 의장이 한 말은 내가 행정부 고위직만 아니었다면 의회 막내로서 열심히 일했을 거라는 말이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위에 황제 하나만 있는 지금도 끔찍한데, 수십 명의 선배를 모시는 입장에서 일하라고? 차라리 죽고 만다.
“하하, 옳은 말이오. 어디에서 일하든 결국 제국을 위함이지.”
내 대답에 의장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저 양반도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닐 테니.
“이런. 귀한 발걸음을 해 준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두었군.”
그 뒤로도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하던 의장은 민망하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더니, 직접 의사당 정문을 열어주었다.
의장이 맞이부터 안내까지 해주는 의사당 관람 서비스… 실로 귀한 서비스다.
***
현직 제국백인 의원 스물아홉. 의원 대리 하나. 대리인을 내세운 현직 제국백 하나.
총 서른한 명의 인원이 소회의실에 모여 논의를 시작했다.
“사실 지금까지 버텨온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서른, 고작 서른입니다. 최소치 서른이 아니라 최대치가 서른인 인원으로 300년이라는 세월을 버틴 겁니다.”
“당장 행정부만 해도 팀 하나에 서른인 곳이 수두룩합니다. 사법부도 규모가 큰 법원이면 의회를 가뿐히 능가하지요.”
“제국의회는 행정부를 견제하고 황명을 수호하는 기관입니다.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가 이리도 허술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의원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이미 어제 진행한 논의에서 정원 확충으로 의견을 잡아간 것도 있으나, 고작 서른으로 제국의회를 지탱하는 것은 의원들에게도 가혹한 일이었다.
허나 함부로 의원 확충을 제안하면 300년 전통을 무너뜨린다는 시선을 받게 되고, 동료 의원들의 권리와 권위를 누군가와 나누게 된다. 덕분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으나─
“의장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허허, 어쩔 수 없지요. 의장께서 처음으로 주장하신 건데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의원인 저희가 의장을 지지하지 않으면 누가 의장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내가 자진하여 선봉에 서자 너도나도 달라붙어 환호성을 내뱉었다.
딱 예상한 그대로 이루어진 결과여서 쓴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말끝마다 의장, 의장 타령을 하며 자신들의 책임을 줄이려는 건 참…
‘나였어도 그랬겠지만.’
물론 건드리기 곤란한 안건을 스스로 짊어진 사람이 나오면 그 위에 올라타는 것이 도리. 오히려 의원들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면 내가 당황했을 거다.
아무튼 의원 정원 확충 자체는 의원들의 공감을 형성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의원 자격 조건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제국백을 늘리는 건 논할 가치도 없고, 특정 작위만 가능하게 하기에는 후보군이 너무 많습니다.”
“공작과 후작은 합하여도 제국백보다 숫자가 적지만, 안 그래도 바쁘신 분들께 의원이라는 짐까지 얹어드릴 수는 없고요.”
새로운 의원 선정 기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단순히 특정 작위에게 의원직을 주기에는 문제가 되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숫자가 적은 공작과 후작? 이미 막강한 권위를 지닌 그들에게 의원의 권한까지 주는 건 위험하다. 그렇다고 백작과 자작, 남작을 후보군으로 삼아? 그들은 숫자가 너무 많아서 분쟁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의원직은 황제 폐하와 영원히 함께할 방패이자 수족이어야 한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귀족이어도 제국백 수준의 긍지와 의무감이 없다면 함부로 의원직을 줄 수 없다.
‘골치 아프군.’
소란스러워진 소회의실을 둘러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도 이러다가 흐지부지 마무리됐었지.
‘당신이 유일한 희망이요, 타일글레헨 백작.’
그렇기에 침묵을 지키는 타일글레헨 백작을 흘끗 쳐다봤다.
타일글레헨 백작이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의원들과 논쟁을 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휴가 중 끌려온 사람에게 그런 것까지 요구하는 건 양심이 없는 일이다.
다만 타일글레헨 백작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이 자리에서 있던 논의를 직접 보고 들었으니, 황제 폐하께 이 사태를 넌지시 흘릴 가능성이 높다. 누가 뭐래도 황제 폐하의 제일가는 심복인 타일글레헨 백작이니까.
‘그러면 폐하의 하명이 내려올 수 있다.’
의원들이 자신들의 권리 일부를 내려놓는 걸 각오하며 정원을 늘리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폐하께서는 의원들의 애국심과 충직함을 갸륵히 여겨 친히 이 일에 개입하실 수 있다.
제발, 제발 그래야만 한다. 아니라면 이번 논의는 몇 주가 지나도 끝나지 않아…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그날 밤.
[ 의장은 내일 점심 이후, 태양전으로 오라.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이 내려왔다.
믿고 있었다, 타일글레헨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