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54)
로판 속 공무원 654화(655/945)
논의가 끝나자마자 황궁으로 직행했다. 아니, 정확히는 끝났다는 말보다 결정을 보류했다는 말이 옳다. 결국 의원들은 새로운 의원 선정 기준을 정하지 못했으니까.
‘가기 싫다.’
덕분에 참담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다면 황제를 만날 수밖에 없다.
물론 황제는 나를 보면 예상치도 못한 업무를 꺼내서 주는 화수분 같은 새끼다. 괜히 빈손으로 찾아갔다가 양손 가득하게 돌아가는 대참사가 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논의는 황제의 결단이 없으면 절대 끝나지 않는 무기한 마라톤이다. 황제를 만나는 시간을 미룰수록 내 출근 날만 늘어나는 꼴이니, 차라리 업무 짬처리를 각오하며 황제와 대면하는 것이 이득이다.
“허어, 의원을 늘린다라.”
그리고 내 방문에 의아해하던 황제는 방문 사유를 듣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황실과 제국을 위해 자신들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보하겠다니. 제국백들의 충성심이 실로 갸륵하군.”
아무리 제국의회 의원들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제국 입법기관을 이루는 30인 중 하나라는 권위는 막강하다. 업무 강도와 비례하는 어마어마한 권리, 권한, 명예가 제국의회 의원들─ 즉 제국백들에게 있었다.
헌데 제국백들은 그것들을 포기했다. 30인 중 하나로 군림하는 것보다 제국의 체제 안정성을 택했다. 황제로서는 기꺼운 일일 수밖에 없다.
“상황께서도 재위 시절, 의원들의 고충을 알기에 의원의 정원을 늘리는 것을 고려하셨지. 하지만 의원직이 제국백들의 명예이자 자긍심인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 상황 폐하께서는 300년 동안 이어진 충성심을 차마 외면할 수 없으셨기에 제국백들의 명예를 건드리지 않으셨다네.”
“황실의 은혜와 관용에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기쁠 따름이지. 제국백들이 황실의 고심을 먼저 알아차려 스스로 의원을 늘리려고 하지 않나. 짐은 제국백들의 뜻을 기꺼이 지지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 황제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이 일을 의장이 아닌 장관이 말하는 건, 다소 의외로군.”
“의장과 의원들은 황제 폐하의 고민을 덜어드리기 위하여 의원의 자격을 논하는 중입니다. 아마 모든 논의가 끝나기 전까지는 폐하께 아뢰지 않을 것입니다.”
내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비유하면 아직 보고서가 작성 중이라는 말이었으니까.
“어디까지 진행되었나?”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며 충심으로 논의하는 중입니다.”
“시작도 못 했군.”
기껏 포장해서 말해줬지만 황제는 단호히 포장지를 풀어헤쳤다.
망할 놈. 아직 시작도 제대로 못한 건 사실이지만 너무 차가운 거 아니냐. 서른이 넘는 인원들이 어떻게든 합의점을 도출하려고 노력 중인데.
“허나 이해할 수 있네. 새로운 의원 자격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그래도 황제에게 티끌만큼의 인정은 존재하는지, 의원들의 열악한 상황을 이해하고 인정했다.
300년 동안 30명이던 정원을 갑작스레 늘리는 것이고, 최대한 잡음이 나오지 않을 기준을 선정하는 일이다. 쉽게 쉽게 진행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장관.”
“예, 폐하.”
“장관도 명예로운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제국백이지. 당사자로서 의견을 말해보게나.”
그 말에 심드렁히 황제를 쳐다봤다. 동생을 의원 대리로 부리고 있는데 잘도 의견이 나오겠다. 솔직히 의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른다고.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신의 부족한 지혜가 감히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것 같아 두렵사옵니다.”
딱히 말할 거 없다는 직설적인 말에 황제는 픽 웃음을 흘렸다.
“편히 말해보게. 짐과 장관의 사이가 아닌가. 어떤 말을 해도 짐의 심기는 굳건할 것이야.”
순간 쌍욕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참았다. 나랑 네 사이니까 더 말 못 하지, 망할 새끼가.
그러나 빡침과 별개로 황제가 저렇게까지 말했다면 아무 의견이나 말해야 한다. 황제의 권유를 두 번, 세 번 씹었다가는 어떤 빅엿이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
제국백이 아닌 새로운 의원 선정. 최대한 잡음이 없을만한 선정 조건…
‘그런 게 있나?’
어려운 문제다. 노련한 귀족 수십 명이 머리를 맞댔음에도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처럼, 이번 사안은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굳이 필수 조건을 고르자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넘치고, 의원이 되더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며, 기존 권력도 미미하여 의원직에 올라도 위협이 되지 않고, 다른 귀족들도 반발할 확률이 적은 인물.
실소가 절로 나온다. 대체 이런 인물을 어디서 구…
…
‘아.’
생각해 보니까 있다. 작위 귀족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제법 있어.
“폐하.”
“말해보게.”
“황실 직할령을 책임지는 충성스러운 지방관들과 도시의 시장들을 의원으로 삼는 건 어떻겠습니까?”
“호오.”
내 제안에 황제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반응을 보니 이 새끼, 예전부터 지방관과 시장들을 의회에 편입시키는 걸 생각했던 것 같다.제국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묵혀두고만 있었던 거지.
‘망할.’
이놈과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이 참담하기 그지없다.
자세한 건 내일 논하자는 황제의 명에 따라 다음날 점심, 다시 황궁에 방문했다.
“타일글레헨 백작?”
“아, 의장께서도 계셨군요.”
그리고 태양전에 위치한 황제의 집무실에 발을 들이자 먼저 와있던 의장이 반겨주었다.
설마 의장까지 바로 부를 줄은 몰랐는데. 오늘 안에 전부 처리할 생각인가?
‘상황이 급하긴 한가 보네.’
약간의 동정심을 담아 의장을 바라봤다.
다른 업무도 많은 황제가 하루 만에 의장을 불렀다? 의회의 인력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일들을 잠시 미뤄두더라도 의회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니.
“장관도 왔군. 어서 앉게.”
나와 의장이 짧게 인사를 나누자 상석에 있던 황제가 손짓을 했다.
“의장. 의회에서 짐이 모르는 사이에 큰 결단을 내렸다고 들었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야.”
그러고는 좌측에 앉아있던 의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당히 온화하고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과찬이십니다. 오히려 제국과 의회를 위하여 더 빨리 결단을 내렸어야 했는데, 소신들의 고집과 부족함으로 폐하께 누를 끼친 것 같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300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어찌 고집이고, 서른으로 의회를 지탱한 충신들을 어찌 무능하다 하겠는가.”
“황송하옵니다.”
의장의 대답에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 장관이 짐을 찾아왔었네. 같은 제국백이지만 의회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짐에게 의원들의 충정을 상세히 설명하더군.”
그러자 의장이 신뢰와 감사가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자신들의 고통을 황제에게 전해줘 고맙다는 것처럼.
“또한 의원들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방안도 말했었지.”
“예?”
“폐하?”
황제의 말에 나도 의장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의장은 내가 메신저 역할을 넘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줬다는 사실에 놀랐고, 나는 황제가 나를 팔아먹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혼란스럽다. 아무리 지방관과 시장 편입 얘기가 내 입에서 나왔다지만, 솔직히 그거 네가 먼저 생각한 안건이잖아. 나를 내세우는 건 양심 없는 거 아니냐.
‘망할 놈…’
이가 갈렸으나 겨우 참았다. 황제는 ‘황실이 직접 의원의 자격을 넓힌 것’이 아닌, ‘제국백 중 일부가 스스로 의견을 낸 것’으로 만들고 싶은 걸 테니까. 같은 안건이라도 누가 먼저 제안했느냐는 명분 쌓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작위 귀족이 아닌 황실의 지방관과 시장들을 의원으로 삼는다. 실로 획기적인 생각이지 않나?”
“그, 그렇사옵니다, 폐하. 의회에 갇혀 살던 저희들이라면 평생 떠올리지 못했을 방안입니다.”
빠르게 고개를 숙인 의장의 모습에 황제는 더욱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모든 지방관과 시장을 의원으로 삼을 생각은 없네. 300년의 충성을 바친 제국백들과 같은 장소에 둘 생각은 더더욱 없고.”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책상 쪽으로 다가가 서류 두 장을 집었다.
“읽어보게.”
그리고 나와 의장에게 한 장씩 건넸다.
[ 제국의회 의원 확충 및 양원화 방안. ]‘이게 뭔.’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서류라무심코 침을 삼키고 말았다.의원 확충이야 제국백들도 공감하는 바지만, 이 양원화는 대체 무슨 말인가.
[ 황실 직할령을 관리하는 지방관, 황제 직할 도시의 시장들 중에서 신임 제국의회 의원 100인을 선발한다. 이 선발 과정은 궁내성이 담당하며, 최종적으로 황제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 [ 제국백 30인으로 이루어진 기존 제국의회를 ‘귀족원’으로 칭하며, 신임 의원 100인은 ‘서민원’을 구성한다. 귀족원의 수장은 ‘총리’, 서민원의 수장은 ‘호민관’이라 칭한다.] [ 귀족원과 서민원은 제국의회 산하 기관이며, 제국의회 의장은 귀족원 총리가 겸임한다. ]허나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어갈수록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정신이 아찔해졌다.
의원을 늘리다 못해 의회를 하나 더 만들어버렸다.
***
어제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디레메인 지역의 업무를 처리하였다.
오늘도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디레메인을 순찰했다.
내일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디레메인의 비축 물자를 살필 예정이다.
언제나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보내며 하루하루 살아갔다. 황실의 은혜를 받는 지방관으로서 디레메인의 평화와 신민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기쁘고 보람찬 일이다. 분명 황제 폐하의 지방관으로서 영광스러운 일이다.
‘옛날 같지가 않구먼…’
허나 어느 순간부터 내 심장을 뜨겁게 태우던 불길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더 이상 과거의 열정을 일깨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금씩 늙어가는 육체를 부여잡으며 버텼다. 내가 은퇴를 하면 더 이상 소득이 없으니까. 영지를 가진 작위 귀족들과 달리, 나에게는 지방관으로서 받는 봉급과 약간의 농장이 전부였으니까.
자식들과 손주들이 부족함 없이 살아가려면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 귀족이 아닌 우리 가족이 살아가려면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로 변한 심장을 품에 안고 있었다.
[ 디레메인의 지방관, 알렌 뮈스터를 제국의회 소속 서민원의 의원으로 임명한다. ]갑자기 궁내성에서 황제 폐하의 명을 보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서민원?’
그 명을 보자마자 불충하게도 머리가 굳어버렸다.
서민원이 뭐지? 나름 제국 역사와 조직 체계에는 능통하다고 자부하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제국의회 의원?’
그리고 제국의회 소속이라는 건 뭐지? 그러면 나도 제국의회의 일원이라는 건가?
‘내가?’
성을 가지고 있지만… 귀족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내가?
자식에게 물려줄 거라고는 뮈스터라는 허울뿐인 성과 약간의 재산뿐인 내가?
“핫…”
어느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음속 잿더미를 버리고 새로운 심장을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