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55)
로판 속 공무원 655화(656/945)
충의와 헌신으로 가득한 제국백들의 제안을 황제가 기꺼이 수락함으로써 제국 정계가 요동쳤다.
300년. 개국부터 지금까지 300년 동안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던 의원 정원이 늘어났다. 오직 제국백만 역임이 가능했던 제국의원은 순식간에 100명이 추가되었고, 30명에 불과했던 의원은 130명으로 늘어났다. 자그마치 300%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300년이라는 세월 동안 군림한 제국백들의 명예와 권위를 위하여 제국의회는 반으로 쪼개졌다. 기존 의원들로 구성된 귀족원과 새로운 의원 100명으로 이루어진 서민원으로.
“서민원이 기존 제국의회 역할을 수행할 걸세. 30명이 하던 일을 100명이 진행한다면 더 수월하겠지.”
“귀족원의 의원들은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결단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황제의 말에 의례적인 찬양을 출력했으나, 사실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기기는 했다.
이번 소식을 들은 에리히는 서서히 초췌해지던 안색이 급격히 밝아졌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제도에서 데이트까지 즐길 정도였다. 당사자가 이리 반응할 정도면 확실히 이번 조치가 효과적이기는 한 모양이다.
물론 서민원이 기존 의회의 역할과 업무를 독점하면 귀족원이 순식간에 허수아비가 될 가능성이 높으나,
“그리고 귀족원에는 서민원이 발의한 법안을 기각할 권리, 행정부 견제 및 감독 행위를 지시할 권리, 서민원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조정을 요구할 권리를 줄 생각이야. 아무리 같은 의원이라도 작위 귀족이 일반 지방관이나 시장들보다 못해서야 되겠나.”
황제 또한 그 점을 염려하여 이런저런 칼과 방패를 귀족원에게 안겨주었다.
서민원이 법을 만들어도 귀족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폐기된다. 귀족원의 지시가 없다면 서민원은 행정부에 간섭조차 못한다. 귀족원의 명에 따라 움직여도 귀족원의 마음이 바뀌면 즉각 중단해야 한다.
요약하면 서민원이라는 사냥개와 귀족원이라는 주인이 생긴 것이다. 귀족원이 직접 하기 귀찮은 일은 전부 서민원에게 주고, 귀족원은 구경하다가 적당히 제어하면 된다.
“대신 귀족원의 의원들도 서민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걸세.”
“실로 합당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서민원은 제국의회 역할을 ‘같이’ 이행하는 것이지, 귀족원의 기존 업무가 모두 박탈된 것은 아니다. 귀족원은 여전히 법안 제정, 행정부 견제 등의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남의 일이지만 부럽다. 합법적으로 부릴 수 있는 하청이 생겼는데, 그 하청이 본청보다 3배는 크다?
‘황궁 방향으로 매일 절해도 부족하지.’
30명의 업무를 130명이 분담하게 됐고, 경험이 부족한 100명의 폭주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이 어마어마한 배려로 인해 기존 의원들의 부담은 급격히 줄었다고 볼 수 있다.
“참. 그러고 보니 장관.”
이제 에리히에게 짬을 때린 것을 덜 미안해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황제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의원 확충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많더군.”
“제국을 위한 위대하고도 영민하신 판단이었사온데, 누가 감히 폐하의 결단에 반발하는 것입니까?”
슬며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진지하게 되물었다.
이번 결단은 황제가 친히 내린 명령이긴 하지만, 제국백 전원의 의견을 종합하여 황제에게 제안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국백 전원에는 당연히 내 이름도 끼어있다.
‘감히.’
분노가 치솟았다. 휴가 중에 의회와 황궁을 번갈아가며 출근한 것도 서러운데,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하던 놈들이 불만을 표해? 그것도 내 이름이 당당히 올라간 제안을 두고?
이건 제국에 존재하는 수천만 아비를 향한 선전포고이자 감찰성 장관을 향한 도전이다. 명예로운 제국의회의 총의를 부정하는 무법주의자들이다.
‘나도 황제 지시에는 대놓고 반발 못하는데.’
마음속 분노의 씨앗은 점점 거대해졌다.
나조차도 황명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타협을 시도하지, 반발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내가 오죽하면 레온 왕국 원정도 출퇴근 형식이라는 기묘한 타협점을 만들어서 수행했겠냐고.
그래서인지 얼굴도 모르는 ‘이런저런 얘기’의 주인공들이 보고 싶어졌다. 얼굴 보면 딱 한 방만 하늘 베기 좀 날리자.
“아, 반발이라고 할 것은 아니네. 그저 전통이 변한 것에 대한 당혹감이나, 귀족원이라는 호칭에 대한 의문이었지.”
그 말에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다행히 본격적인 반발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변화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진통이었다.
“제국 귀족 중에서도 극소수인 제국백들의 모임이 귀족원이라는 게 이해할 수 없다던가? 어찌 그들이 귀족들을 대변할 수 있느냐는 말이 나왔어.”
게다가 의문을 품은 사유도 그럴듯했다.
그건 그렇지. 모든 작위에서 골고루 속한 게 아니라, 전부 제국백으로만 구성된 집단이면 귀족들의 대표라고 하기 애매하─
“이름만 귀족원이지, 결국 황제의 직속 봉신들이 모인 모임인데 말이야.”
“심려치 마소서.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제국백들이 부러워 작은 투정을 부린 것에 불과합니다.”
은근한 불쾌감이 섞인 황제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말처럼 귀족원은 결국 제국의회다. 황권이 바닥을 기던 순간에도 황실과 운명을 같이 한 제국백들을 위한 포상이자, 황제를 수호하는 방패 집단이다. 고작 이름이 바뀌었다고 그 성격조차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부 귀족들은 귀족원이라는 이름에 홀려 그것을 망각했다. 황제가 제국백들을 위해 내린 이권을, 황제를 지키는 최후의 방패를 탐냈다.
‘망할.’
위험했다. 하마터면 황권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황제 앞에서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같은 말을 꺼낼 뻔했어.
‘휴가가 길기는 했나?’
이윽고 자괴감을 몰려왔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황제가 불쾌해 할 것이라는 건 금방 유추할 수 있었다. 허나 그 당연한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건 방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2년 반 동안 감이 너무 죽었어.
물론 휴가를 조기에 끝내고 복귀할 생각은 없다. 미친놈도 아니고.
“작은 투정이라…”
내 말에 황제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장관의 말이 옳네. 귀족들은 황실과 제국을 위해 충성하며, 짐의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니까. 제국백들이 받는 총애를 부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폐하의 자비와 관용이 실로 대해와도 같습니다.”
“그래도 귀족원의 정원을 늘릴 생각은 없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잠시 눈을 감더니,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불안하다. 무슨 생각을 떠올렸기에 웃는 거야.
“장관.”
“예, 폐하.”
“오늘과 내일까지만 감찰성으로 출근해 주게. 가서 낮잠을 자든, 체스를 하든 상관없네. 딱 이틀만 시간을 써주면 장관을 이 일로 부르는 일은 없을 걸세.”
난데없는 출근 요청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 새끼야. 내가 아무리 실수할 뻔했어도 출근 요청은 선 넘었잖아. 심지어 진짜 실수한 게 아니라 미수에 그쳤다고.
“그 대가라고 하기는 민망하나, 근래 장관이 의회와 황궁을 방문한 기간도 고려하여… 넉넉하게 열흘 정도는 짐이 황태녀와 놀아주겠네.”
“…이틀이면 되는 겁니까?”
“물론.”
제법 탐스러운 대가가 눈앞에 아른거려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녀가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피네와 결혼한 직후다. 아직은 신혼의 오붓함을 조금 더 즐겨야 할 시기인데, 그런 시기에 황태녀가 방문하면 피네를 향한 관심을 분산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지난 보름 동안 여름 감기라는 희대의 변명을 앞세우며 황태녀를 부인들과 사용인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이제는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했는데, 황제가 책임지고 놀아준다면야…
‘나쁘지 않네.’
이틀을 대가로 열흘을 얻으면 남는 장사지.
***
근래 사교계는 귀족원과 서민원에 대한 이야기로 소란스러웠다.
당연한 일이다. 그 누가 의원이 늘어날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의원 증가로도 모자라 의회가 둘로 나뉠 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아무런 조짐 없이 터졌다. 모든 귀족들이─ 어쩌면 당사자인 제국백들마저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작위 귀족도 아닌 자들이 명예로운 의회에 발을 들이다니요. 영민하신 폐하시라면 다 뜻이 있으셨겠지만, 과분한 성은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위 귀족은커녕 귀족이라 하기도 애매한 자들입니다. 이번에 선정된 의원 다수는 기사작을 받은 자들이었고, 귀족 가문 출신도 계승권과 거리가 먼 자들이었습니다.”
“애초에 작위에 근접한 자들이 지방관이나 시장을 했겠습니까?”
아무튼 정계를 뒤흔든 소식 덕분에 귀족이 둘 이상만 모여도 새로운 의회, 새로운 의원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 광경을 보며 조용히 와인만 홀짝였다. 격한 의견 충돌, 혹은 큰 목소리가 나올만한 사안이라면 잠자코 구경이나 하는 게 편하다. 적어도 침묵을 지키면 손해를 볼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 역시 침묵을 지켜야 할 사안이다. 이미 선발된 의원, 갈라진 의회에 대해 논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나. 폐하께서 우리의 투덜거림을 듣고 뜻을 접으실 것도 아닌데.
‘의원이 늘어나든 말든.’
결정적으로 의원 확충은 나와 별 연관이 없는 해프닝이다. 애초에 제국의회는 황제 폐하의 충복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일반 귀족들은 감히 들어갈 틈조차 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 황실 직할령의 지방관이나 시장들이 들어간다? 솔직히 말하면 형제들이 나눠 먹던 이권을 사촌이나 육촌까지 먹게 조치를 취한 것이다. 외부인인 우리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아마 대다수의 귀족들도 그걸 알겠지만, 다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어 머리가 돌아버렸다. 저 귀족이라고 하기 애매한 것들도 의원인데 혹시, 귀족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혹시─ 같은 마음을 가져버렸다.
“귀족이라 하기 민망한 자들이 100명이나 의회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거 귀족원도 그 숫자를 맞추어 위엄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서민원에 각자 다른 신분의 관료들이 모였듯, 귀족원도 다양한 작위의 귀족이 모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
의원직을 향한 열망은 이해하지만 추하다. 어차피 안될 걸 자기들도 알면서 왜 저럴─
“다들 여기 계셨구려.”
‘음?’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베르겔 백작이 등장했다.
“오, 베르겔 백작.”
“어서 오십시오. 안 그래도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주 어울리는 친우이자 동업자의 등장에 다른 귀족들도 백작을 성대히 반겼다.
허나 백작의 표정은 창백했다. 은근 과시욕이 강하여 귀족들의 환대를 즐기는 사람이.
“백작? 왜 그러십니까?”
“혹 백작께서도 이번 일로 심기가 복잡한…”
“쉿!”
마치 발작하듯 튀어 오른 베르겔 백작은 급히 주변을 살피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찰성에 있는 제 친척에게 들은 말인데, 어제 감찰성 장관이 집무실로 향했다고 합니다.”
“예?”
“아니, 장관은 휴가 중 아니었습니까?”
의외의 정보에 너도 나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르겔 백작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분명 신혼 휴가 중인 장관이 갑작스레 출근을 했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니.
“게다가 단순히 출근만 한 것이 아닙니다. 집행부 간부들을 소집하였고, 아무도 대화를 들을 수 없게 철저히 통제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휴가 중인 장관의 출근, 구 감찰부 출신으로 이루어진 집행부 간부들의 소집, 철저히 진행된 정보 통제.
익숙하다. 상당히 익숙한 흐름이다.
“…그거, 애실론 가문을 감찰하기 전에 보였던 모습 아닙니까?”
“…예, 그때도 장관이 기습적으로 간부들을 소집하고… 아무도 모르게 작전을 짰다고…”
겨우 입을 열었던 귀족은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도로 닫았다.
황제 폐하의 결정에 의문과 불만, 아쉬움을 보이는 상황에서 감찰성 장관이 움직인다.
이 노골적이고 확실한 경고에 더 입을 놀릴 미치광이는 없다.
***
장관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 지루하여 집행부장과 집행차장을 불렀다. 할 거 없으면 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다행히 걔네도 할 일이 없었는지 순순히 오더라.
‘옛날 생각나네.’
장관 비서까지 포함하여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서 그런지, 예전 감찰부 시절 생각이 났다.
물론 썩 그립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