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56)
로판 속 공무원 656화(657/945)
황제의 요구대로 이틀 동안 감찰성까지 출근하는 수고를 들였다.
휴가 중 출근이니만큼 가서 낮잠을 자든 체스를 두든 상관없다고 했지만, 사람이 어떻게 직장에 가서 놀고만 있겠나. 그것도 다른 부하들이 전부 업무를 보는 상황에서.
그래서 나, 장관 비서, 집행부장, 집행차장─ 마지막으로 어떻게 알고 왔는지 자연스레 합류한 정보차장까지 모여 간단하게 한 잔 한 이후로는 조용히 업무만 봤다. 사실 업무라고 해봤자 장관 비서가 종합한 서류에 도장만 찍는 역할이었지만.
그렇게 이틀 동안 도장 찍는 기계가 되어 저택으로 돌아오니,
“왔느냐.”
“장인어른?”
무려 첫째 장인어른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예상치 못한 귀빈의 방문에 놀라고 말았다. 첫째 장인어른이 막둥이인 마르와 외손주인 페디를 끔찍이 사랑하는 건 제국 전체가 아는 일이나, 출가한 딸의 집에 수시로 방문하는 건 실례라며 최대한 발걸음을 자제하고 계셨다. 그저 마르가 스스로 오는 것만 애타게 기다리셨지.
그런 장인어른이 아무 언질도 없이 기습적으로 방문하셨다. 휴가 중인 사위에게 오라는 말도 없이, 공작이 직접.
“이제야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오시기 전에 연락을 주셨다면 더 서둘러 왔을 텐데, 괜히 장인어른을 기다리게 한 게 아닌지…”
덕분에 멍하니 장인어른을 보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예정에도 없던 출근 때문에 먼 길을 오신 장인어른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이 제국에 황제가 아닌 이상 공작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괜찮다. 네가 없어도 반겨줄 사람은 많았으니까.”
다행히 장인어른은 품에 안겨있던 페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덤덤히 답하셨다.
“딸과 외손주가 반겨주는데 사위 하나쯤이야 없어도 상관없지.”
“그 사위가 없었으면 외손주도 없었는데요…”
내 애처로운 반박에 장인어른은 그저 콧방귀만 뀌셨다.
조금 서러웠지만 괜찮다. 저 투박한 표현이 장인어른 나름의 친밀감이라는 걸 아니까.
“페디야. 이제 엄마한테 가서 놀고 있거라. 이 외할애비는 네 아빠하고 할 얘기가 있단다.”
“나두 가치 있으면 안대?”
아무튼 나를 대할 때와 180도 달라진 표정으로 페디를 내려놓은 장인어른은 페디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에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셨다.
“같이 있으면 심심할 거란다. 엄마랑 동생들하고 놀고 있으면 금방 갈 테니 기다리거라.”
“우웅!”
장인어른의 설득에 페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 저 너머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외할아버지의 말에 바로 고집을 꺾다니. 역시 우리 페디는 착한 아이야.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는군. 조만간 내 허리까지도 오겠어.”
그리고 흐뭇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장인어른의 모습에 무심코 장인어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조만간…?’
페디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건 동감하나, 2M에 이르는 장인어른의 허리까지 도달하려면 제법 긴 시간이 흘러야 할 거다. 못해도 1, 2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허나 굳이 그런 말을 꺼내서 장인어른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다.
“접견실로 가지. 페디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아, 예.”
한참이나 페디의 뒷모습을 보던 장인어른은 나보다 앞장서서 접견실로 향하셨다.
그러고 보니 그냥 접견실이나 마르의 방에 계셨으면 됐는데, 왜 복도에서 어슬렁거리셨던 거지?
‘페디랑 놀아주고 있던 건가?’
외손주를 품에 안고 저택 산책을 하며 놀아주는 외할아버지. 실로훈훈하고 정겨운 광경이지만, 그 외할아버지가 공작이라는 게 문제였다.
우리 저택 사용인들이 트릭시한테 익숙해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전부 울면서 혼절했을 거야.
자리에 앉자마자 장인어른은 바로 용건을 꺼내셨다.
“제국백들의 건의가 있었기에 의원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들었다.”
“미천하고 우둔한 자들의 청에 귀를 기울여주신 폐하의 자비에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장인어른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다. 황제가 의원 확충 및 서민원 설치 선언을 했을 때, 이번 조치는 제국백들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라며 열렬히 떠들었었다. 아무리 공작령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는 장인어른이어도 모를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사교계에서 술렁거리는 귀족들보다 먼저 소식을 접하셨을 수도 있다.
“300년 동안 열여섯 분의 황제를 거치며 이어진 전통이었다. 아무리 의원들의 청이 있었더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 폐하께서 실로 큰 결단을 내리셨어.”
그렇게 말한 장인어른은 팔짱을 끼더니 내 눈을 바라보셨다.
“헌데 너는 괜찮겠느냐?”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대리를 세우고 있다지만 제국백은 너다. 제국백들이 작위조차 얻지 못한 녀석들과 같은 위치에 섰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어. ”
“직책과 신분은 별개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직책이 같다고 신분마저 같아지면 모든 장관들은 고아겠지요.”
쥐뿔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인지라 장인어른은 픽 웃음을 흘리셨다.
행정부에는 이미 고아 출신이면서 장관까지 오른 전설적인 인물이 있으니까. 지방관이나 시장이 의원이 되는 걸 책잡으려면 구휼성 장관부터 몰아내야지.
“게다가 능력에 따른 승진이 크펠로펜의 자랑이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유능한 자가 대우받고, 보다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에이만카 대제께서 남기신 아름다운 뜻. 서민원 설치는 그 뜻을 실현한 것이다.”
내 첨언에 장인어른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크라시우스 가문도 바렌티 공작가도 초대 가주는 평민 출신이었다. 에이만카 대제가 제국을 세우던 시기, 공을 세워서 작위를 받은 벼락출세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300년의 전통을 쌓아서 누구도 벼락출세라 칭하지 않지만, 당시 크라시우스와 바렌티의 시조는 지금의 지방관, 시장보다도 못한 출신이었다. 그런 주제에 서민원을 불쾌하게 여기면 자기 조상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지.
“지금 같은 마음을 유지해라.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이요, 제국의 번영을 위한 디딤돌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훈훈한 격려와 조언이었지만 조금은 얼떨떨했다. 고작 이 얘기를 하려고 공작이 직접 행차했다고…?
“또한 너는 일개 제국백이 아닌 감찰성 장관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아.’
이어진 말에 납득했다.진짜 용무는 그거였구나.
서민원에 대한 반발보다 귀족원에 욕심을 부리는 귀족들을 경계하라는 말이었어.
“물론입니다.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미 황제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기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내 퇴직길에 낙인처럼 찍힌 흉한 직책을 절대 잊을 리가 없다.
***
막내 사위 녀석의 눈빛을 보니 굳이 제도까지 올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가족이라고 너무 걱정했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도한 걱정이었다. 고작 열아홉 살 때부터 감찰부장이 되어 당시 황태자였던 폐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고, 2황자파의 잔재를 거침없이 부수었던 녀석이다. 제국의 암덩어리였던 애실론 가문도 파괴하고 다시 창조했을 정도였지.
최근에야 아카데미 파견이니, 결혼이니 뭐니 하며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사정에 밀려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다. 업무 능력에 이상이 생겨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카데미 파견 기간 도중에는 북방으로 올라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독기가 가득하면 가득했지, 절대 순하고 온화할 상황은 아니다.
‘그동안 둥근 모습만 보긴 했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막내 사위가 된 순간부터 저 녀석도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사윗감으로 점찍었던 당시의 능력을 보지 않고, 막내 사위 개인의 성향이나 인품을 중점으로 보게 되었다. 부인에게 약하고, 자식과 함께 기어다니는 순박한 모습을 보았다.
“막내 매부를 보러 간다고요? 알아서 잘할 텐데 괜히 방해만 하는 거 아닙니까?”
문득 제도로 오기 전, 아들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막내 사위를 마르의 남편감으로 점찍은 나보다, 아들이 막내 사위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나도 늙기는 늙은 모양이야.
“어제 막내 매부가 감찰성에 출근을 했는데, 그 소문이 돌자마자 귀족들이 잠잠해졌습니다. 막내 매부를 어린 귀족으로 보는 건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아들 녀석의 잔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도는 기분이다.
그냥 그 녀석 말을 듣고 성에서 있을 걸 그랬다.
‘온 김에 마르나 보고 가야지.’
이미 막내 사위가 퇴근하기 전까지 긴 대화를 나눴지만 부녀간의 대화는 많을수록 좋은 법.
마르에게 부인이 만든 손수건도 전해주고, 페디에게 목말도 태워주자.
***
사흘 후, 100명의 서민원 의원이 전부 선정되어 발표되었다.
동시에 황제는 귀족원과 서민원의 공식적인 출범을 선언했다. 서민원이 사용할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기존 제국의회 의사당을 두 의회가 동시에 사용한다는 말과 함께.
덕분에 하청과 공존하는 본청, 한 지붕 두 가족이 되어버린 귀족원이었으나,
“어차피 의사당은 서른 명이 있기 넓었어. 솔직히 서민원 건물을 따로 지을 필요도 없을걸? 그냥 층마다 용도를 다르게 해도 충분한데.”
당사자인 에리히는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제국의회 의사당이 커도 오죽 컸어야지. 나름 행정부, 사법부, 군부와 함께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인지라 서른 명을 위한 공간치고는 너무 거대했다.
물론 그 서른 중에 보조 인원은 포함되지 않는다. 보조 인원도 포함하면 수백은 가뿐히 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의사당의 공간은 넉넉하다.
“그런데 형. 요즘 무슨 일 있어?”
“엉?”
난데없는 질문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흘 전에는 별일이 있기는 했으나 이제는 아니다. 더 이상 출근을 할 필요도 없고, 황태녀도 당분간 저택에 오지 않으니까. 지금쯤 황태녀는 황제가 열심히 놀아주고 있을 터.
“아니, 그게… 요즘 겨우 인사만 나눴던 귀족들이 집무실로 오거나 연락하는 경우가 늘어나서. 형 안부를 엄청 묻던데?”
“아, 그거?”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귀족들이 내 눈치를 살피기 위해 에리히한테 접근한 모양이다.
“표정이 평소보다 딱딱하다고만 전해. 그거면 충분할 거야.”
“가끔 고성도 내지른다고 할까?”
“그건 너무 나갔고.”
나름 정치적 눈치가 늘어난 에리히의 제안에 다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의원 확충은 제국 정계를 뒤흔들기 충분한 사태였으나, 다행히 얼마 후면 잠잠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