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57)
로판 속 공무원 657화(658/945)
귀족원과 서민원의 공식 출범이 발표되고 다시 사흘이 지났다.
즉, 황제가 황태녀와 놀아주기 시작한 지 6일이나 지난 것이다.
– 장관. 혹시 시간 좀 있는가?
그리고 6일차 점심, 황제는 초췌한 안색으로 연락을 걸었다.
그 애잔하고 기이한 광경에 움찔하고 말았다. 순간 새벽 감성에 취해서 전 애인에게 ‘자니?’ 라고 문자를 보내는 꽐라를 보는 기분이었으니까.
“황제 폐하의 자비와 은혜 덕에 가족들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허나 애잔함과 별개로 대답은 단호했다.
황제가 나에게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 건 높은 확률로 부려먹기 위해서다. 정황상 황태녀 제어에 실패하여 내가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겠지.
그래서 황제의 자비와 은혜를 들먹이며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내가 쉬고 있는 건, 네가 황태녀와 놀아주는 건 네가 먼저 꺼낸 제안이라고. 아무리 황제여도 줬다 뺏는 건 선을 넘는 짓이라고.
– 그거 참 다행인 일이로군…
황제도 그걸 알기에 별다른 대꾸 없이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누가 열흘이나 부르랬냐.’
사실 이틀 출근한 대가로 열흘이나 자유를 만끽하는 건 불공정 거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열흘은커녕 닷새 정도만 자유를 줘도 만족스러운 거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황제가 먼저 건 거래고, 나는 거래를 수락했다. 황제에게 부담이 크더라도 내가 조기에 거래를 종료할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황제는 자신이 한 말을 성공적으로 지키는 중이다. 놀 거리가 부족한 황궁에서 황태녀와 놀아주는 기염을 토했으니 어찌 감탄을 금하겠나. 만약 이 상황에서 황제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훌륭히 아비의 역할을 수행 중인 황제를 모욕하는 것이다.
‘힘내라.’
속으로 황제에게 진심 어린 응원과 격려를 보냈다.
사흘도 겨우 버틸 거란 내 예상을 깨고 6일이나 버텼으니 남은 4일도 훌륭히 이겨낼 거다. 황제라면 분명 이겨낼 수 있을 거야.
– 때부 목쏘리!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통신구 너머에서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때부! 때부!
이윽고 황제의 얼굴만 보이던 통신구에 앳된 얼굴이 빼꼼 튀어나왔다.
황태녀였다.
– 때부! 보고시퍼! 왜 나랑 안놀아져!?
“저, 전하?”
내 얼굴을 본 황태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상상도 못한 눈물 공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안 놀아주다니. 누가 들으면 아동 방치 부모로 오해할 만한 흉악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전하. 송구하오나 작은 사정이 생겨서, 전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며칠만 지나면 다시 전하와 함께할 수 있으니─”
– 시러! 때부! 때모! 뻬디! 동생! 멍멍이! 짝은애들! 보고시퍼!
일단 황태녀를 달래려고 했으나 당연하게도 통하지 않았다. 한 번 눈물을 보인 아이를 달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니까.
그보다 우리 저택에 황태녀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뒤에 있는 둘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기는 하지만.
“슬프게도 이 대부가 놀아드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폐하가 계시지 않습니까.”
– 압빠는 바빠서 만이 못놀아져!
– 크읍…
황태녀의 단호한 외침에 황제가 씁쓸히 숨을 들이켰다.
이해한다. 아무리 아비의 마음으로 놀아주려고 해도 황제는 황제다. 황제로서의 업무가 어디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황태녀가 우리 저택에서 노는 만큼 놀아주는 건 물리적으로 무리다.
난감하다. 황제의 은근한 부탁이야 무시하면 그만이나, 황태녀의 눈물과 서러움은 어떻게 달래야 하나.
– 나… 혹시 나쁜짓햇써? 그래서 때부… 못 만나?
그러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황태녀가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폭탄을 날려버렸다.
“아,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언제나 착한 아이셨습니다!”
– 그래! 우리 황태녀는 전혀 나쁘지 않아!
덕분에 나도 황제도 기겁해서 입을 열었다.
나쁜 짓을 해서 자기가 못 오는 거라 생각한다? 이 얼마나 듣기만 해도 가슴 아픈 말인가. 꼬꼬마인 아이가 할 말은 절대 아니다.
– 사실 대부가 우리 황태녀를 위해 몰래 찾아올 예정이었단다!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들키고 말았구나!
“예?”
그 와중에 황제는 자연스레 나를 팔아먹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찾아오기는 어딜 찾아와.
– 지인- 짜아…?
“들켜버렸군요. 사실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초콜릿도 준비 중이었습니다.”
허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희미한 기대감이 깃든 걸 보니, 차마 ‘지랄하지 마라 엠페러.’ 라는 쌍욕을 박을 수 없었다.
망할 놈. 비겁하게 황태녀를 인질로 잡는 게 어디 있어.
– 그, 그럼 동생들이랑 동물들도 볼수잇서?
“물론이지요. 전부 데려가겠습니다.”
– 와아!
겨우 웃음을 되찾은 황태녀는 양팔을 파닥이며 기뻐했다.
– 황태녀. 대부가 곧 올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 손도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지?
– 웅! 준비할께!
그 말과 함께 통신구에서 황태녀의 얼굴이 사라지더니, 오도도도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황태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 …장관.
“…예, 폐하.”
– 짐이 황태녀와 놀아주고 있었지만, 장관이 황태녀를 아끼는 마음이 거대하여 황궁에 올 줄은 몰랐네.
추잡한 변명이라 말없이 황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은 여전히 황태녀와 놀아주고 있으니, 자기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망할 놈.’
황제의 변명치고는 너무 눈물겨웠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괜히 잘못 반박하면 ‘아무튼 놀아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라는 말과 함께 황제와 황태녀가 나란히 저택에 올 것 같았으니까. 황제의 약속 중에는 자기가 놀아준다고만 했지, 어디서 놀아준다고는 명시하지 않았다.
‘망할 새끼…’
치가 떨리는 말장난이었지만 침묵을 지켰다.
이 또한 자식을 이기지 못한 아비의 모습에 불과하다.
결국 황제가 나를 팔아먹은 다음날부터 황태녀의 저택 방문이 재개되었다.
그래.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열흘은 너무 길었어. 닷새 동안 편히 놀았으니 이 정도로도 만족해야지.
“때부 집! 푹신해서 죠아!”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저택에 놀러 온 황태녀는 매트가 깔린 복도에 드러누우며 히히 웃었다.
조기 거래 종료에 착잡하다가도 황태녀가 웃는 걸 보면 마음이 풀렸다. 대녀가 대부를 이리도 좋아해 주는데 홀로 뚱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
“전하. 그렇게 계속 누워있으면 더럽─”
“이러면 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태녀의 몸이 두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한 15cm 정도.
“이전보다 높이 오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무려 5cm나 더 오른 경이로운 업적이라 박수가 절로 나왔다. 황태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비행 연습을 했기에 비행 고도가 높아진 걸 테니.
아니, 비행 고도가 높아지든 말든 볼 때마다 신기하기는 하다. cm 단위라지만 허공을 날아다니는 아이를 어디서 볼 수 있겠나.
“이대로 뻬디한테 갈래!”
내 박수에 어깨를 으쓱인 황태녀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복도 저 너머로 날아갔다.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플라잉 황태녀를 보고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
요즘 만나는 지인들마다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
지방관과 시장들 사이에서 제국의회 의원들이 선정되었는데, 위리디아가 여전히 황실 직할령이었으면 나도 의원이 되지 않았겠냐는 말을.
그때마다 그저 웃기만 했다. 나 같은 변방의 수석 지방관이 황제 폐하의 눈에 드느냐도 의문이나, 설령 의원이 되었더라도 지금처럼 풍요롭고 행복하게 지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의원직은 세습이 불가능하지.’
하지만 내가 받은 자작위는 세습이 가능하다. 심지어자작위에 포함된 영지까지 존재한다.
물론 황제 폐하의 선택을 받아 의회의 의원이 되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명예다. 일개 백작령의 자작과 제국의회의 의원은 차이가 극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수십 년 지방관 생활을 끝낼 예정이었던 내가, 평생을 일한 대가로 노후를 보낼 저택과 약간의 생활 자금만 마련했던 내가, 성은 가졌지만 귀족이라고 하기 민망했던 내가 작위 귀족이 되었다. 그것도 단승이 아닌 계승 작위를 얻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집사장이라는 직책을 내려준 주인을 만났다. 명예보다 값진 인연을 만난 것이다.
‘새로운 의원이 되었다면 100명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각하의 신뢰를 받는 키셀레 자작은 나 하나다.’
그렇기에 의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각하의 하나뿐인 키셀레 자작이요, 위리디아 백작령을 관리하는 집사장이라고. 백작 각하의 과분한 신임을 받아 중임을 맡은 자라고.
“이 녀석이 새로 태어난 녀석인가?”
“네. 이틀 전에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신임에 보답하기 위하여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자라고.
지금도 그렇다. 자연스레 위리디아로 흘러들어온 야생마들을 기존 말들과 교배시켜 우량 품종을 만들려는 계획. 비록 1, 2년 만에 이루어질 계획은 아니나, 한순간도 허투루 진행한 적은 없었다. 최대한 건강한 암말을 야생마들과 연결시켰고, 임신한 암말이 생기면 최고의 임신 환경을 조성했다.
그 덕분에 야생마와 기존 말들 사이에서 태어난 망아지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아직은 미약한 숫자지만 언젠가는 폭발적으로 불어날 것이다.
“벌써부터 싹수가 보이는구먼.”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한 눈빛으로 망아지를 바라봤다.
고작 이틀 전에 태어난 망아지다. 그럼에도 눈빛은 초롱초롱하고, 털도 매끈한 것이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살이 더 붙으면 힘차게 초원을 내달릴 녀석이다.
“언제나 노고가 많네, 아멜리아 양.”
“감사합니다. 다 집사장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내 격려에 아멜리아 양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역시 예의 바른 아이다. 이 교배 작업의 현장 실무자는 아멜리아 양이기에 건강한 망아지들이 태어나는 건 아멜리아 양의 능력이다. 그럼에도 의례적이나마 나에게 공을 돌리고 있다.
‘각하께서 눈여겨볼만하군.’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각하의 추천장을 들고 위리디아에 온 사회 초년생.
처음에는 병아리 같은 아이에게 이 중책을 맡겨도 되나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을 했던 과거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제 혼자 둘러볼 터이니 돌아가 보게. 올리비아 양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래도 집사장님을 두고 어떻게 저 혼자…”
“어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집사장님.”
이번에는 허리까지 숙인 아멜리아 양은 빠르게 물러났다. 동생이 기다린다는 말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 모양.
‘보기 드문 가족애야.’
볼 때마다 흐뭇하다. 부모를 어린 나이에 잃고 사실상 가장처럼 지내서 그런지, 동생에게 실로 각별한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두 자매가 나란히 성실하고 유능하다. 경험이 더 쌓인다면 위리디아의 기둥이 되기 충분하다.
‘무럭무럭 자라야 나도 마음 놓고 물러날 수 있겠지.’
만족감과 씁쓸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과분한 신임을 주신 각하의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 헌신해도 부족하다. 허나 하늘이 내려준 수명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지방관으로 지낸 나이기에, 애석하게도 집사장으로 지낼 수 있는 세월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니 부디 저 아이들이, 다른 신참 관료들이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응?’
그렇게 홀로 감상에 젖어있던 사이, 품속에 있던 통신구가 빛을 뿜었다.
“키셀레 자작입니─”
– 나다.
“가, 각하!”
백작 각하의 연락이었다.
–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하군. 혹시 바쁠 때 연락한 건가?
“아닙니다. 어떤 용무가 있든 각하의 명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작게 웃음을 흘린 백작님은 슬며시 턱을 매만지더니, 덤덤히 말을 이으셨다.
– 오랜만에 위리디아에 방문할 예정이라서 말이야. 가기 전에 미리 연락 좀 했다.
그 말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연회 준비부터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