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60)
로판 속 공무원 660화(661/945)
레온 왕국에서 파밍한 영지는 제법 많다.
나이어드 남작가를 백작가로 만들기 위하여 확보한 영지가 있고, 에리히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마련한 영지가 있으며, 부인들과 자식들을 위해 챙긴 영지도 있었으니까.그냥 제국과 레온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영지 중 상당수는 내 영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여러 영지들 사이에서도 단연 중심이 되는 영지는 세리클 백작령이다. 마침 위치도 절묘하게 중간이었고, 발전도도 파밍한 영지 중에서는 1, 2위를 다툴 수준이니 거점으로 삼기 좋더라.
그리고 알폰소는 세리클 백작령의 집사장 겸 유일한 자작이다. 사실상 레온 왕국에 있는 내 영지들을 총괄하는 대리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오랜만이군, 자작. 그간 잘 지냈나?”
그렇기에 레온에 위치한 영지들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확인하려면 우선적으로 알폰소부터 만나야 한다. 책임자를 건너 뛰고 현장을 살피는 건 서로 피곤한 짓이다.
“각하의 은혜로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알폰소의 우렁찬 대답에 픽 웃음을 흘렸다. 위리디아와 세리클은 국경을 사이에 둘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신기하게도 두 지역에서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다.
“다행이로군. 타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골골거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자작위가 제법 적성에 맞는 모양이야.”
“과, 과찬이십니다! 제가 각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찌 작위 귀족이 되었겠습니까! 그저 각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구구절절 충성 서약 수준의 다짐을 내뱉는 알폰소를 보니 절로 흐뭇해졌다.
역시 알폰소를 망명시킨 결정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이렇게 충성심 넘치는 인재가 영지를 관리하고 있으면 마음이 놓이지.
“그래.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그러면 충분히 은혜를 갚을 수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알폰소의 어깨를 토닥인 후, 집무실 상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알폰소는 내 전권 대리자나 다름없다. 덕분에 레온 왕국에 주둔 중인 제국군과 아르메인군도 알폰소에게는 협조적이라고 하니, 작위는 자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후작이나 공작에 준하는 위세를 떨칠 수 있다.
‘검소하네.’
그럼에도 알폰소의 집무실은 간단하고 투박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와 다양한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기에 넓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 화려함이나 사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각하를 모시기에는 누추한 곳이오나… 송구하옵게도 세리클 백작령 내에서는 이곳이 가장─”
“아, 괜찮다. 집무실이 화려하면 눈만 피곤하지. 난 이런 투박함도 마음에 들더군.”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는 알폰소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사실 알폰소가 사치를 부렸어도 터치할 생각은 없다. 권력을 가지면 누리고 싶고, 출세를 하면 돈을 쓰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게다가 알폰소는 쿼로노스 왕국의 개노답 상사들에게 시달리다가 작위를 얻었으니, 그간의 설움으로 인해 폭주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제국은 능력만 좋으면 약간의 부패는 눈감아주는 곳이기도 하고. 나 대신 여러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데 그깟 사치쯤이야.
‘그래도 이왕이면 유능하고 청렴한 사람이 좋지.’
허나 같은 값이라면 더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은 것도 사람의 마음. 둘 다 유능하다면 청렴한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물론 청렴한 수준을 넘어 궁상맞은 수준으로 퇴화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지만.
‘망명자 출신이라고 돈도 안 준다 오해하면 곤란하니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행히 알폰소가 귀족처럼 살고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내 눈치를 본다고 평민 언저리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난 이유도 모른 채 욕을 먹고 있었을 거다. 감찰성 장관 저 흉악한 놈이 아무리 망명자 출신이라도 귀족을 업신여긴다는 욕을.
“자작. 집무실은 화려할 필요가 없지만, 저택 정도는 웅장하게 꾸며라. 자작이 떵떵거리며 살아야 다른 사람들도 자작처럼 살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각하.”
내 제안에 알폰소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조만간 알폰소의 저택이 대규모로 확장됐다는 보고가 들려올 것 같았다.
“그리고 자작도 자리에 앉고. 대체 언제까지 서있으려고 그러나.”
이어지는 명령 아닌 명령에 알폰소도 머쓱한 듯 자리에 앉았다.
영지에 대한 보고를 듣다 보면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그동안 알폰소를 서있게 하는 건 가혹 행위나 다름없다.
셋째 장인어른에게 백작령, 에리히에게 후작령을 선물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관리는 여전히 알폰소가 맡고 있었다.
그야 근처 영지도 아닌 국경 바깥의 영지이지 않나. 처음에는 장인어른과 에리히도 믿을만한 사람을 대리인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시간과 노력이 너무 오래 소비되어 그냥 알폰소가 관리하기로 했다.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만 장인어른과 에리히에게 꼬박꼬박 보내고 있었지.
돈만 제대로 들어온다면 대리인이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나. 지갑만 가득 채워준다면 노예라도 상관없거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조만간 각하의 장인어른 되시는 분과 동생분께서 영지에 방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업무 책임자인 알폰소가 두 대영주의 방문을 촉구했다. 평온하던 마음이 절로 요동치게 되는 사안이다.
“무슨 사고라도 터졌나?”
“그건 아닙니다. 다만 영민들 입장에서는 영지의 주인은 물론 국적까지 변한 상황인데, 아직 영지의 주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황 아닙니까. 혹여나 영주가 자신들을 하찮게 여기는 건 아닌지, 영지를 다시 레온에 떠넘기지는 않을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를 원격 조종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레온 왕국으로 파견 갔을 때 파밍한 영지들을 직접 살펴봤다. 적어도 내 영민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본 상황이다. 굳이 불안에 떨 필요가 없다.
“다행히 각하와 가까운 분들이 영주라는 걸 알기에 영민들의 동요도 크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아직 불안감이 작을 때 얼굴을 보이는 것이 훗날 문제가 터지는 걸 방지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같습니다.’ 라며 은근히 의견을 표하던 알폰소도 점점 확신에 가득 찬 말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니, 각하께서 판단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금방 발언을 수습하며 한 발 물러났지만.
“그렇게 하지. 멀리 있는 나보다는 현장에 있는 자작의 판단이 옳을 테니까.”
그 모습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치를 살피는 알폰소가 강력히 주장한다면 그만한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기껏 책임자가 제안을 건넸는데 무시한다면 이곳까지 찾아와 브리핑을 듣는 의미도 없다.
게다가 영민들이 영지의 주인을 봐야 한다는 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이다. 우리 세쌍둥이도 조금만 더 자라면 세르베트 공작령으로 가야…
…
“각하?”
“미안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들이 아빠 품을 떠난다는 생각에 눈물이 터질 뻔했다.
비록 1년 중 일정 기간만 떠나는 것이지만, 솔직히 그것도 용납하기 싫었다. 아이들의 미래와 세르베트 공작령을 위해 겨우겨우 허락한 거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아, 예. 물론입니다.”
우울한 기분을 억누르며 통신구를 꺼냈다. 사위라는 놈이장인어른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은 무리지만, 당장 부를 수 있는 놈은 하나 있다.
어차피 서민원이 생겨서 여유도 많을 텐데 당장 오라고 하자.
– 형?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 없었는지, 통신구를 조작하자마자 에리히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 할 거 없지?”
– …조만간 일이 생길 것 같기는 한데…
“직감 좋네. 너 일 좀 하러 와라.”
어설프게 회피하려던 에리히를 그대로 잡아 올렸다.
건방진 놈. 어딜 동생 주제에 형의 부름을 피하려고.
***
일방적인 통보를 마친 형은 빠르게 연락을 끊었다.
‘이게 뭔.’
씁쓸히 통신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싶다. 하지만 텔레포트 마법사를 친히 의사당으로 보내준다고 하니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부름이다. 이걸 거절하면 형이 직접 잡으러 올 수도 있어.
‘무슨 일이지?’
그래서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켰지만, 머리로는 빠르게 최근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텔레포트 마법사를 부를 정도면 형이 제도 바깥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제도가 아니라 지방 쪽에… 내가 일을 할만한 곳이 있나? 물론 제국의회 의원이 간혹 지방 순찰을 도는 경우가 있기는 한데, 그건 형이 부를 일이 아니다. 의회에서 지시를 하는 거지.
‘…일단 가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짚이는 게 없어 터덜터덜 정문으로 이동했고,
“여긴 또 어디야?”
“당신 영지입니다, 후작 각하.”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와 함께 이동하자, 마치 비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린 형이 맞이해줬다.
그렇구나. 여기가 내 영지구나.
일방적으로 떠맡았던 그 짐 덩어리였어.
“표정이 왜 그러냐. 남들은 가지고 싶어도 못 가지는 후작령인데.”
“그럼 남들한테 주면 안 될까?”
“네가 미래 자식하고 합의 보고 오면 생각해 볼게.”
비겁하게 미래의 자식을 인질로 잡는 만행에 치를 떨고 말았다.
“잘 생각해라. 지금 영지를 포기하면 후작이 될 수 있던 애가 남작이 되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닌 애비가 후작위를 포기해서 남작으로─”
“알았으니까 일부터 하자. 나 출장 명목으로 나온 거라 빨리 돌아가야 돼.”
더욱 구체적으로 변하는 협박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자식에게 무거운 의무를 주기 싫다. 하지만 형의 말처럼 미래의 내 자식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다. 아무리 타국 작위라지만 후작이 될 수 있었는데 남작위를 물려받는다? 그 아이가 영원히 나를 원망할 수도 있다.
“그냥 말 타고 네 영지 한 바퀴 돌아. 적당히 손 좀 흔들어주고, 영민들하고 포옹도 하고.”
“…그거면 돼?”
“너한테 많은 걸 바랄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아.”
기쁜 말이지만 조금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