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61)
로판 속 공무원 661화(662/945)
얘도 막내라지만 나름 의원 생활을 해서 그런지, 그럭저럭 정치인의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크펠로펜 제국 만세! 멜르시나 후작 각하 만세!”
“새로운 후작께 에넨의 축복 있으라!”
“각하께서 나를 보셨어! 나를 천상으로 인도해 주실 거야!”
화려한 백마에 올라탄 채 손을 흔든 에리히는 나에게 보였던 불평이 거짓말이라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영민들의 환호를 반겼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영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대를 받는 젊은 후작. 마침 그 후작의 외모도 크라시우스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양호한 편이었으니, 실로 이상적인 영주의 모습이었다. 아마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서 유포하는 화가들도 몇몇 생길 거야.
“후작님!”
그렇게 위풍당당히 전진하던 에리히의 옆으로 꽃목걸이를 든 여아가 달려왔다.
당연하지만 미리 계획해 둔 퍼포먼스다. 조그맣고 순박한 평민 아이마저 새로운 영주를 반긴다. 이보다 보기 좋은 퍼포먼스가 어디 있겠나.
물론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영주, 그것도 후작이라는 고위 귀족의 행차에 평민이 난입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허나 아이가 건네준 꽃목걸이를 목에 건 에리히가 아이를 자신의 말에 태움으로써, 영민들의 이성은 완전히 마비됐다.
평민의 무례한 행동에도 꾸짖기는커녕 자비롭게 대처하는 영주. 레온 왕국 치하에서 고생했을 영민들에게 꿈만 같은 이야기니까.
“이 미숙한 영주가 무엇보다 훌륭하고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3년 동안 멜르시나 후작령의 세율은 기존 세율의 3분의 1로 낮추겠다!”
거기에 실질적인 선정까지 얹어진다면 더더욱 열광할 수밖에 없다. 세금 감면은 인정이지.
“와아아아아!”
“후작 각하 만세! 선하신 영주님 만세!”
“각하! 영원히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덕분에 바람잡이를 투입해서 이끌었던 이전의 환호와 달리, 이번에는 진심이 가득한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는데?”
“창피하니까 조용히 좀 해.”
그런 영민들의 모습에 슬쩍 입을 열자 에리히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바로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역시 얘도 정치인 루트를 밟아가는 것 같아 흐뭇했다. 남들이 보면 형제가 우애롭게 이야기하는 걸로 보일 거 아니야.
‘잘 적응한 것 같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히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년 반 정도가 지난 상황이다. 일개 아카데미 학생에서 제국의회 의원이 된 지도 1년 반이 흐른 것이다.
만약 에리히가 의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골골거린다면 교류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삼촌, 사촌들을 구해야 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래오래 맡겨야지.’
최소로 잡아도 페디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어쩌면 페디가 정식으로 타일글레헨 백작이 되기 전까지 쭉.
“멜르시나 후작 각하 만세!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 만세!”
“크라시우스 만세! 크펠로펜 제국 만세!”
“야. 나보다 네 이름이 먼저 불린다.”
“알았으니까 제발…”
어디 가서 들어보지 못했을 만세 소리에 에리히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지금은 부끄럽고 민망할 거다. 막 스물이 넘은 녀석이, 의회에서 막내로 지내는 녀석이 수많은 영민들의 환호를 받으면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이보다 짜릿한 경험은 겪을 수 없고, 그보다 무거운 짐을 느낄 수 없다. 자신만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일희일비한다는 걸 알면 결코 가볍게 행동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경지에 이르면 에리히는 내 동생 에리히가 아닌, 명실상부한 후작이 될 거다.
‘힘내라.’
어색한 손짓으로 꽃목걸이를 매만지는 에리히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열심히 해서 내가 원하는 경지까지 올라라. 네가 잘해야 내가 조금이라도 편해진다.
“에리히 크라시우스 오브 멜르시나 후작 각하 만세!”
뭐, 의원 일에도 제법 적응한 걸 보니 알아서 잘하겠지만.
승마 퍼레이드를 마친 후, 후작성에 복귀한 에리히는 영지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긍정적인 행동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퍼레이드만 끝나면 바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쳤었는데, 스스로 후작성에 남아 실무진의 얼굴과 이름을 익혔다. 한 번에 불과한 퍼레이드로 에리히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변한 것이다.
“그럼 집사장이나 시종장 같은 직책은 전부 공석인 건가?”
“맞습니다. 하지만 각 직책의 대리들이 그에 준하는 권한을 받았으니, 영지 운영에 지장이 가지는 않습니다.”
집사장 대리로 활약 중인 수석 집사의 말에 에리히는 턱을 매만졌다.
조금 기묘하기는 하다. 의원 대리인 영주와 집사장 대리인 수석 집사라. 어디서 이런 대리들만 모였을까.
“참고로 후작령 집사장은 보통 백작이다.”
그런 에리히에게 친절히 조언을 해주자 에리히의 몸이 흠칫 떨렸다.
집사장이 백작이라는 것은 영주인 에리히의 손으로 누군가에게 백작위를 하사할 수 있다는 뜻. 아직 후작의 정체성보다 남작의 정체성이 강한 에리히로서는 정신이 아득해질만한 사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고위 귀족으로 분류되는 백작조차 부하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공작과 후작이다. 그러니 후작의 권위와 위엄을 진정으로 느끼려면 백작의 보좌를 받아야 한다.
“당연히 급하게 정할 필요는 없어. 가문 대대로 너와 네 후손들을 보좌할 측근을 임명하는 거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해도 돼.”
“형은 그 자리에서 정했다고 들었─”
“그리고 후작령에는 백작위 말고도 남작위도 많으니 까먹지 말고.”
치사하게 팩트로 공격하려던 에리히의 말을 차단했다.
***
다시 제국의회로 복귀했다.
분명 의회에서 나갈 때는 귀찮음이 가득한 채로 나갔었지만, 돌아올 때는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무거웠다.
‘영지라.’
형의 일방적인 소환 때문에 가게 된 멜르시나 후작령. 내 소유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으나, 난데없이 받은 영지이기에 별다른 애착도 관심도 없었던 곳.
아니, 애초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영지에 애착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솔직히 형이 꼬박꼬박 세금이랍시고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존재도 잊었을 거야.
‘내 영지.’
그리고 처음으로 발을 디딘 영지는 내 마음을 순식간에 뒤흔들었다.
“후작 각하 만세! 선하신 영주님 만세!”
“각하! 영원히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정확히는 영민들의 환호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에게는 하디네르 남작령이라는 영지가 존재하나, 그곳은 타일글레헨 백작령에 속한 영지다. 이미 그곳의 영민들과 관료들에게 있어 나는 크라시우스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이전부터 익숙하고 친밀한 존재였다.
반면 멜르시나 후작령은 어떠한가. 나와 연이 있기는커녕 국적도 다른 지역이었다. 그런 곳의 영민들이 나를 자신들의 영주라고, 후작이라고 불러줬다. 정작 새로운 영주인 나는 영지를 잊고 있었음에도.
“너보고 영지 일에 집중하라는 건 아니야. 나도 영지들을 집사장한테 맡기고 있는데, 너한테만 뭐라고 하는 건 미친 짓이지.”
“그래도 네 영지라는 걸 알고 관심 정도는 가져 봐. 여차하면 영주님이 나서준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신들도 편해.”
“있지만 없는 것처럼. 언제든 나설 수 있지만 조용하게. 그거면 충분해.”
멜르시나 후작령을 떠나기 전, 형이 어깨를 토닥이며 해줬던 조언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영지를 방치 중인 사람이 말해서 그런가, 설득력이 상당했다.
‘관심 정도는 가지고… 있지만 없게…’
무심코 목에 걸고 있던 꽃목걸이를 매만졌다.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미리 포섭한 아이를 조금 허름하게 꾸민 채 연기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연기인 걸 알면서도 이 꽃목걸이가 각별하게 느껴졌다. 나를 향한 영민들의 희망처럼 느껴졌다.
“에리히. 안에 있어?”
그렇게 멍하니 꽃목걸이만 만지작거리는 사이,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방금 돌아왔어.”
“그럼 들어갈게.”
스르륵 열리는 문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갑작스러운 소환이라 누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나갔었구나. 어차피 영지에 간 거, 누나랑 세라하고 같이 갈 걸 그랬나?
‘곧 있으면 후작 부인이 되는 건데.’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후작인 걸 인지도 못 했는데 후작 부인이라.
“응? 웬 꽃?”
아무튼 문을 열고 들어온 누나는 내 목에 걸린 꽃목걸이를 보자마자 의문을 표했다.
확실히 시선을 많이 끄는 물건이긴 하지. 이상하게 벗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계속 걸고 있었지만.
“잠깐 영지에 다녀왔거든. 거기서 받았어.”
“하디네르에?”
“아니. 멜르시나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누나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영주가 영지에 간 걸로 놀라다니. 그동안 누나가 보기에도 내가 얼마나 멜르시나를 방치한 걸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반성하자.
***
– 죠오-카아아아아! 잘지내써!?
기습적으로 연락을 건 현명공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귀가 멀 것 같은 느낌에 슬며시 통신구를 멀리 떨어트렸다.
“예.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연락하기 전까지는.
– 히힣, 댜행이내~ 군데 죠카, 요줌 시간만치!?”
“…조만간 시간이 없어질 것 같기는 한데…”
– 우왕! 죠카 감좃타! 내가 죠카 부룰 생각이엇꺼든!
그 말에 침통히 눈을 감고 말았다.
업보라는 게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에리히를 소환했을 때랑 유사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어.
– 채근에 어어어어엄청 신기한거 찻앗꺼든? 죠카두 보러와! 진쨔 신기해!
마치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는데 보러 올래?’ 같은 말이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신기한 걸 찾았으면 그냥 혼자 신기해할 것이지, 애꿎은 나는 왜─
– 이거 투리카 재국시절 유물 가타!
“예?”
이어지는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트리카 제국?’
아펠스 시절 유물이 발견돼도 대륙이 뒤집힐 텐데, 그보다 이전인 트리카 시절 유물?
‘미친.’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게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