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65)
로판 속 공무원 665화(666/945)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아펠스황제를 보좌하여 제국을 이끌어나갔던 10인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 딜렌바흐 공작이 남긴 어록.
해당 어록의 진의로는 두 가지 가설이 존재했다. 하나는 군권을 쥔 장수들이 중앙의 허락 없이 폭주하는 걸 경계한 발언이라는 가설. 다른 하나는 아펠스 건국 초기, 폭발적인 확장 정책을 옹호하기 위한 발언이라는 가설이다.
제법 오랜 기간 논쟁의 여지가 있던 어록이었으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전자가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트리카 제국 말기에 있었던 군권을 쥔 장수들의 폭주와 이탈, 딜렌바흐 공작의 철저한 관료적 성향을 고려하면 전자일 수밖에 없다고 했지.
그래, 딜렌바흐 공작의 발언은 전자의 의미다. 지방 세력이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기는 한데…
‘지금만큼은 후자로 생각하고 싶군.’
요즘 들어 전쟁에 대한 욕망이 무럭무럭 샘솟고 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나는 제국을 기탱하는 기둥이요, 제국의 경제를 책임지는 공작이다. 내가 사사로운 욕망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제국은 물론 대륙이 요동친다.
게다가 제국은 상황 폐하 시절에 동부 왕국의 기강을 잡았고, 뒤이어 북방까지 정복하였다. 제국의 위엄을 대륙 위에 굳건히 세우고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 아름다운 성세를 내 손으로 흔들 수는 없다.
“각하! 제레노 왕국에서 다시 관세를 조율했습니다!”
전쟁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제레노 왕국에서 보야르 소속 선박의 입항 절차를 과도하게 꼬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얻는 잠깐의 이득보다, 평화로 얻는 장기적 순환 구조가 더욱 이득이다.
“제레노 왕국 측에서 제국 소속 상단의 입국 자격을 다시 논해야 할 것 같다며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찰나의 분노에 눈이 멀어 수십, 수백 년의 대계를 무너뜨릴 수는…
“가, 각하! 3번 항로에 제레노 왕국 함대가 진입했습니다! 최근 해상 몬스터가 발견되어 토벌 목적이라고─”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결국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질끈 깨물고 말았다.막 불을 붙인 시가가 반으로 갈라져 책상 위로 떨어졌고, 집무실에 있던 가신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건 안다. 여기서 제레노 욕을 해봤자 그 욕은 놈들에게 닿지 않는다. 나를 충성스럽게 보필하는 가신들만 압박할 뿐이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입지를 믿고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소국의 만행에 치가 떨렸다.
‘교황의 청이 아니었다면 짓밟혔을 것들이.’
과거 철혈공이 동부 왕국들을 제압하던 시기, 제레노 왕국도 제국의 지엄한 심판을 받을 뻔했다.
제레노 왕국은 제국과 육로로 이어져 있으며 해상 교역권을 두고 다투던 국가였다. 오히려 심판을 받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고, 당시 보야르 공작령의 함대도 언제든 출항할 준비를 마쳤었다.
허나 제레노 왕국 영토 내에는 신성교국이 존재했다. 신성교국이 전란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한 교황의 중재, 매년 제레노 왕국에게 막대한 헌금을 받는 교단의 난색으로 인해 제레노 정벌은 취소되었다. 그저 ‘자비로운 조약’ 체결로 심판이 마무리됐었지.
그날 이후로 제레노는 제국에게 완전히 머리를 숙였다. 제국에 경사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사신을 보냈으며, 일정 주기마다 막대한 물자를 바쳤다. 중앙에 계신 상황 폐하와 황제 폐하의 시선으로는 충성스러운 신하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는 이보다 개새끼가 없지만.’
입안에 남아있던 반쪽 시가를 뱉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레노는 제국 중앙에 납작 엎드린 대가로 나름의 자율권과 자위권을 얻었다. 보야르와 제레노의 역사 깊은 경쟁 관계에서 제국 중앙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는 부유한 해상 왕국조차 제국의 일개 공작령 선에서 조절된다는 조롱이었지만, 이 빌어먹을 제레노 놈들은 제국과 맺은 조약에서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 난동을 부렸다.
‘한 번 짓밟아야 하나?’
하루에 수십 번이나 드는 생각이 다시금 치솟았다. 그냥 함대 한 번 출항시켜서 포격 좀 날리고 와?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으로 그쳤다. 이 흉악한 새끼들은 공식적으로 제국의 자비로운 조약을 어긴 적이 없다. 황제 폐하께서도 제레노 왕국에 별다른 유감이 없으시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먼저 움직여봤자 중앙의 우려와 질타를 받을 터.
심지어 전쟁이 발발하면 그동안은 제레노의 항구를 이용할 수 없다. 중계항으로서 그보다 좋은 입지가 없는 영토가 봉인된다.
“놈들과 조약을 맺을 때 조계지라도 받아야 했어.”
“설마 교황의 중재로 살아남은 것들이 이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가신들이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사이, 아들 녀석만 입을 열어 내 말을 받아주었다.
맞는 말이다. 단두대에 목이 걸려 집행 직전까지 갔던 죄인이다. 그런 죄인을 살려주고 재산을 일부 압수했으면 충분하지, 집까지 압류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적다.
“제레노 남쪽에 무인도라도 발견되면 좋겠군.”
“그렇게만 되면 앞으로 매주 에넨께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
내 푸념에 아들 녀석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다른 가신들도 작게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나도 그렇게만 된다면 매달 오십일조는 긍정적으로 검토할 테니 당연한 반응인─
‘음?’
책상 위에 두었던 통신구가 빛을 내뿜었다.
누구지? 공작인 나에게 바로 연락이 오는 경우는 드문데.
“보야르 공작이오.”
– 아! 항금꽁! 나야!
그래도 걸려온 연락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받았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현명공?”
놀라운 일이다. 자기 영지에서 나가는 일이 극히 드물고, 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는 건 더더욱 드문 현명공이다. 그런 현명공이 나에게 먼저 연락을 걸어?
‘운석이라도 떨어졌나?’
순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체네스 공작령에 운석이 떨어졌으니 필요하면 사가라는 제안을 하려는 건가?
– 히힣! 갑짜기 연라캐서미아내! 마니 놀랏찌!?
“뭐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연락했겠지.”
– 마쟈! 물어보께 잇써서 열락햇써!
연신 웃음을 흘린 현명공은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켰다.
그 광경에 실소가 나왔다. 술을 마시는 것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으나, 제발 남하고 대화할 때는 자제했으면.
– 호옥-씨~ 레뷔아딴이라구 드러밧써!?
“음?”
그리고 이어지는 발언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아니. 처음 듣는 이름이오.”
공작으로 군림한 나조차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에.
조금은 신기했다. 2천 년 역사를 지닌 오시덴 가문의 후계자로서, 제국의 다섯 공작으로서, 열두 명이나 되는 부인들과 취향을 공유하는 남편으로서 온갖 정보를 습득한 나다. 그런 내가 처음 듣는 이름이 있다고? 여명 교단 성서의 구절조차 외운 내가?
– 구렝? 잘댓내! 챼네쓰로 와바! 여기 신기한거잇써!
“현명공. 갑자기 그리 일방적으로 부르면─”
– 죠카랑 듈째 죠카며누리도 있땅?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잖소. 최대한 빨리 가도록 하지.”
감찰성 장관과 마종공도 있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레노 따위보다 중요한 일이 체네스 공작령에서 터진 모양이다.
***
레비아탄의 등짝에서 발견한 문구에는 오시덴 가문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그것도 레비아탄 제조에 큰 공을 세웠으니, 레비아탄에게 부탁을 할 권리와 탑승할 권리를 하사한다는 어마어마한 내용과 함께.
‘온 세상이 오시덴이다.’
해석본을 다시 읽다가 실소를 흘렸다.
오시덴 가문은 대륙에 현존하는 모든 가문을 통틀어서 가장 역사가 긴 가문이다. 트리카 시절에 귀족이 되었으며, 아펠스 시절에는 후작가로 군림하였고, 크펠로펜 건국 시절에는 자신의 세력권과 함께 통째로 크펠로펜에 투항했다. 그 덕에 다섯 공작령 중에서 유독 보야르 공작령이 큰 것이다.
그러니 트리카 제국의 기록에 오시덴이 등장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설마 여기서도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빈손으로 오기는 민망해서 와인이나 몇 병 가져왔소. 특별히 오래 보관한 것들이니 맛은 좋을 거야.”
“우왕! 어서왕!”
“적어도 환영 인사는 술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현명공의 연락을 듣자마자 황금공이 바로 달려올 줄도 몰랐다.
“장관도 반갑군. 결혼식 이후로 처음인가?”
“예, 각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평소처럼 지내고 있지. 다소 귀찮은 일이 있기는 하나, 장관의 걱정을 받을 정도는 아니야.”
그렇게 말한 황금공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헌데 마종공께서도 여기 계시다 들었는데.”
“트릭시는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습니다. 아직 각하께서 오신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여─”
“그럼 용무부터 마치고 인사드리도록 하지.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는 걸 방해하면 쓰나.”
몹시 정중한 자세라 기분이 오묘했다. 분명 같은 사람을 대하는 건데 누구는 트릭시라 부르고, 누구는 둘째 조카며느리라 부르고, 누구는 존칭을 쓰고…
‘개족보.’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정점에 군림하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구나.
“현명공?”
“우응?”
황금공의 부름에 막 보야르 와인을 입에 물었던 현명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레비아탄이라는 걸 먼저 보고 싶네만.”
“죠아! 바로 가쟈!”
“예?”
현명공의 우렁찬 외침에 당황하고 말았다.
가다니, 어디로? 레비아탄한테? 우리 방금 전에 축객령 당해서 돌아온 건데?
“외숙모님. 레비아탄은 지금 다른 사람을 볼 기분이─”
“항굼공운 투뤼카의 쟌재나마찬가지자나! 래비아딴도 항금꽁울 보며 죠아할꺼야!”
“아니, 그─”
“가쟈아아!”
내 만류는 쥐뿔도 먹히지 않았다.
이러다 레비아탄의 하이드로펌프를 직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번에는 선박이 아니라 텔레포트로 이동했다. 레비아탄이 같은 자리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 왜 다시 온 것이냐…
실제로 레비아탄은 마법사가 지정한 좌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그저 무기력한 목소리로 우리의 방문을 꺼렸을 뿐.
‘목소리가 달라졌네.’
그 와중에 뒤틀린 기계음처럼 들렸던 레비아탄의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들렸다.
뭐지. 아까는 막 잠에서 깬 상태라 목소리가 잠겼던 건가?
– 너희는 조국을 잃은 자가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는…?
아무튼 지진이 온 것처럼 몸을 꿈틀거리던 레비아탄이 말을 멈췄다.
– …설마.
이윽고 희미한 기대감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으며,
– 그대! 하얀 머리의 인간이여! 이름이 무엇인가!
우리 중 유일한 백발인 황금공을 정확히 지목하였다.
“라프로스 오시덴 오브 보야르라고 하네만.”
– 오시덴!
땅을 기다 못해 바닥에 처박혔던 레비아탄의 기분이 급속도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 나는 기억한다! 로이가스를 보필하던 충성스러운 가문들을! 나를 비롯한 세 기둥을 만드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자들을!
레비아탄의 말에 황금공의 시선이 나와 현명공에게 향했다.
마치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하라는 듯한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