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74)
로판 속 공무원 674화(675/945)
육체에 털 대신 풀과 나무가 자란 덕분에 완전히 산이 되어버린 베히모스.
소지만 산, 산이지만 소라는 희대의 놀이터에 눈이 뒤집힌 아이들은 베히모스의 등에 올라타 뛰어놀기 바빴고, 베히모스는 자기 몸이 놀이터가 되었음에도 분노하기는커녕 온화한 얼굴로 아이들을 돌봐줬다.
– 조심하거라. 경사가 있으니 넘어지면 위험하다.
“웅! 조심할께!”
– 그래. 착한 아이로구나.
그렇게 말한 베히모스는 최대한 납작 엎드리며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게, 설령 넘어지더라도 덜 아프게 몸을 조정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 확실히 신 시절의 기억, 최소한 인간들에게 사살된 기억은 없는 것 같다. 그 기억이 남아 있다면 저렇게 온순하고 순박할 리가 없다.
물론 신이었던 시절에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걸 즐겼을 수 있다. 그 기억이 이어져 지금도 아이들을 반겨주는 걸 수 있다. 허나 인간의 손에 사살되고 부활당한 기억까지 있다면 결코 트리카에게 충성스러운 모습과 순박한 성격을 보일 수가 없다.
‘기억을 골라서 없앨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하지.’
신 시절의 기억과 사살된 기억이 전부 있거나, 혹은 전부 없거나. 무조건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베히모스의 모습을 보면 사실상 후자라고 보는 게 옳다.
‘직접 물어보는 게 최선이기는 한데.’
사실 혼자서 여러 가설의 가능성을 따지는 것보다는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것이 최선이다. 베히모스와 지즈에게 ‘혹시 태어나기 전 기억 있냐?’ 라고 물어보면 즉각 답이 돌아올 테니까.
다만 만약, 만약 그 질문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면? 사살된 기억을 잊고 지냈는데 나 때문에 기억이 되살아나서, 인간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면?
괜한 짓을 하는 꼴이다. 위험을 감수할 바에는 그냥 입 다물고 있자.
“엄청 푹씬거려! 넘어져도 안 아파!”
– 어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지 않느냐.
“그치만 안 아파!”
황태녀의 말에 베히모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풀과 꽃, 그 아래에 가죽, 또 그 아래에 살이 있는 베히모스다. 넘어져도 일반적인 지면에서 넘어지는 것보다 훨씬 물렁하고 푹신하겠지.
“안 아파! 안 아파!”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마리아도 베히모스의 몸에 푹 엎드리더니, 히히 웃으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 음머어어어?
“우우웅?”
– 음머어어어어~
“우웅!”
그 옆에는 황실 기사의 품에 안긴 알리나가 베히모스의 등에 있던 소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해지는 광경이다. 베히모스의 존재 덕분에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아이들이 좋은 친구들을 만났구나. 에넨께서 우리에게 내린 축복 같아.”
심지어 트릭시마저 흐뭇한 표정으로 베히모스와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실로 모두가 행복한 상황이다.
“응. 그러게.”
그 사이에서 오직 나만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베히모스가 에넨이 내린 축복 같은 게 아니라, 신이었던 자의 처참한 파편이라 생각하니 씁쓸함 심정을 지울 수 없었다.
미치겠다. 머리로는 나 혼자 고민해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아는데─ 눈앞에 비극의 당사자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잖아. 이성이 명령을 내려도 가슴이 따라 가지를 않는다.
‘차라리 아펠스 시절 작품이었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미친 생각이지만 정말 그렇다. 아펠스가 신이었던 존재를 죽이고 강제로 부활시킨 거라면 지금처럼 복잡한 심정은 아니었을 거다.
아펠스는 종족과 성별, 국적과 나이 등을 가리지 않은 미친놈들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피해자 셋 정도가 늘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왜 트리카일까. 어차피 트리카는 아펠스한테 망했으니까 아펠스가 했다고 칠까? 그게 마음 편할 것 같은데.
‘정신 차리자.’
점점 심연으로 흘러가는 이성을 부여잡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정도 지나면 이 감정도 옅어지겠지. 그때까지만 참─
– 왜 그러세요?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옆에서 배를 긁적이던 지즈가 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맹금류의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채운 경이로운 상황. 순간적으로 주먹을 휘두를 뻔했지만, 휘두르기 직전에 지즈라는 걸 깨닫고 진정할 수 있었다.
이게 초근접거리에서 보니까 위압감이 엄청나기는 하네. 이런 생물이 하늘에서 급속 강하를 하면 난리 나겠어.
“그냥. 애들이 잘 노는 걸 보니까 좋아서.”
– 좋은 얼굴이 아닌데요? 가족이랑 같이 있는 사람치고는 안색이 어두워요.
그 말에 지즈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언니와 떨어진 동생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늘을 나는 게 처음이라 그런가 보지. 승차감이 화려해서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다.”
– 에엑!
고심 끝에 내뱉은 농담 섞인 변명에 지즈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 제가 하늘을 얼마나! 완벽하게! 우아하게 나는데요! 언니도 저를 볼 때마다 나는 것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했다고요!
자랑이 아닌 말을 자연스레 하는 지즈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 나는 것밖에 모르는 바보라면 썩 좋은 말은 아니…
…?
“언니?”
– 아, 그러고 보니 얘기를 안 했죠? 저 이 몸으로 태어나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언니도 있어요!
과도한 정보 유입에 머리가 멍해졌다.
언니, 이 몸으로 태어나기 전, 언니, 이 몸으로 태어나기 전.
“태어나기 전의 기억이 있나?”
– 네! 이거 육체만 갈아 끼운 거지, 로이가스 황가가 우리 만들기 전의 기억은 다 있어요!
해맑은 대답이었지만 머리는 더욱 새하얘졌다.
아니, 그, 기억이 다 있다면, 인간의 손에 죽은 기억도 있다는 건데, 레비아탄과 베히모스가 그런 충성심을 보였다고?
‘인간의 손에 죽은 게 맞나?’
이윽고 근원적인 의문에 도달했다. 영원한 푸른 하늘이 ‘인간의 손에 죽었다’ 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거 전제부터가 틀렸던 건가? 하다못해 트리카가 주도해서 죽인 게 아니라 다른 세력이 잡은 건가?
혼란스럽다. 분명 의문을 풀었는데 더한 의문이 몰려왔다.
당장 영원한 푸른 하늘이 있는 엘프 주거 지구로 향하고 싶었으나, 아직 황태녀와 아이들은 고래를 보지 못했다. 여기서 지즈를 회항시키면 아이들의 원망과 눈물이 나에게 향할 터.
그렇기에 일단은 예정대로 레비아탄이 있는 보야르 앞바다로 향했다.
‘계십니까?’
어차피 나랑 영원한 푸른 하늘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하니까.
지즈가 보야르 앞바다로 이동해도 상관없다. 이동하는 사이에, 아이들이 레비아탄과 노는 사이에 지즈의 기억이 멀쩡한 것을 알려주면 된다. 그러면 영원한 푸른 하늘의 기운도 회복될 테고, 용무가 끝난 뒤에 엘프 주거 지구로 날아가면 충분하다.
– 이, 있어! 마침 나도 물어볼 거 있었어!
헌데 내가 말을 걸자마자 영원한 푸른 하늘은 평소보다 격한 반응을 보였다.
– 지즈, 지즈는 어때!?
마치 지즈에게 기억이 있다는 걸 알아챈 반응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즈와 같이 있는 나도 방금 알게 된 정보인데, 세계수에 박혀있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 어떻게 안 거지?
‘기억이 멀쩡합니다. 언니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 진짜였구나…!
허나 내 의문을 푸는 것보다 영원한 푸른 하늘을 달래는 것이 우선. 지즈의 기억이 온전함을 말해주자 눈물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저도 방금 막 안 건데.’
– 콘스탄티나가 알려줬어. 며칠 전에도 베히모스랑 얘기했다고…
납득했다. 세계수에 박혀있어서 알게 된 정보였다.
확실히 초목의 신인 콘스탄티나와 목축의 신인 베히모스는 나름 영역이 겹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이었던 시절부터 안면을 텄을 수도 있으니, 베히모스의 부활을 반겨주었을 확률도 적지 않다.
물론 남남인 콘스탄티나와 베히모스도 멀쩡히 알고 지내는데, 정작 자매인 둘이 서로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영원한 푸른 하늘은 오히려 남이 아니기에 접근하는 걸 두려워했던 거다. 기껏 접근했는데 기억을 잃은 동생이 반겨주면 억장이 무너질 테니.
– 다행이다, 지즈, 나를 기억하는구나…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동생의 기억은 멀쩡했다. 지난 세월은 내다 버린 세월이 되었으나 앞으로의 세월은 자매가 함께 보낼 수 있다.
‘곧 레비아탄이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저택으로 돌아갈 때는 텔레포트면 충분하니, 지즈가 자리를 비워도 지장이 없죠.’
– 저기, 그럼…
‘지즈를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외조모님께도 미리 말씀드릴 테니, 엘프들이 놀랄 일은 없을 겁니다.’
– 고마워…
살짝 훌쩍이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지만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가족과 재회하는 것.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못할 기쁨이니.
***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사도와 제사장들, 신물과 신전들이 박살 난 이후로 이렇게 심장이 요동치는 건 처음이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면 지즈가 온다. 내 주변에 있던 엘프들도 자리를 비우는 걸 보니, 명예 제사장이 엘프 장로에게 이야기도 전달한 모양이다.
– 설마 당신과 지즈가 지금까지 남남으로 지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먼저 말이라도 꺼낼 걸 그랬습니다.
콘스탄티나의 말에 붕붕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남의 잘못이 아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겁쟁이처럼 숨어있던 내 잘못이지.
– 아니야. 오히려 네 덕에 지즈가 멀쩡하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고마워.
– 제가 아니었어도 은인이 알려줬겠지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저야 고맙지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지금은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 …아.
– 오는군요.
이윽고 남동쪽에서부터 낯설었던, 이제는 무엇보다도 친숙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 어어어어어언- 니이이이이이이-!
지즈였다.
– 언니! 왜 이런 곳에 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이 목소리, 분명 지즈였다.
-언제 하늘의 신에서 나무의 신이 된 거야!
내가 아는 내 동생, 지즈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