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81)
로판 속 공무원 681화(682/945)
황자의 탄생 이후로 황태녀의 저택 방문 빈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황제의 얘기를 들어보니 황자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더라. 차마 막 태어난 아기를 저택까지 데리고 올 수는 없으니, 외출을 포기하고 황궁에서 노는 걸 택한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결단이다. 저택에는 페디를 비롯한 동생들, 티티와 성수들, 정령들이 상주 중이다. 심지어 황궁과 달리 복도 전체가 푹신한 매트리스로 덮여져 있으니, 우리 저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놀이터나 마찬가지다.
황태녀는 그런 대규모 놀이터에 오는 걸 포기한 것이다. 오직 동생을 구경하기 위해서.
“두 전하께서 벌써부터 각별한 모습을 보이시니 대부로서 기쁠 따름입니다.”
– 짐도 마찬가지일세. 황태녀가 어찌나 동생을 아끼던지. 연회 때 황자를 들었던 걸 잊지 못하고 지금도 들겠다며 난리야.
“이런. 그건 곤란한 일이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나도 황제도 웃음을 터뜨렸다.
신기한 일이다. 내가 황제와 대화하면서 이렇게 행복하고 포근한 적이 있던가. 업무 얘기가 아닌 아이 얘기를 하니 이렇게나 좋은 것을.
“참. 이제 눈은 온전히 뜨십니까?”
– 아직 무언가를 보는 건 무리지만, 눈 자체는 잘 뜨고 있다네. 리브노만의 아이답게 보랏빛으로 예쁜 눈이더군.
“황태녀 전하께서 더 기뻐하셨겠군요.”
– 너무 기뻐해서 문제야. 이러다 자는 황자를 깨우면서 눈을 보려는 건 아닐까 걱정일 정도지.
황제의 엄살에 픽 웃음을 흘렸다. 황태녀가 하고 싶은 건 꼭 하는 아이지만, 남을 울리면서까지 뜻을 이루는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강제로 잠에서 깬 동생이 빼액 울음을 터뜨리면 어쩔 줄 모르다가 같이 울 성격이지.
– 아무튼 지금은 황태녀가 황자에게 정신이 팔려 조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이 근질거릴 걸세. 그 아이가 조용히 황궁 안에만 지낼 성격은 아니니까.
“조만간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겠습니다.”
– 역시 장관밖에 없군. 고맙네.
먼저 황제가 원하는 답을 꺼내주자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황태녀의 황궁 생활로 인해 우리 아이들도 누나이자 언니인 황태녀를 찾고 있는 상황이다. 황제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어.
– 물론 당장 올 필요는 없네. 장관도 곧 새 아이를 볼 터인데, 부인과 아이가 안정을 되찾기 전까지는 저택에 있어야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만삭인 에리의 상태를 고려한 배려였기에 살며시고개를 숙였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황궁으로 갔다가 에리의 출산이 시작되면 급히 저택으로 복귀해야 하는데, 기껏 놀러 온 아이들과 다 같이 복귀할 수도, 아이들을 황제에게 떠맡긴 채 홀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그럴 바에는 에리의 출산이 끝나기 전까지 저택에만 머무는 것이 좋다.
– 무얼. 가장의 무게를 가장이 알아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겠나.
그 말에 잠시 황제의 얼굴을 훑어봤다.
딱히 빚을 지우기 위한 양보거나,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것 같지는 않다. 정말 순수한 호의에 가까운 발언이고 표정이었다. 저게 연기라면 난 평생 황제에게 굴려질 운명일 정도로.
미묘한 기분이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황제는 의도 없이 선량함을 보이는 성격이 아니다. 허나 황자의 탄생 이후로는 간헐적인 대가 없는 온화함을 선보이고 있다.
‘연회 때문에 그런가?’
생각해 보면 황태녀의 후계 구도를 굳건히 수호하겠다는 선언을 한 뒤, 나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가 더욱 유순해진 것 같기는 하다.
하긴, 자식에 대한 걱정을 해결해 줬는데도 막대하면 그게 더 미친놈이기는 하지. 황제는 양심이 없는 거지 지능이 없는 놈은 아니다.
–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그때까지 잘 지내게, 장관.
“예, 폐하. 황궁에서 뵈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빛을 잃은 통신구를 바라보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비록 여러 요인이 얽힌 것이지만 황자가 태어난 이후로 황제가 온화해졌다. 앞으로 황자의 생일이 되면 선물은 넉넉하게 챙겨줘야겠어.
황실의 평화와 내 멘탈을 지켜준 아이인데 그 정도 애정과 노력은 보여야지.
***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손발이 벌벌 떨렸다.
긴장된다. 살면서 이만큼 떤 적이 있었던가? 장관님이랑 결혼할 때도 이렇게 감정이 격해지지는 않았는데?
아니, 굳이 고르자면 장관님 앞에서 펑펑 울었을 때는 지금보다 감정이 격렬했지만… 그건 긴장과는 거리가 멀었고…
“언니?”
“어, 엉? 나 불렀어?”
리제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차 다 식겠어요.”
그 말에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네. 분명 김이 모락모락 나던 차였는데, 어느새 김이 옅어진 수준을 넘어 사라지기 시작했어.
“뜨거우면 먹기 힘들잖아! 일부러 식혀서 마시려고 했지!”
하지만 멍하니 있었다는 걸 들키면 리제가 걱정하겠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지근해진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맛없어.’
그리고 식어가며 향을 잃은 차가 다 그렇듯, 맛은 썩 좋지 못했다. 이럴 거면 그냥 물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리 언니.”
“응?”
“마법이 있으니까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하양이도 무사히 태어날 거고요.”
미소를 머금은 리제의 위로에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티 났어?”
“엄청요.”
“그랬구나…”
엄청… 티 났구나… 최대한 숨긴다고 숨긴 거였는데…
솔직히 창피하다. 내가 리제보다 오래 산 언니인데다 관료 경험도 풍부한 베테랑이잖아. 그런 베테랑이 동생 앞에서 표정 관리도 제대로 못하다니. 전직 1과장의 이름이 울겠어.
“저도 언니랑 같은 걱정을 했으니까 뻔히 보이더라고요.”
그런 민망함도 간파를 당했는지, 리제는 쿡쿡 웃음을 흘리며 내 잔에 다시 차를 따라줬다.
“적어도 아이를 낳아본 건 제가 언니보다 선배잖아요. 선배가 후배보다 못하면 곤란하죠.”
“나보다 어린 선배는 좀 그런데.”
“오라버니도 언니보다 선배 아닌가요?”
치사하게 반박하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너무해. 임산부는 작은 충격에도 예민한 가녀린 존재야. 그러니 조금 더 소중하게 대해줘. 내가 틀린 말을 해도 그냥 넘어가 주고!
하양이도 엄마랑 같은 생각인지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잖아! 얼마나 격하게 공감하는 중이면 이렇게 격렬한 발길질을 하겠어! 이게 다 엄마를 생각하는 우리 하양이의 마음이야!
너무 격렬해서 엄마 몸도 조금 아프다는 게 문제지만.
“처음 아이를 낳는 일이니 긴장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아니, 어쩌면 두 번째나 세 번째 겪어도 긴장되겠죠. 오라버니도 우리가 출산을 할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잖아요?”
내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지자 리제가 부드럽게 내 배를 쓰다듬어줬다. 마치 하양이를 달래주는 것처럼.
“하지만 그 긴장도, 고통도 잠깐이에요. 찰나의 순간만 넘기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찾아오죠.”
그렇게 말한 리제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낳은 아이가 몸을 뒤집을 때, 옹알이를 할 때, 기어다닐 때, 걸어 다닐 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가득 쌓이고 있어요. 자고 일어나면 내 아이가 얼마나 자라있을지 두근거려요.”
이윽고 내 손을 잡아줬다.
리제의 손, 생각보다 엄청 따뜻하구나. 평소에 오븐을 자주 만져서 그런가?
“언니도 조금만 지나면 그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손보다 따뜻한 건 마음씨였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절로 포근해지는 목소리기도 했고.
“게다가 저택에 오는 의료진들도 벌써 네 번이나 저희를 담당했어요. 심지어 세쌍둥이를 무사히 받은 경험도 있고요.”
“갑자기 엄청 믿음직스럽네.”
세쌍둥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건 리제의 말이 맞다. 세쌍둥이도 무사히 세상에 나왔고, 트릭시 언니도 멀쩡하잖아. 내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걸 알면 트릭시 언니가 비웃을 수도 있어.
“리제야.”
“네, 언니.”
“내가 좋아하는 거지만 요즘 못 먹는 게 있는데, 선물로 하나 만들어줄게!”
“네?”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리제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지금은 꼭 주고 싶다. 평소에는 근처에만 가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솟구쳐 참고 있지만, 리제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으니까!
“빨-간 와인이랑 하얀 와인을 섞으면! 리제의 머리처럼 예쁜 분홍색 와인 완성!”
“…섞는다고요?”
“응! 이거 엄청 맛있어!”
예전에 장관님한테도 줬던 비장의 술이야! 기뻐해도 좋아!
엄마의 마음이 편해진 덕분에 하양이도 편해진 것 같았다.
“으그으으으윽!”
리제에게 특제 혼합 와인을 만들어주고 얼마 후, 하양이가 세상에 나오기 위하여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 하양이… 엄마가 일하는 도중에는 가만히 있었구나… 고마워…
벌써부터 엄마를 생각해 주는 정말 고마운 아이지만, 아주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왜 이런 곳에서 나오는 거야…!”
마법의 힘을 빌려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으니까. 부끄럽게도 엄마 품에 안기려는 하양이가 조금 미울 정도로.
“여기로 넣으셨으니 당연히 여기로 나오죠!”
“그건 그렇지마아아안…!”
그 와중에 산파 중 한 명이 내 투정을 완벽한 논리로 받아쳤다.
다들 너무해! 이럴 때는 공감 좀 해달라고!
***
문 너머에서 들리는 에리의 비명 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어느덧 다섯 번째 출산.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늘 그렇듯, 이번에도 익숙함 대신 초조함과 불안감이 가슴을 옭아맸다.
환장할 것 같다. 이 순간만 이기면 어떤 행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오지만, 이 찰나의 순간이 너무 고통스럽고 원망스럽다.
“이번에도 괜찮겠지?”
그래도 네 번의 출산, 여섯 명의 아이를 본 경험이 아예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제는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긍정적인 생각도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으니까.
“물론이죠. 복자의 자식이 태어나는데 에넨께서 지켜보고 계실걸요?”
마르의 위로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신의 총애를 받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점이다. 마르의 말처럼 내가 에넨의 복자라면, 에넨의 주시를 받고 있다면 내 피를 물려받은 하양이도 에넨의 가호 속에서 무사히 태어날 터.
“그런데 칼.”
“응?”
“언니를 걱정하는 건 좋지만, 지금은 언니보다 후작 각하를 걱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 말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창백한 안색으로 다리를 떠는 다섯 번째 장인어른이 보였다.
확실히 내가 여유가 있는 만큼 장인어른을 다독이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