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85)
로판 속 공무원 685화(686/945)
제국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유벤 연합왕국으로 귀국한 지 어언 2년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그 2년 동안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내가 유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고 제국까지 유학을 간 이유는 형님의 굳건한 후계 구도를 위해서지 않았나. 본국이 아닌 제국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3년 동안 내 입지와 존재감은 많이 흐릿해졌지만, 그 대가로 제국의 황족, 아르메인의 왕자, 차기 성자, 대륙 제일 검 같은 인맥을 얻게 되었다.
국내 인맥은 궤멸했지만 국외로 넘어가면 어마어마한 인맥이 넘치는 기묘한 인물. 그런 내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면 외세를 등에 업고 왕위에 도전하는 왕자처럼 보일 수 있다.
그건 곤란한 일이다. 그런 시선과 의심을 받으면 제국에서 보낸 3년이 쓰레기로 변모한다.
‘의미 없는 3년은 아니었지만.’
손에 든 퀸을 매만지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 입학을 결정했을 때만 해도 제국 아카데미는 나 스스로를 가두는 유배지였다. 딱히 제국 아카데미에서 무언가 이루겠다는 의지도, 제국에서 유벤의 위엄을 보이겠다는 의욕도 없었다.
헌데 누가 알았을까. 하필 내가 입학을 결정한 그 해에, 황자와 왕자와 차기 성자가 우르르 입학할 줄은. 그 녀석들과 같은 동아리에 속해서 3년 동안 친우로 지낼 줄은.
‘재밌기는 했지.’
솔직히 뭐 이런 것들만 모였나 싶을 정도로 특이한 것들이었으나, 동시에 나 또한 ‘이런 것들’ 중 하나였다. 비슷한 동지들끼리 모이니 즐겁기는 했다.
제국 아카데미를 유배지가 아닌 사교의 장으로 여기게 될 만큼.
“저하?”
“아, 미안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연신 퀸을 만지작거리다가 맞은편에 앉은 레이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실수했다. 진심을 다해야 하는 체스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이러면 류티스, 그 흉악한 놈과 다를 바 없이 무례한 행동이지 않나.
“괜찮으십니까? 아직 마음이 불편하시면 오늘은 쉬셔도…”
“괜찮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레이첼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퀸을 내려놓았다.
염려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정말 괜찮다. 며칠 전에 류티스에게 원격으로 패배한 충격이 큰 건 사실이나, 지금은 아카데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것에 불과하니까.
“반가운 친우를 봐서 마음이 들떴을 뿐이다.”
“아.”
솔직하게 말해주자 레이첼도 납득한 듯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저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친우를 보게 된다면 감정이 격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비숍을 이동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은 나와 달리 1년 늦게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렇기에 3학년 일정은 나 없이 보냈고, 가까이서 모셔야 할 왕자가 없기에 평온한 아카데미 생활을 보냈다고 들었다.
마음 편히 보낸 학창 생활과 진정으로 사귄 친우. 졸업과 함께 그 아름다운 추억을 뒤로하고 귀국한 레이첼이니,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터.
“이왕 유학을 간 김에 보조 교사의 길을 택하지 그랬나. 네 친우도 그 길을 택했다고 들었는데.”
“왕자 저하께서 조국으로 돌아가셨는데, 어찌 저 홀로 제국에 남겠습니까.”
넌지시 던진 말에 레이첼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나 때문에 유벤이 아닌 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나 때문에 제국에서 사귄 친구가 아닌 귀국을 택했다. 레이첼의 인생에서 내가 차지한 지분이 너무나 크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노력해야겠군.”
그 말에 체스판을 내려다보던 레이첼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더니,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미 저하의 친구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친구가 아닌 다른 관계로 지낼 테니 하는 말이야.”
그제야 레이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
“저하 나름대로 낭만을 담아하신 말씀 같은데, 목소리가 차가우시니 영…”
자연스레 날아오는 구박에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감히 왕족의 말에 토를 단 것이지만 노엽지는 않았다. 오히려 레이첼 나름의 수줍은 표현이라고 생각하니 귀여울 따름.
게다가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발전할 거라고는 나도, 레이첼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약간의 반발을 보이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결혼이라.’
이번에는 나이트를 잡으며 턱을 매만졌다.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 어느덧 스물의 나이가 되자 부왕 전하의 압박이 거세졌다. 성인은 진즉에 되었고 아카데미도 졸업했으니 짝을 만드는 게 옳지 않냐는 압박을.
안 그래도 내가 형님의 후계 구도를 위해 제국에 간 것을 안타깝게 여긴 부왕 전하다. 내가 왕족으로서 희생했으니 사람으로서는 좋은 짝을 만나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주는 것. 아마 부왕 전하의 목표이자 다짐일 것이다.
감사한 배려지만 부담이기도 했다. 딱히 결혼에 생각이 없기도 했고, 왕자의 결혼은 필연적으로 주목을 받는다. 못해도 몇 년 동안은 숨만 쉬고 있어야 귀족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버텼지.’
아직은 혼자 지내고 싶다. 제국에서 지내던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다. 제국 생활을 완전히 벗어내고 다시 유벤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만날 생각이 없다 등. 온갖 명분을 들먹이며 결혼을 연기하고 연기하고 연기했다.
그러다 레이첼이 귀국했다. 내 소꿉친구이자 놀이친구. 내 친구 중 유일하게 같은 국적인 친구인 레이첼이.
왕자와 결혼하더라도 누구도 견제하지 않을 평범한 가문 출신인 레이첼이.
“레이첼.”
“전하. 1년 만에 다시 뵙게 되니 반갑기 그지 없─”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직설적인 말이었지만, 귀국한 레이첼을 보니 그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짝이 생긴다면 레이첼밖에 없다. 나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고, 내가 형님을 위해 죽은 듯이 지낸다는 걸 이해하며, 가문의 위세도 형님의 세자 자리를 위협할 정도가 아니다. 실로 하늘이 내린 조건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오직 조건만 보고 레이첼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철저히 조건만 따진다면 더 안전한 가문이, 더 순종적인 여식이 있을 테니까.
“나는 네가 내 유일한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수십 년을 살아가도 네가 아닌 다른 사람과 나아가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어.”
그럼에도 레이첼을 택했다. 나 홀로 1년 동안 고민한 끝에, 내 미래를 상상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내가 평생 혼자 살다 죽을지언정, 레이첼이 아닌 다른 사람과 나란히 있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고. 비록 루이제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찰나를 제외하면 언제나 내 곁에는 레이첼이 있었다고.
“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라면 나와 평생을 함께해다오.”
그런 확신을 가졌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레이첼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을 했었다.
“전하. 전 아직 짐도 못 풀었는데, 얼음 마법을 단련하시다가 마음도 얼어버리신 겁니까?”
애석하게도 너무 급한 고백이었기에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었으나 아무튼 결과는 좋았다. 부왕 전하께서도 1년이나 버틴 내가 스스로 짝을 찾아와서 기뻐하셨을 정도니까.
“내 세라는 너인 것 같군.”
– 그럼 조만간 레이첼 오스티아가 될 수도 있겠군요.
그러다 문득 아카데미 재학 시절, 에리히에게 세라와 호르펠트 백작이라는 짝이 생긴 걸 보고 레이첼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무리 내가 왕실의 안정을 위해 연애를 지양하고 있다지만, 그럭저럭 눈치와 지능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연애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 적어도 제과 동아리 내에서는 평균 이상이라고 자부했다.
헌데 에리히가 둘이나 짝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괴감이 든 나를 레이첼이 위로해 줬고, 지금 생각해도 낯 뜨거운 대화가 오고 갔었다.
“레이첼.”
“예, 저하.”
“역시 내 세라는 네가 맞았다.”
그 말에 레이첼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나 혼자 기억하던 대화는 아닌 것 같았다.
“저하.”
“그래.”
“저도 제가 오스티아로 죽는 게 아니라면, 평생 소르타로 살았을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독신으로 살았을 거라는 말이니.
신성교국 순례단은 내일부터 유벤 연합왕국에 위치한 성지와 교회들을 순례할 예정이다.
즉 오늘이 지나면 순례단이 출국하기 전까지는 타니안과 만날 수 없다는 뜻. 그래서인지 타니안은 포도주와 함께 내 방을 찾아왔다.
“순례 준비로 바쁠 텐데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건가?”
“분주하니 제가 사라져야지요. 준비는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이 하시는데, 제가 멀뚱히 앉아있으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차기 성자가 옆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것도, 도와준답시고 같이 짐을 옮기는 것도 끔찍한 일이다. 차라리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서로에게 이로운 일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본 친우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있는데, 술 한 잔 기울이지 못하면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게 말한 타니안은 병을 붙잡고 작게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설마 저거, 포도주에 축복을 내리는 건가?
‘과분한 걸 마시는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차기 성자의 축복을 받은 포도주라. 부왕 전하께서도 쉽게 드시지 못할 물건이지 않나.
“축하드립니다. 아인테르 형제님과 에리히 형제님의 결혼이 코앞인 상황에서 라테르 형제님도 가정을 꾸릴 예정이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류티스는?”
“조짐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아직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흡족한 말이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놈이라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이겼군.’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승리감이 솟구쳤다. 딱히 결혼 시기로 경쟁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 녀석보다 인간의 행복을 먼저 느꼈다.
아니, 어쩌면 이건 류티스에게 승리한 것이 아니라 동아리 전체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정략이나 상대의 고백으로 약혼이 이루어진 아인테르, 에리히와 달리─ 나는 내 손으로 내 짝을 만들었다.
부왕 전하의 압박으로 정혼자를 정한 것이 아니고, 레이첼이 먼저 고백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어디까지나 내 의지와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않나.
‘역시 세상을 바꾸는 지성은 마법사다.’
검을 들고 설치는 것들보다 우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