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86)
로판 속 공무원 686화(687/945)
에리히의 가치는 일개 귀족이나 의원 대리 수준을 넘어섰다.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카데미 재학 3년 동안 국가를 초월한 인맥을 구축했으니까.
그리고 그 인맥과 여전히 소통이 유지되고 있다? 이는 에리히가 대륙 단위에서 노는 어마어마한 정보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라테르도 조만간 결혼한다는데?
“…뭐?”
실제로 에리히는 제국 사교계는 물론 외무성에서도 모르던 정보를 덤덤하게 내뱉었다.
라테르가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조만간이라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아무리 늦어도 내년에는 이루어진다는 뜻이잖아.
‘갑자기?’
당혹스럽다. 라테르는 유벤 연합왕국의 둘뿐인 왕자 중 하나다. 비록 왕세자는 아니지만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그렇기에 라테르가 결혼할 예정이라면 대대적인 정혼자 선별, 화려한 광고, 성대한 결혼식 준비가 이루어지는 게 맞는데, 제국을 비롯한 대륙의 국가들은 유벤 연합왕국의 이변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셋 중 하나겠지. 에리히가 착각했거나, 유벤이 작정하고 은폐 중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결혼식을 소규모로 진행할 예정이거나.
– 나도 믿기 어렵기는 한데, 얼마 전에 타니안한테 들은 거야.
하지만 에리히의 추가 증언으로 인해 첫 번째 가능성은 사라졌다.
타니안이 아카데미에서 보인 행태와 별개로 차기 성자의 발언만큼 신뢰도 높은 발언은 없다. 게다가 신성교국의 순례단도 유벤에 입국했다고 하니, 라테르에게 직접 결혼 소식을 들었을 터.
‘고의로 은폐하는 건 아니네.’
이윽고 두 번째 가능성도 머리에서 지웠다. 라테르의 결혼식을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하는 거라면 타니안도 알 수 없을 거고, 애초에 그렇게 비밀을 유지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비밀 유지 비용이 결혼식 비용보다 많이 나오겠어.
즉 라테르는 소규모 결혼식을 원하고 있다는 뜻인데…
“상대는?”
– 레이첼이라고, 라테르보다 한 살 어린 귀족. 형도 아카데미에서 몇 번 봤을걸?
“아, 레이첼.”
아카데미에서 봤다는 말에 금방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레이첼 소르타. 유벤 연합왕국의 귀족이자 라테르의 1살 연하 소꿉친구. 딱히 개인의 능력이 압도적이거나 가문의 권위가 드높은 것은 아니지만, 라테르를 보필하기 위해 타국까지 날아온 충신이자 절친.
그렇군. 걔가 라테르의 결혼 상대구나.
“정략은 아닌 모양이네.”
덕분에 바로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둘이 결혼을 한다면 정략보다는 서로의 의지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귀족의 정략혼은 어린 시절부터 준비되는 고도의 작업이다. 두 남녀를 서로 붙여두고, 오랜 기간 친밀감을 쌓아서 자연스레 무난한 결혼, 무난한 가정까지 이어지게 하니까. 라테르와 레이첼도 그렇게 만들어진 소꿉친구일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소르타 가문은 왕실과 정략혼을 할 정도의 가문이 아니다. 그냥 붙어 다니다가 정이 생기고, 정이 생겨서 결혼까지 이어진 거겠지. 그래서 갑작스럽게, 소규모로 결혼을 진행하는 걸 테고.
– 뭐, 라테르가 먼저 청혼했다고 하니까. 정략은 아니겠지.
에리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정략이 아닌 자발적 결혼이었어.
“그럼 내년에 결혼하는 사람만 셋인가?”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는 궤멸적인 눈치를 자랑하던 놈들이 너도나도 결혼을 앞둔 새신랑이 되었다.
당장 통신구 너머에 있는 에리히는 내년 상반기에 한 번, 하반기에 결혼을 할 예정이고, 아인테르도 내년 중에 결혼을 할 예정이다. 설마 여기에 라테르까지 추가될 줄 누가 알았을까.
– 그러게. 이거 그동안 형이 다른 사람 결혼을 억제하고 있던 거 아니야?
“뭐 이 새끼야?”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에리히의 입에서 억제 운운하는 말이 나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일단 아인테르의 결혼을 억제했다는 말은 인정한다. 실제로 내 결혼 릴레이와 겹치지 않게 아인테르와 샤티의 결혼식은 다소 조정되고 있었으니, 내 결혼식이 끝난 덕에 그 둘의 결혼식이 확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아니다. 이 새끼는 내가 없었으면 결혼은커녕 약혼도 못 했다. 아니, 변변찮은 연인 관계조차 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저놈의 연애를 위해 세라와 제노비아를 얼마나 밀어줬는데.
“넌 내가 없었으면 테레사보다 늦게 결혼했어.”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반박하려던 에리히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저놈의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양심이 맹렬하게 작동하는 모양이다.
그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까딱 잘못했으면 타국에 후작령을 가진 부동산 부자가 마흔이나 쉰까지 독신으로 살 뻔했는데.
“라테르가 왕족이라 그런지 너보다 낫다. 걔는 누가 도와주지도 않았을 텐데 알아서 결혼까지 하고.”
– 그러게…
다소 풀이 죽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에리히를 보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동생을 상대로 기강을 잡고 상하 관계를 유지하는 건 형의 의무이자 숙명이─
– 확실히 형도 형수들이 먼저 고백했었는데, 왕족이 귀족보다 낫긴 한가 봐.
“뭣.”
예상치 못한 명치 쪽 직구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네. 생각해 보면 나도 가만히 있다가 상대가 먼저 움직인 케이스였지.
“…….”
– …….
서로가 서로에게 날린 치명타. 덕분에 나와 에리히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고,
“축하 선물로 생각해둔 거 있냐?”
– 모피가 무난하지 않을까? 북방 모피는 다른 모피들보다 품질이 좋잖아.
“괜찮네. 관상용으로도 좋겠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에리히가 물고 온 고급 정보는 곧장 황제에게 전달했다.
라테르도 타니안에게 말해준 걸 보면 딱히 소문이 퍼져도 상관없다는 의미였겠지. 왕족은 자기가 한 말의 파급력을 모를 정도로 단순한 종족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77년도 시즌에는 단순하다 못해 파멸적이었지만, 지금은 77년도가 아닌 81년도지 않나. 4년이면 폐급도 A급이 되기 충분한 시간이다.
– 결혼?
아무튼 타국 왕족의 혼인 소식에 황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유벤 연합왕국은 변방 약소국이 아니다. 제국과 아르메인의 뒤를 이은 대륙 3위의 강국이고, 연합 체제가 아닌 단일 체제로 탈바꿈한다면 그 이상으로 도약할 수도 있는 국가다. 그런 왕국의 경사라면 제국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심지어 방계 왕족, 왕위 계승권과 까마득히 먼 직계도 아닌 2왕자의 결혼이다. 제국에서도 나름 성의를 담은 축하 인사를 보내야 격에 맞는다.
– 용케 그런 정보를 접했군.
“마침 차기 성자가 유벤에 입국하지 않았습니까. 제 동생이 가끔 차기 성자와 연락을 나누고 있는데, 그 시기가 우연히 맞아떨어졌습니다.”
– 이거 자네 동생은 의회가 아니라 외무성에 보내야 할 것 같아.
황제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에리히에게는 외교적 능력이 없지만 그걸 상회하고도 남을 외교적 인맥이 존재한다. 막말로 에리히가 류티스와 라테르, 타니안에게 ‘우리 사절이 하나 갈 건데 잘 좀 봐줘.’ 라고 한마디만 하면 제국 외교관들의 행보도 한결 편해질 테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진짜 외교 특화 인재기는 하네. 나한테 성인인 동생 하나만 더 있었어도 에리히는 외무성에 꽂았을 텐데.
– 흐음.
에리히의 재능을 묵혀두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이, 황제가 무언가 고민하는 듯 턱을 매만졌다.
– 생각해 보면 의원들의 능력을 의회에만 묶어두는 게 아쉬웠지.
“예?”
그러고는 심상치 않은 화두가 튀어나왔다.
– 의원들에게 행정부 견제뿐만 아니라 업무 협조나 고문의 권한을 주는 것이 좋겠어. 의원들의 지식과 노련함이 행정부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행정부의 현장을 직접 봄으로써 법안 제정에 유연함을 줄 수 있지 않겠나.
“폐하. 제국의회는 최근에 격변을 겪은지라, 추가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면 큰 혼란이 찾아올 것입니다. 폐하의 뜻은 알겠사오나 당분간은 보류하심이…”
– 그도 그렇군. 장관의 말이 맞네.
다행히 황제의 끔찍한 야망은 조기에 저지할 수 있었다.
업무 협조와 고문이라니. 기껏 서민원을 설치한 보람이 순식간에 쓰레기통으로 갈 뻔했어.
– 위원회 조직은 차후에 논의하도록 하지.
이 미친. 그새 이름도 정한 거냐.
‘위원회…’
나도 모르게 외교위원회 위원이 되어 오열하는 에리히의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너무 선명하게 상상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막지 못할 확정된 미래인 것 같다.
– 그보다 내년 중에 결혼을 할 것 같다고?
“아, 예. 정확한 계절은 모르겠으나 내년인 건 확실하다고 합니다.”
– 아쉽군. 하디네르 남작이 축하 사절에 포함되면 딱인데, 하필 내년이면 휴가 중일 테니.
그 말에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기가 조금만 빗나갔다면 에리히는 대륙 반대쪽에 위치한 유벤까지 갔을 거라는 말이니까.
내가 휴가 중에 레온으로 투입되었던 것과는 급이 다른 참사다. 레온은 적어도 국경이라도 붙어있지, 제국에서 유벤으로 가려면 거쳐야 하는 국가만 몇 개야.
– 정말 아쉽군…
작게 혀를 차는 황제의 모습에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괜히 눈이 마주치면 에리히를 설득해 보라는 망언을 꺼낼 것 같았으니.
***
장관의 얼굴이 사라진 통신구를 책상 구석으로 옮긴 후,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디네르 남작만한 인선이 없는데.’
제국의 실세인 장관의 동생. 300년 동안 황실을 보필한 크라시우스 가문의 사람. 귀족원 의원 대리.그리고 아카데미에서 타국 왕족, 차기 성자와 친분을 갖춘 귀족.
이건 에넨과 대제께서 하디네르 남작을 보내라고 강요하는 수준이다. 이런 인선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강행할 수는 없다. 이미 신혼 휴가를 즐기던 장관을 레온으로 보낸 전적이 있는데, 동생을 유벤으로 보내면 장관의 눈이 뒤집힐 수도 있다.
‘아인테르를 보내야 하나?’
이윽고 2순위 후보인 아인테르가 떠올랐다. 사실 하디네르 남작이 새해가 되자마자 결혼할 예정인 것과 달리, 아인테르는 여름은 되어서야 결혼을 치른다. 유벤 연합왕국의 라테르 왕자가 상반기에 혼인을 진행한다면 아인테르를 축하 사절단으로 보낼 수 있다.
다만 아인테르는 이미 제도와 북방을 열심히 오고 가는 중이라, 아인테르를 유벤으로 보내 버리기도 영.
‘복잡하군.’
정말 좋은 카드인데, 정말 쓰기 좋은 인선인데 나란히 봉인됐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거래라도 해야겠군.’
여차하면 하디네르 남작에게 거래를 걸자.
신혼 휴가 기간을 늘려주고, 신혼여행 비용을 황실에서 전적으로 지원할 테니─ 신혼여행 장소를 유벤으로 정하는 건 어떻겠냐고. 사절단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유벤에 가는 것은 어떻겠냐고.
딱히 통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은 꺼내보자. 거절해도 본전, 수락하면 이득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