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87)
로판 속 공무원 687화(688/945)
아무래도 내년부터는 좋은 일만 가득할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한 해가 다 끝나가는 지금, 이런 재앙과 마주할 리가 없다.
“황제 폐하 만세!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원, 귀족원 의원 대리인 에리히 크라시우스 오브 하디네르가 존엄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이며 황제를 향한 찬양을 올렸다.
사실 아직도 머리가 새하얗다. 의회에서 평소처럼 업무를 보던 중, 갑작스레 궁내성에서 연락이 날아왔다. 그것도 궁내성의 일개 관료가 아닌 궁내성 2인자나 다름없는 황실부장의 연락이.
황제 폐하께서 찾으시니 최대한 빠르게 입궐하라는 통보. 처음에는 질 나쁜 농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찔한 통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농담이기를 바랐던 통보라 하는 게 옳으려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진짜였다. 황제 폐하께서 나를 찾으셨고, 연락을 받자마자 미친 듯이 태양전으로 달려갔다.
“어서 오게, 하디네르 남작. 이리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
이윽고 머리 위에서 황제 폐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간 것이라면 모를까, 이리 가까이서 폐하를 뵙는 건 처음이다. 당연히 일대일 독대는 더더욱 처음이고.
“일단 일어나도록. 의원들이 제국과 의회를 위해 헌신하는 건 짐도 잘 알고 있거늘, 의원이 이리 엎드려 있으면 짐의 마음도 편치 않아.”
“화,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부드러운 명령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크흐.”
그러자 내 얼굴을 본 황제 폐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그 웃음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안 그래도 난데없는 호출이라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 황제 폐하께서 나를 보자마자 웃음을 흘렸다. 혹시 내가 실수라도 저지른 건가 초조할 수밖에 없다.
“형제는 형제구나 싶어서 말이야. 확실히 장관과 많이 닮았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실수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저희 형제가 부친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그런 것 같습니다.”
“흠, 그렇게 들으니 전 타일글레헨 백작의 모습도 많이 보여.”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황제 폐하는 상석에 앉으시더니, 손을 뻗으며 나에게 자리를 권하셨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다독이며 자리에 앉았다. 나도 나름 의원 대리이자 작위 귀족인지라 폐하의 얼굴을 본 적은 여러 번 있다. 허나 그것은 나와 폐하가 우연히 같은 공간에 있었을 뿐이지, 폐하께서 나에게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렇기에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과연 무슨 이유로 호출을 받은 걸까. 내가 폐하의 관심을 받을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레온 쪽에 있는 영지 때문인가?’
이윽고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형이 나에게 맡긴 멜르시나 후작령은 후작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시 못 할 규모를 자랑하는 영지이자, 레온 왕국 서부에 위치한 요충지다.레온 왕국에 떨치는 영향력을 유지하고, 국경을 평온케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악해야 할 지역이다.
그래서 멜르시나 후작이기도 한 나를 찾으신 건가? 멜르시나 후작령의 통치 방향이나 방식에 대해 조언을 주기 위해?
‘아니면 라테르 때문인가?’
그다음 가능성은 라테르의 결혼이다. 형에게 라테르의 결혼에 대해 말했으니, 폐하의 귀에도 그 소식이 들어갔을 터.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나를 찾은 걸 수도 있다.
그렇게 나름의 이유를 떠올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대화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지식을 갖춘 채 대화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
“남작.”
“예, 폐하. 하명하소서.”
“크라시우스 가문은 300년 동안 황실과 제국을 위해 헌신한 충신의 가문이다. 크라시우스는 리브노만의 검이자 방패였고, 눈이자 귀였지.”
“실로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다시금 폐하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내 어깨에 무언가가 올라왔다.
“겸양을 표할 필요는 없다. 남작은 물론, 남작의 부친과 장관마저 제국을 위해 헌신했으니까. 아니, 자네와 장관은 아직도 헌신 중이지.”
폐하의 손이었다.
덕분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까마득한 존재인 황제가 일개 남작의 어깨를 토닥이며 치하한다? 누구도 상상 못할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장관을 찬양하고 주목하지만, 짐은 남작 또한 훌륭한 크라시우스의 일원이라고 믿는다. 막 아카데미를 졸업했을 때부터 의원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지 않았던가.”
“과, 과찬이십니다. 모두 선배 의원들의 조언과 가르침이 있던 덕분에…”
“조언과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도 능력이지.”
그 말에 더욱 고개를 숙였다.
슬슬 황송함을 넘어 이유 모를 공포까지 느껴졌다. 제국의 귀족으로서 폐하의 치하를 받는 건 분명 기쁜 일인데, 어째서 꺼려지는 거지? 일생의 영광으로 여겨야 할 일 아닌가?
“심지어 남작은 아카데미 시절, 뛰어난 교우 관계를 자랑했다고 들었다. 황제(皇弟)인 이드라펜 후작도 남작을 좋은 친구로 여기고 있지.”
칭찬에 칭찬이 얹어지자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래봤자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바닥밖에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격렬히 찾지 않고서는 이 초조함을 억누를 수 없을 것 같다.
“아. 그리고 유벤 연합왕국의 라테르 왕자와도 친분이 있었지?”
“예, 폐하. 그렇사옵니다.”
“그럼 라테르 왕자의 결혼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군. 친우의 결혼식이니 더욱 반가울 거야.”
‘아.’
순간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이게 용건이었구나. 이거 때문에 나를 부른 거였어.
멜르시나 후작령 때문에 부른 게 아니라 라테르의 결혼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을 주문할 기세다.
“남작. 짐이 제안을 하나 하고 싶네만.”
어느새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줄 생각이 있는가?”
“그, 것이…”
“물론 어디까지나 제안이다. 유벤 연합왕국이 이웃 국가도 아니고, 대륙 반대편에 있는 국가지 않나. 아무리 텔레포트의 힘을 빌려도 가벼운 마음으로 갈 국가는 아니야.”
다 이해한다는 듯한 목소리에 작은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남작이 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황실의 남작의 여행을 지원할 생각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안… 제안이라… 이게 과연 제안이 맞을까… 황제가 직접 ‘황실이 지원할 텐데 가볼래?’ 라는 말을 했는데 거절해? 그럼 ‘아, 황실의 돈을 받기 싫은 충신이구나. 그럼 자비로 가야지.’ 라는 말이 이어지지 않을까?
“당연히 거절해도 상관없다. 남작은 라테르 왕자가 결혼할 때 즈음이면 신혼을 즐기고 있을 때니까. 신혼의 여행지는 당사자가 정하는 것이 옳지.”
분명 부드러운 배려였으나 전혀 부드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높으신 분이 이렇게 배려를 해주는데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
처량하게 물러나는 하디네르 남작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실수했다. 그저 수락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제안한 거였는데,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장관의 동생이라고 장관처럼 대했어.’
장관이라면 내 제안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을 거다. 내가 명령이 아닌 순수한 제안을 했다는 걸 알기에, 거절해도 아무 탈이 없다는 걸 알기에 무시했을 거다. 장관은 충분히 그럴 눈치와 용기가 있으니까.
허나 하디네르 남작은 아니다. 남작은 장관처럼 17살부터 관료 생활을 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직급과 사건을 경험한 적도 없다. 당연히 나와 대화를 나눈 경험도 없다시피 하다.
그런 남작이 내 제안을 순수한 제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제안이라는 이름의 명령이라고 받아들였을 게 뻔하다.
‘이거 미안한데.’
다른 신하들에게는 이런 실수를 절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작이 장관의 혈육이라, 장관과 묘하게 비슷한 외모인지라 나도 모르게 장관처럼 대하고 말았다. 입이 열 개어도 할 말이 없는 참사지.
‘지금이라도 물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신혼을 즐겨야 할 신하에게 가혹한 짓을 한 것 같아 미안하지만, 솔직히 남작이 유벤으로 가준다면 그보다 편한 일은 없다. 과정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남작에게 유벤으로 가겠다는 대답도 받았고.
양심이 한 번, 딱 한 번만 아프면 외교적으로 편할 수 있다. 타국 왕족의 결혼식을 무난하게 축하해 줄 수 있다.
‘지원은 넉넉하게 해줘야겠어.’
물론 제안이라는 이름의 명령을 신혼 휴가 중일 신하에게 내린 것이니, 그 부담을 아득히 상회할 보상을 내려줘야 한다.
일단 황실이 지원할 여행 비용은 기존 계획의 수십 배를 주는 것이 옳다. 신혼이라는 달콤한 시간은 돈으로 살 수는 없으나, 그래도 돈만큼 명확한 보상은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하디네르 남작은 개인 자격으로 유벤까지 가는 것이다. 신하가 공식적인 업무를 받고 양국의 우호를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여행을 즐기다가 양국의 우호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그걸 명분으로 삼아 황실 직할령을 조금 떼어주면─
‘영지를 좋아할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으니 부담 없이 받겠지만, 영지는 관리가 번거롭다고 꺼리지 않을까? 장관은 그런 경향이 강하던데?
…아니지. 장관하고 비교하는 건 실례다. 방금도 남작을 장관처럼 대했다가 이런 참사가 터진 것 아닌가. 상식적으로 귀족이 영지를 마다할 리가 없다. 장관이 이상하다고 그 동생까지 이상하라는 법은 없다.
좋아. 영지는 남작령 크기로 하나 떼어주자. 덤으로 외무성의 명예 고문 자리도 줘서 봉급도 올려주고.
‘그럭저럭 체면치레는 하겠군.’
돈과 영지, 명예와 직책. 이 정도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남작의 속을 달랠 수 있을 거다.
***
에리히가 연락을 걸었다.
– 나 유벤 가게 생겼어.
“…뭐?”
– 유벤 간다고.
그렇게 말한 에리히는 와인병을 입에 물며 거칠게 들이켰다.
감히 형과 대화하는 중에 술을 처마시냐고 구박해야 할 광경이나, 에리히의 표정과 목소리에 짙은 슬픔이 가득해서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니, 어쩌다가 그렇게 됐냐?”
그저 측은함을 담은 채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전부였다.
– 그게─
그리고 상황 설명을 듣자마자 측은함은 더욱 커졌다.
황제 그 새끼. 아무래도 못 먹는 감 찔러는 보자는 식으로 제안한 거였는데, 하필 찔린 감이 사회 초년생인 에리히라 기겁을 하고 자지러진 모양이다.
‘에리히를 나처럼 대하면 어떡해.’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
황제의 제안을 거부하는 건 나조차 명분과 상황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다. 황제가 나를 레온으로 팔아먹은 전적이 있기에, 합법적으로 쌍욕을 박을 권리가 있기에 배를 째라고 버틸 수 있는 거다.
그런데 그런 고도의 행위를 에리히에게 바란다고? 내가 아카데미 진학을 포기하며 쌓아온 경험을 무시하는 거냐.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내 동생이라는 죄로 과대평가받은 에리히가 안쓰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