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88)
로판 속 공무원 688화(689/945)
이번 연말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물론 어느 남작 입장에서는 핵폭탄에 직격으로 맞은 서글픈 연말이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동생의 고통이 안타깝기는 하나 내 잘못은 아니잖아. 따지려면 황제한테 따져야지.
게다가 에리히의 유벤 파견─ 아니, 명목상 유벤 여행을 막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겉으로는 황제의 명령이 아닌 에리히의 ‘자발적인’ 신혼여행이고, 라테르의 결혼식에 아카데미 친구인 에리히가 참석하는 것만큼 좋은 그림은 없다.
게다가 황제는 양심이 부족해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지닌 놈이다. 자기도 신혼을 맞이할 신하에게 못쓸 짓을 했다는 걸 인지할 테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주기는 할 터.
‘안 받고 안 가는 게 최고지만.’
그래, 사실 안 받고 안 가는 게 제일이다. 보답이고 나발이고 신혼 때도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놈이 있다면 일하고 결혼한 사람이지.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불합리한 권력에 짓눌리는 경우도 있는 법. 에리히는 그 경험을 다소 이르게, 다소 좋지 않은 타이밍에 겪었을 뿐이다. 이 고통을 이겨내면 에리히는 더욱 강한 사회인으로 진화할 거라고 믿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처음 겪었던 불합리한 권력은 전대 감찰부장이었지. 그 망할 새끼한테 엿 먹은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
‘차라리 황제한테 당하는 게 좋을 거다.’
속으로 에리히에게 소소한 격려와 위로를 건넸다. 아무리 힘들고 서러워도 황제한테 시달리는 게 나을 거라고.
내가 황제를 옹호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2황자나 전대 감찰부장에 비하면 황제는 선녀니까. 그것도 하늘에서 춤추며 내려온 진짜배기 선녀.
‘…어차피 당장 가는 것도 아니잖아.’
이윽고 에리히의 결혼 날짜와 라테르의 결혼식 추정 날짜를 떠올렸다.
에리히는 1월에 제노비아와 결혼하자마자 신혼 휴가에 돌입한다. 반면 라테르의 결혼은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으니, 아무리 일러도 2분기쯤에 진행하지 않겠나. 그러면 최소 3개월은 제국에서 편히 쉴 수 있다.
뭐야 이거. 괜히 동정했네.
“티티야.”
– 멍?
“나랑 산책이나 가자.”
– 멍멍!
덕분에 마음속 우선순위를 조정했다. 에리히에 대한 걱정과 동정을 아래로 내리고, 티티와의 산책을 그 위로 올렸다.
우리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고생하는 장한 티티. 그런 티티의 행복한 산책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티티가 건강하고 튼튼해야 내 부담도 적어져.
그리고 산책을 시작하고 얼마 후, 거짓말같이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티티야… 우리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한 걸음 내딛기도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쌓여가는 눈. 머리와 어깨에 닿으면 녹기는커녕 가득가득 탑을 이루는 눈.
엄청난 강설량이다. 내 경지가 경지인지라 추위에 떨 정도는 아니나, 물리적으로 쌓여가는 눈은 거동 자체를 불편하게 했다.
– 왈! 왈왈!
허나 주인과 함께 산책에 나선 티티는 이 눈도 장난감처럼 보였는지, 위풍당당히 눈을 헤쳐나가며 산책을 졸랐다.
“알았어. 끝까지 가자.”
결국 티티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꾸역꾸역 제도를 돌아다녔다.
티티가 원한다면 들어줘야지. 티티가 우리 가족 내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얼만데.
“자, 장관 각하를 뵙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노고가 많다. 자네들 덕에 제도의 시민들도 편히 이동할 수 있겠군.”
“아닙니다! 각하께서 오시기 전에 더 빨리 치웠어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어기적어기적 전진하던 중,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제설 작전을 수행하던 제도 경비대 소속 병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다행히 서로 반대 방향에서 온지라 이 앞은 편하게 갈 수 있겠다.
– 왈왈!
“이 녀석도 고맙다는군.”
“여, 영광입니다…”
티티도 경비대의 조장으로 보이는 남성을 향해 감사를 담아 짖었다.
누구 집 개인지 참 예의 바르기도 하지.
폭설은 신년하례식 날까지 지속됐다.
그래도 제도는 제도 경비대와 근위 1군단, 마탑에서 눈물을 흘려가며 제설을 하기에 귀족들의 통행이 막히지는 않았다. 고작 눈 때문에 신년하례식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만한 참사는 없으니까.
물론 아무리 눈을 쓸어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 자체를 통제할 수는 없는 법. 기후 조작 마법은 극히 소수의 마법사만, 그것도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만 써야 하는 마법이라 마차에서 연회장까지 걸어온 귀족들은 눈사람이 된 상태로 입장해야 했다.
“엄청나게도 쏟아지는군. 이렇게 온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거칠게 눈을 털며 다가오는 장관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하필 덩치도 큰 양반이라 예티가 걸어오는 줄 알았다.
“하늘도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는 모양이죠. 최근에 황자 전하가 태어나셨고, 몇 달 후면 이드라펜 후작 각하께서도 혼인을 치르지 않습니까.”
“이런 축하는 너무 과하지 않냐?”
“그건 그렇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쓰레기를 대량으로 뿌리는 건 축하라고 하기에 과하고도 가혹한 축하다.
물론 우리들보다 병사들이 더 고통스럽겠지만.
“흐으음.”
“왜 그러십니까?”
마지막 눈까지 털어낸 장관이 갑자기 턱을 매만지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뭔가 낯설어서 말이야. 요 3년 동안 새해를 맞으면 네 결혼식도 덩달아 찾아왔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순수한 감탄인 건지 놀리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래봤자 네 동생이 결혼하니 축의금이 털리는 건 여전하지만.”
방금 말 덕분에 확신했다. 감탄이 아니라 놀리는 거였어.
“아들 같은 부하의 동생이 결혼한다는데, 그깟 축의금 몇 닢이 아깝습니까?”
“너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진즉에 족보에서 지워버렸다.”
망설임 하나 없는 단호한 목소리에 순간 울컥했다.
나도 장관 같은 친부가 있었다면 진즉에 가출했겠지만, 막상 호적에서 판다는 소리를 들으니 진 기분이었다. 내가 먼저 불효를 저지를지언정 학대를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아.”
그렇게 홀로 패배감을 느끼던 사이, 입구 쪽을 돌아본 장관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황금공 각하도 오셨군.”
“벌써요?”
장관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파벌원들과 함께 우르르 입장하는 황금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공작도 자연의 힘은 이길 수 없는지 눈사람과 같은 모습이었으나, 표정만큼은 온화하고 푸근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각하께서 웃는 건 몇 번 봤지만, 저렇게 따뜻한 표정은 처음인데요.”
난생처음 본 표정이라 절로 의문이 들었다.
황금공도 감정을 가진 인간인지라 웃는 건 당연하다.하지만 공작이라는 작위와 자본주의의 화신인 성격 때문인지, 그 웃음이 흑막의 미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잦다. 하필 흑막 미소에 시가까지 결합되어 마피아 대부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까.
그런 황금공이 자애로움이 가득한 얼굴로 입장했다. 혹시 땅을 파다가 미스릴 광산이라도 발견한 건가?
“그, 레비아탄이라는 고래 덕에 요즘 보야르 상선들이 제레노를 앞마당처럼 드나 들어서 말이야. 제레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각하니 기쁠 수밖에 없지.”
“아.”
바로 납득했다. 레비아탄 효과가 아직도 지속 중이었구나.
하긴, 고작 몇 달만 이어지고 끝나기에는 너무 엄청난 존재기는 하지. 타국 상공에서 무력시위를 한 것도 어마어마한 퍼포먼스였고.
“그러고 보니 너도 비슷한 짐승 하나 키우는 중 아니냐? 지즈라고 했던가?”
“걔는 북방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워낙 자유분방한 녀석이라 필요한 일이 없으면 그냥 두고 있고요.”
“최근에 레온 쪽에서 발견됐다던데.”
“뭐, 레온도 제국 영토의 연장 아닙니까? 강을 넘지는 않게 조심하라고 했으니 괜찮겠죠.”
레온 왕국은 중부에 흐르는 강을 기준으로 이남은 제국, 이북은 아르메인이 관리 중이다. 이북도 아닌 이남에서 어슬렁거린 거면 상관 없─
“넘어서 하는 얘기다.”
“아.”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
딱 하나만 안 하면 되는데, 귀신같이 그 하나를 하고 말았다.
‘혹시 강을 못 봤나…?’
워낙 고속으로 비행하는 녀석이니 강을 못 보고 지나친 건가?
차라리 그렇다고 해줘. 명목상 내가 네 주인이라 네가 무단으로 강을 넘은 거면 내가 해명해야 돼.
신년하례식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황제는 작년 말에 있었던 황자의 탄생을 다시 언급했으며, 귀족들의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는 덕담도 같이 던졌다. 딱 의례적인 절차에 따라 의례적인 행사가 진행되었다.
어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덕담이었으나 오히려 기꺼운 일이다. 그만큼 제국이 아무 소란 없이 평화롭다는 의미니까.
‘인기 좋네.’
그리고 황제가 덕담을 마치며 물러난 후, 귀족들의 시선은 어느 귀족에게 향했다.
내 뒤를 이어 결혼을 하게 될 에리히. 귀족원 의원 대리인 하디네르 남작. 레온 왕국에 후작령을 가지고 있는 멜르시나 후작에게.
‘힘내라.’
순식간에 인파에 휩쓸리는 에리히를 보며 애도를 표했다.
유감스럽게도 귀족들의 관심은 황제조차 막을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죄가 있다면 귀족들의 관심을 끌만한 호칭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에리히에게 있겠지.
세 호칭 중 두 개를 내가 줬다는 건 잠시 잊기로 했다.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평온한 마음으로 에리히의 수난을 구경하던 중,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에리히를 바라보는 마르가 눈에 들어왔다.
“귀족들에게 물어 뜯기는 건 힘든 일인데, 도련님이 지치지는 않을까 걱정돼요.”
“괜찮아. 어차피 물릴 거라면 미리 물리는 게 낫지. 지금 자리를 피해봤자 따로따로 몰려올걸?”
“그건 그렇지만…”
내 말에도 마르는 복잡한 눈빛으로 에리히를 바라봤다.
역시 마르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넘친다. 저런 못난 녀석 따위, 백날을 물어 뜯겨도 마르한테는 아무 피해가 없을 텐데.
“게다가 에리히도 2년이나 의회에서 지냈잖아. 피곤하기는 해도 대처를 못할 녀석은 아니야.”
그렇기에 마르의 허리를 껴안으며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못난 동생도 내 동생이라며 챙겨주는 부인. 이 얼마나 고맙고도 기쁜 일인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자기 앞가림은 스스로 잘할 테니까.”
내 확언에 마르도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근처로 도망쳐 올 줄 알았다면 절대 확언하지 않았을 거다.
‘못난 놈…’
그래도 귀족들 사이에 후작도 끼어있었으니 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