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89)
로판 속 공무원 689화(690/945)
신년하례식이 끝나자마자 지즈의 둥지가 있는 북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외무성 장관의 말로는 아르메인 측에서 지즈의 벨튀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했지만, 원래 이런 건 알게 모르게 스택이 쌓이는 법이다. 자잘한 스택이 쌓이고 쌓이면 기껏 우호적 기류가 흐르게 된 양국이 다시 어긋나는 수가 있다.
– 넹? 강이요?
그리고 기둥이 올라가고 있는 신전 옆에서 낮잠을 자던 지즈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 저 강은 안 넘었어요! 어차피 제국하고 북방이 훨씬 넓은데, 뭐하러 작은 나라를 더 구경하겠다고 강을 넘겠어요!
진심으로 억울한 반응이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즈의 벨튀는 두 장관이 공통적으로 증언한 사실이다. 설마 나한테 이런 일로 농담을 할 리는 없으니, 지즈가 강을 넘기는 넘었을 터.
하지만 막상 지즈를 보면 두 명이 나란히 착각한 게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다. 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리얼한 반응이었으니까. 애초에 내가 아는 지즈는 나를 속일 정도의 지능과 눈치가 없기도 하고.
‘설마.’
이윽고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어 품속에 있던 지도를 꺼냈다.
“너 정확히 어디까지 갔었어? 정확하게 짚어봐.”
지즈를 향해 지도를 펼친 후, 레온 왕국의 영토를 가리켰다.
원래는 강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려주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가져온 지도였으나, 내 생각이 맞는다면 다른 용도로 써야 할 것 같다.
– 여기요.
“아.”
지즈가 날개로 가리킨 지역을 보자마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확실히 지즈는 강을 넘지 않았다. 근처까지 아슬아슬하게 북상했다가 급격히 서쪽으로 꺾으며 유유히 제국으로 복귀했다.
“이 강이 아닌데.”
– 엥? 이거 아니었어요?
다만 지즈가 넘지 않은 강은 내가 말했던 강이 아닌 다른 강이었다.
제국과 아르메인의 경계 지역인 지브로야 강이 아닌, 그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강이었다.
‘이게 뭔.’
생각보다 어이없는 이유로 터진 소동이었기에 실소가 나왔다.
그래도 이해할 수는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지브로야 강이나 다른 강이나 거기서 거기겠지. 팻말 같은 것도 땅을 걸어 다니는 인간이 볼 수 있게 박혀있지, 하늘에서 볼 수 있게 걸어두지는 않잖아.
그리고 대륙을 누비는 철새들도 자기들이 어느 강, 어느 산을 넘고 있는지는 모르는 법. 지즈도 철새라고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철새가 전열함 크기라서 문제일 뿐.
– …저 많이 실수한 거예요?
내가 말없이 웃음만 흘리자 지즈는 몸을 낮추며 쭈뼛거렸다.
실수를 하기는 했으나, 거칠게 구박하거나 꾸짖을 정도는 아니다. 아르메인에게 공식으로 유감 성명을 표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당분간 나랑 지리 공부나 하자.”
– 넹…
대신 지즈의 머리에 지리 상식 정도는 주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멀리 날아가더라도 자기 둥지로 잘 돌아오는 녀석이니,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실수하지 않겠지. 그렇게 믿는다.
– 그런데 새가 국경을 가리며 날아다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저 소속도 명확하니까 그냥 다녀도 될 것 같은데. 예전에 명목상 소속을 가지고 있으면 국경을 넘어도 소란이 덜하다면서요.
“소속이 명확하니까 격추당하지 않고 돌아온 거지. 인간하고 드잡이질 하고 싶어?”
단호한 말에 지즈의 날개가 축 늘어졌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아직 대륙에는 영공이라는 개념도 없고, 제국의 귀족이 기르는 새가 다른 왕국 하늘에서 놀다가 온 거다. 새의 덩치가 크다는 것만 빼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조만간 조약이라도 맺어야지.’
주인 있는 영토와 영해도 해당 국가의 허락을 받으면 지나다닐 수 있다.그렇다면 주인이 없는 하늘쯤은 해당 국가의 양해 정도만 구해도 충분할 터.
솔직히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자기들이 뭐 어쩌겠냐마는, 제국이 국제 깡패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곤란하지 않나. 그러니 상대를 배려하는 척은 해야 한다.
그리고 양해를 구하며 날아다니던 새가 아무 언질 없이 자국 상공에 등장한다? 그보다 공포스럽고 확실한 무력시위는 없다. 훗날의 임팩트를 위해 미리 초석을 깐다고 생각하자.
‘좋아.’
에리히 결혼식이 끝나면 외무성 장관한테 슬쩍 조약 체결을 부탁하자.
외무성이 밟아주고 싶은 국가가 생길 때마다 지즈를 빌려준다고 하면 기꺼이 들어줄 거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아닌 하객으로 참가하는 건 오랜만이다. 대충 정보차장의 결혼식 이후로는 처음인가?
‘가족 결혼식은 태어나서 처음이네.’
그리고 빙의 전 인생, 빙의 후 인생을 통틀어서도 가족의 결혼에 참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괜히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아니, 가족의 결혼이 아니라 에리히의 결혼이라 감동한 걸 수도 있다. 눈치를 처절하게 말아 먹은 놈이 기어코 결혼을 하다니. 몇 년 전의 내가 들었다면 땅을 치고 통곡했을 기적이다. 아카데미 시절에 했던 고생이 결국 기적을 꽃피웠어.
“설마 동아리 부원 중에서 네가 가장 먼저 결혼할 줄은 몰랐다.”
“좋은 날에 왜 그런 말을 해…”
“좋은 날이니까 말하는 거지. 속 터지는 상황이었으면 말이 아니라 멱살 잡기부터 시작했어.”
농담 반 진심 반인 격려에 에리히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말 의외기는 하다. 부원들 중 기혼자가 나온다면 정략혼에 직격으로 맞는 황족, 왕족 중에 나올 줄 알았거늘. 일개 귀족인 에리히가 결혼까지 직통으로 달릴 줄 누가 알았겠어.
물론 제노비아와 세라라는 소꿉친구가 있었기에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기는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 미친놈은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겨우 1등을 한 거다.
‘경이로운 개새끼.’
어디 가서 크라시우스라는 성은 말하지 말고 하디네르 남작이라고만 소개해라. 넌 우리 크라시우스의 수치이자 최약체니까.
“아무튼 축하한다. 어차피 하객들은 너네 뒤통수만 보니까 긴장하지 말고. 적당히 박수 소리 들으면서 시간만 보내면 돼.”
“그게 말처럼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에리히를 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벌써 3년 전의 일이니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도 마르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저렇게 긴장했었겠지. 에넨의 축복 덕에 긴장이고 나발이고 다 망가졌지만.
‘용기의 주문이라도 줘야 하나?’
나는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으나, 에리히는 결혼식 직전인 상황이다. 이왕이면 긴장감에 치이는 결혼식이 아닌 웃음으로 가득한 결혼식을 즐길 수 있게 조언을 주는 게 좋겠지.
그렇기에 잠시 턱을 매만진 후, 에리히의 귓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객들 대다수는 나랑 너하고 연줄을 만들려고 온 거야. 네가 갑자기 물구나무를 서도 극찬을 할 사람들이니 신경 꺼.”
“아.”
그 속삭임에 에리히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변했다.
에리히의 하객이 아닌 하디네르 남작의 하객이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빠르게 풀리는 긴장감.얘도 귀족이 다 되기는 한 모양이다.
***
가장 먼저 결혼식장에 온 형의 뒤를 이어 여러 하객들이 줄줄이 찾아왔다.
같은 제국백 가문의 사람들, 업무 동료인 귀족원 의원들, 의회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간간이 보는 서민원 의원들, 어쩌다 가끔 만나는 행정부 관료들.
그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얼굴과 이름이 생각나는 귀족들까지.
“하객들 대다수는 나랑 너하고 연줄을 만들려고 온 거야. 네가 갑자기 물구나무를 서도 극찬을 할 사람들이니 신경 꺼.”
형의 말이 맞았다. 가족들, 가까운 업무 동료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하객들은 결혼 축하가 아닌 사교의 연장을 위해 방문한 것이다. 그러니 데면데면한 관계인데도 결혼식장까지 찾아온 거지.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2년의 의원 생활 덕분인지, 내 심장은 단순 사교 활동으로 긴장할 만큼 나약하지 않다.
“사위. 나 왔다.”
“아, 장인어른.”
그렇게 평온한 마음,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게오르크 아저씨에서 장인어른으로 불러야 할 분이 다가왔다.
“우리 사위. 안 그래도 잘 생겼는데 꾸미니까 더 좋구먼. 역시 우리 딸을 데려갈 거면 이 정도는 돼야지.”
껄껄 웃음을 터뜨린 장인어른은 내 등을 거칠게 내리쳤다.
솔직히 아팠다. 장인어른은 원수로서 종군 경험이 있을 만큼 노련한 무인이잖아. 아무리 내가 단련 중이어도 장인어른의 공격에 멀쩡할 수는 없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우리 딸이 사위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맞는데, 정작 사위나 사돈 놈이나 시큰둥해서 말이야. 하루하루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지.”
“며, 면목 없습니다.”
“됐네 됐어. 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좋으니까. 게다가 사돈 놈이 개입하지 않은 건 사위 스스로 마음을 깨닫기를 바라서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옳은 선택이었지.”
흐뭇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장인어른은 내 몸을 끌어안으셨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사위가 남작이라고 무시하는 놈이 있다면 나한테 말하게. 자네 형이 나서기 전에 내가 아작을 내줄 테니.”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응원을 남기고 유유히 떠나셨다.
형은 첫째 장인어른에게 조금 미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던데, 나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아 다행이다.
마음을 다잡은 덕인지, 아니면 장인어른에게 화려한 응원을 들은 덕분인지─ 결혼식을 진행하는 내내 미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오히려 내 옆에 있는 누나가 더 떨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이거 너무 마음만 달래느라 누나를 신경 쓰지 못한 건가?
“누나.”
“어, 응?”
“앞으로는 비아라고 부를 테니, 누나라는 말은 지금 잔뜩 말해둘게.”
그 말과 함께 누나의 손을 잡자 미세한 진동이 우뚝 멈췄다.
긴장을 다른 감정으로 억누르는 것. 다행히 성공적으로 통한 모양이다.
“이제 누나와 동생이 아니라 동등한 부부가 되는 거니까. 누나만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좀 비겁하지.”
“…진작 그랬어도 괜찮은데.”
누나의 투정 아닌 투정에 머쓱히 웃음을 흘렸다.
사실 누나를 비아라고 부른 건 처음이 아니다. 예전에도 잠깐 비아라고 불렀으나, 누나라는 호칭이 입에 붙어 지금까지 누나를 입에 달고 지냈다.
그래도 결혼한 이후에도 그러면 곤란하지. 뭔가 누나가 나보다 연상이라고 선을 긋는 기분이잖아.
“못한 만큼 열심히 할 테니까 봐줘.”
“좋아. 특별히 믿어줄게.”
나도 누나도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따뜻해지고 흐뭇해지는 결혼식이었다.
─라고 생각했다.
‘저게 뭐야.’
거대한 독수리가 결혼식장 상공에 나타나 꽃잎을 뿌리기 전까지는.
‘형 새끼…’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기에 침통히 눈을 감았다.
***
한 겨울에 쏟아지는 꽃비를 보니 절로 흐뭇했다.
에리히도 멍하니 하늘을 보더니, 조용히 눈을 감지 않았나. 이 형의 서프라이즈에 감동한 것이 분명하다.
‘세라 때도 해야지.’
한참이나 쏟아지는 꽃비를 보며 다짐했다. 서프라이즈를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패싱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반드시 세라의 결혼식 때도 지즈를 동원하자.
겨울이 아닌 여름의 꽃비도 제법 아름다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