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9)
보야르로 가는 길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학생회 자체적으로도 수백이나 되는 인원이 지나가다 보니 심혈을 기울여 정한 루트였고, 루트에 걸쳐진 영지의 영주들 역시 아카데미 행렬에 흠집이라도 날까 치안 확보에 열을 올렸다.
만약 본인 영지에서 아카데미 학생들이 다치는 일이라도 생기면 끔찍한 재앙이나 마찬가지. 심지어 단순히 귀족 자제에서 그치지 않고 황족, 왕족, 차기 성자가 끼어 있다. 그중 한 명이라도 ‘그 영지 별로더라.’ 라는 말을 하면 앞으로의 인생에 불꽃길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건 마지막에야 안 거지만, 그걸로도 모자라서 황금공이 영주들에게 압박을 넣었다고 하더라. 보야르로 오는 길에 사고가 터지면 사람들은 어디서 터졌는지 보다 ‘보야르로 가는 길’에 사고가 났다는 것을 기억하니까. 눈에 불을 켜고 살폈겠지.
‘알았으면 나까지는 안 나섰는데.’
미안하다, 난 설마 황금공까지 그럴 줄은 몰랐지.
혹여 보야르로 가는 길에 낙석이나 산사태, 산적 같은 재미없는 일이 터질까 봐 루트에 걸쳐진 영주들에게 눈치를 줬다. 졸지에 좌우로 황금공과 감찰부장에게 얻어 터진 영주들의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안전에 신경 쓰니 얼마나 보기 좋나.
“잠깐 근처 좀 둘러보고 올게. 30분 후에 출발이지?”
“네. 다녀오세요.”
그렇게 소란 없이 달리고 달려 잠시 휴식을 위해 멈춘 도시. 여기가 톨게이트 진입 전 마지막 휴게소나 다름없으니 이제 보야르에 도착하기까지 계속 마차 안에만 있어야 한다. 답답할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바람 좀 쐬고 와야지.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와 가장 만나서는 안되는 아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버렸다.
“이리나?”
“아, 안, 녕하세, 요?”
망가진 태엽 인형처럼 삐걱이는 이리나. 홀로 떠돌던 이 아이와 마주치고 말았다. 산책을 가는 길에 만났다면 적당히 다른 길로 빠졌을 텐데, 하필 마차로 돌아가는 길이라. 돌아가는 길이 여기밖에 없어서 빠질 곳도 마땅히 없다.
이럴 것 같아 일부러 빨리 복귀했지만 이리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우리 이상하게 마음이 좀 통하는구나… 이런 이심전심은 딱히 좋지 않은데.
순간 이리나를 앞질러 뛰어가거나 두고 온 것이 있다며 돌아갈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아예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누가봐도 피하는 꼴을 보이면 오히려 더 어색해진다.
‘차라리 어색해지는 게 낫나?’
생각해보니 지금보다 더 어색해질 관계도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오히려 이리나와 단 둘이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선택 같다.
옆에 있는 이리나를 보니 처량할 정도로 몸을 떨고 있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입술까지 꾹 깨문 것이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장하겠네.’
정작 트롤링의 주범인 3과장은 사과 이후로는 요룬 백작가와 만나지도 않는데 영문도 모르고 장관한테 깨졌던 내가 아직도 이러고 있다. 차라리 이리나가 닳고 닳은 귀족이면 적당히 뭐라도 쥐어주겠지만 아직 순수한 영애라.
감찰부의 업보가 너무 짙구나.
***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에넨께서 나를 미워하시는 게 분명하다. 매일 아침마다 기도하고, 헌금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너무해…
‘그냥 마차에 있을 걸.’
뒤늦은 후회에 마음으로 울었다. 좁은 공간 안에 감찰부장과 함께 있다는 압박감, 언제 갑자기 돌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깨어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혹시 자고 있는 감찰부장을 거슬리게 해 불쾌하게 할 것 같은 두려움. 온갖 감정에 시달리다 산책이라는 명목으로 도망쳤다.
감찰부장이 나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건 알았지만 이 넓은 도시에서 이렇게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빨리 마차로 돌아가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벌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나왔다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적어도 마차 안에는 루이제와 에리히가 있어서 유사시에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감찰부장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잠을 자고 있어서 눈을 볼 일도 없었고. 그런데 괜히 나왔다가 단 둘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도망칠까?’
하지만 어떻게? 외길에서 만났는데 어디로? 게다가 노골적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을까? 혹시 그랬다가 감찰부장이 언짢아하지는 않을까?
가문의 결백이 증명되어 감찰부의 사과를 받은 것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어났던 일이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갑자기 봉변을 당한 것처럼, 또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어쩌면 자신들의 실수를 지우기 위해 다시 트집을 잡아 우리 가문을 밀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옛날에는 감찰부가 없던 죄도 만들어서 멸문시켰다는 사례도 있으니. 내가 조금이라도 책잡힐 일을 하면 바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이리나.”
“녜, 녜헷!”
감찰부장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이 떨렸다. 재판장에 선 적은 없지만 판사에게 이름을 불리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먼저 가있어. 두고 온 게 있어서.”
“아, 네.”
그러고는 길을 되돌아가는 감찰부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두고 온 거? 감찰부장이 가져온 짐은 작은 가방밖에 없던데. 심지어 마차에 두고 내렸고.
하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래, 도시에서 뭐라도 샀나 보지. 뭘 샀는지는 몰라도 두고 왔다니 정말 다행이다. 덕분에 감찰부장하고 떨어질 수 있었으니.
“흐으윽─”
긴장감과 함께 다리까지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까지 감찰부에 시달리는 것 같은 비참한 심정에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하지만 겨우 몸을 일으켜 서둘러 마차로 복귀했다. 감찰부장이 금방 돌아와서 다시 나란히 걸으면 곤란하니까.
“아, 이리나. 빨리 왔네?”
“응. 그냥 바람만 쐬고 왔어.”
마차에 들어가자 루이제가 반겨줬다. 루이제를 보자 이유 모를 서러움이 솟구쳐서 루이제의 품에 폭 안겼다. 어떡해, 또 눈물 나올 것 같아.
“힛, 간지러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갑작스레 안겨도 밀어내지 않고 웃으며 안아주는 게 너무 고맙다. 따뜻해… 조금이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아…
옆에서 에리히가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잠시 무시했다. 이해해줘, 누구 가족 덕분에 많이 무서웠단 말이야.
“다행히 안 늦었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찰부장도 도착했다.
‘빈손?’
무언가 두고 왔다는 말과 다르게 감찰부장은 아까 만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거짓말이었어? 굳이? 왜? 설마 나하고 떨어지려고?
‘…왜?’
혼란스러운 마음에 감찰부장의 손만 멍하니 쳐다보고 말았다. 길가에 침을 뱉으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을 보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뭔가 배려나 선행 같지만 하는 사람이 이상해.
***
두고 온 것이 뭐 개뿔이나 있겠나. 이리나가 경기를 일으키기 전에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급하게 만든 변명인데. 결국 예정에 없던 추가 산책을 하다가 막판에 마차로 복귀했다. 오히려 복귀 시간에 늦을 뻔했네.
마차의 문을 열자 루이제의 품에 안겨 칭얼거리는 이리나가 보였다. 그런 걸로 마음이 풀린다면 다행이다. 쭉 그러고 있으렴.
“이제 바로 보야르까지 가는 거지? 진짜 멀기는 머네.”
“그러게 말이다.”
에리히의 푸념에 적당히 대답해줬다. 보야르는 안 그래도 넓은 제국 영토에서도 남쪽 끝에 위치한 지역. 제도를 기준으로 하면 다섯 공작령 중 가장 먼 곳이다. 나도 보야르 공작령에 들릴 일이 있으면 무조건 텔레포트 마법사를 대동했을 정도.
보야르까지 마차로 가는 건 빙의 전으로 치면 제주도 출장을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타고 가는 수준이니까. 여행이라면 느긋하게 가는 과정도 즐겼겠지. 그런데 업무 중에 그러면 어지간히 미친 새끼가 아니잖아.
뭐, 지금 중요한 건 에리히의 푸념이나 보야르까지의 거리가 아닌 다른 문제지만.
‘아까부터 왜 이러지.’
분명 길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나와 떨어지고 싶어 오들오들 떨던 애가 은근슬쩍 나를 훑어보고 있다. 물론 대놓고 보는 건 아니지만 좁은 곳에서 그러니 시선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일개 학생의 시선도 눈치채지 못하면 내 4년은 내다 버린 거지.
그렇다고 막상 내가 이리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유독 시선이 꽂히고 있는 손을 움직이면 바로 쪼그라들며 바들거린다. 마치 어른에게 맞을 것 같은 아이가 겁을 먹은 것 같은 반응이라 내 마음도 편치 못했다.
‘지독하게 맞기는 했지.’
사람을 팬 것은 아니지만 가문 단위로 거하게 두들겨 맞았으니 맞았다면 맞은 거다. 곱씹을수록 3과장이 개새끼가 맞다. 한창 명랑하게 자라야 할 영애에게 이런 트라우마를 심다니.
그러니 이리나의 이유 모를 시선에도 묵묵히 있기로 했다. 감찰부가 요룬 백작가에 먹인 엿을 생각하면 이 정도 사소한 꺼림직함은 감수해야지.
보야르 공작령의 경계선을 넘으니 공작령의 중심지까지는 금방이었다. 황금공은 원활한 상행을 위해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도로에 장인 정신을 발휘한 양반이니까.
“멋지다…”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루이제의 말에 에리히와 이리나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긴 하지. 제국의 대표적인 경제 중심지다 보니 발전도는 어마어마하니까.
보야르 전체에 깔린 도로의 최종 종착지, 제국을 넘어 대륙을 누비는 함선들이 머무는 거대한 항구, 황금을 지배하는 황금공이 거주하는 황금의 도시. 제도가 아닌 곳에 황금의 도시 같은 거창한 칭호가 괜찮나 싶지만.
아무튼 보야르 공작령의 중심지, 제국 10대 도시 중 하나인 프코페에 도착했다.
‘길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리나와의 어색한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슬쩍 이리나에게 시선을 돌리니 루이제처럼 창문에 붙어 프코페의 경관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다. 적어도 수학여행 기간 동안은 네 눈 앞에 나타나지 않게 조심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