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90)
로판 속 공무원 690화(691/945)
지즈의 맹활약 덕분에 에리히와 제노비아의 결혼식은 모두의 기억 속에 남을 결혼식이 되었다.
나도 에넨의 난입으로 뒷목을 잡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결국 추억 아니던가. 당장은 에리히가 내 서프라이즈를 원망할지언정 훗날이 되면 이 형의 배려에 고마워할 거다.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아무리 귀족들이 사교의 동물이라지만, 결혼식도 사교의 연장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남의 결혼식에 와서 너무 사교에 열중하는 건 보기 좀 그래. 나름 내 동생의 첫 결혼인데.
‘이러면 당분간 결혼식 얘기밖에 못 하겠지.’
전열함 크기의 독수리가 하늘을 누비며 축하해 준 결혼식. 신의 축복보다는 임팩트가 약할 수도 있으나 결코 평범한 광경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십자가가 빛나고 만 축복보다 더 인상적인 광경일 수 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인물은 대륙 역사를 뒤지면 그럭저럭 나오지만, 전열함 크기의 독수리가 축하해 준 사람은 에리히가 최초일 거다. 확신할 수 있어.
“설마 동생 결혼식에서 난동을 부릴 줄은 몰랐다.”
허나 이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내 옆에 있던 장관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동이라뇨. 아무나 하지 못하는 축하를 해준 건데요.”
나는 떳떳하다. 결혼식 직전에는 에리히의 긴장감을 풀기 위해 ‘하객들은 네가 뭘 해도 신경 쓰지 않을 인간들.’ 이라고 말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결혼식이 사교장으로 쓰였다는 사실에 씁쓸해 할 거다. 원래 급한 용무가 끝나면 마음이 달라지는 게 사람의 특성이니까.
그래서 결혼식이 끝나기 직전에, 에리히가 다시 긴장해도 상관없는 타이밍에 지즈를 출격시켰다. 이러면 에리히 기억 속에 오늘 결혼식은 사교장이 아닌 가족이 열렬하게 축하해 준 결혼식으로 남을 터.
실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나처럼 배려심 넘치는 형이 또 어디 있겠어.
“…설마 다음에도 이럴 거냐?”
“둘 다 제 제수인데 차별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여름에도 똑같이 할 겁니다.”
“차라리 차별해 주는 걸 원할 수도 있겠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장관을 무시하고, 하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에리히, 제노비아를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얼이 나갔던 에리히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훌륭한 귀족으로 자란 것 같아 이 형은 자랑스럽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그 와중에 에리히와 팔짱을 낀 제노비아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꽃비를 손으로 받고 있었다.
감수성이 죽어버린 동생과 달리 제수는 내 퍼포먼스에 기뻐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해안가였으면 셋 다 불렀을 텐데.’
조금은 아쉽다. 만약 결혼식을 해안가에서 진행했다면 바다에는 레비아탄, 땅에는 베히모스, 하늘에는 지즈를 동원해서 3배로 축하했을 거다. 애석하게도 레비아탄은 부를 방법이 없어 지즈만 부른 거지만.
물론 레비아탄에게 비행 능력이 있기는 하나, 섬 크기의 고래를 결혼식 내내 상공에 띄우는 건 좀 그렇지. 한 겨울에 태양을 가리고 있으면 영민들이 얼어 죽겠어.
“칼.”
“아, 어머니.”
그렇게 새롭게 탄생한 신혼부부와 계속 꽃비를 뿌리는 지즈를 번갈아 보는 사이, 어머니가 테레사를 품에 안은 채 다가왔다.
“엄청난 걸 준비했구나. 미리 말해주지 그랬니.”
구박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어머니의 표정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갑자기 등장한 전열함 독수리에 놀란 감정보다, 차남의 결혼식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는 기쁨이 더 큰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번 결혼식은 에리히만의 축제가 아니라 우리 가문의 경사기도 하니, 두 분도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후후, 그러니? 역시 가문을 생각하는 건 가주밖에 없어.”
“까주!”
어머니의 말에 테레사도 활기차게 외쳤다.
그러고 보니 활기찬 테레사가 용케 어머니 품에 안겨있네. 테레사도 자기 오빠의 결혼식이 중요한 행사라는 걸 아는 건가?
“장관께서도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무성의 업무가 결코 적지는 않을 텐데, 매번 참석해 주시니 칼과 에리히의 어미로서 몇 번을 감사드려도 부족합니다.”
이윽고 장관을 향해 몸을 돌린 어머니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장관은 나와 마르의 결혼식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참석한 단골 중의 단골. 결혼식에도 쿠폰이 있었다면 축의금 한 번 정도는 면해줄 만한 프로 참석러였다. 어머니도 그걸 알기에 장관에게 고마운 마음이 클 터.
“아닙니다, 부인. 저는 페디의 대부이지 않습니까. 저 역시 크라시우스 가문과 연이 있는 것이니 가족의 경사에 참석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어머니의 인사에 장관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정상적인 모습이지만 낯설다. 우리 어머니한테 보이는 예의의 1할 정도만 나에게 써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참. 부군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결혼식 전에 인사를 드리기는 했지만, 돌아가기 전에 다시 뵙고 싶군요.”
“아, 빌리는…”
슬쩍 고개를 돌린 어머니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전대 호르펠트 백작에게 붙잡혀 와인을 흡입 중인 아버지가 보였다.
안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친우였던 두 분이다. 그런데 친우라는 관계에 사돈 관계까지 추가되었으니 그 친밀감이 오죽할까. 아무래도 아버지는 며칠 동안 사돈에게 시달릴 것 같았다.
“오, 발터! 자네도 이리 오게!”
“아니, 나는 이제 돌아가─”
“서운한 소리 말고!”
심지어 또 다른 친우인 전대 바르돈 백작도 지나가다 붙잡히고 말았다.
어째 빠른 시일 내에 호수에서 단체로 낚시 중인 세 아저씨를 보게 될 것 같다.
“오빠, 옵빠.”
“응?”
미래가 뻔한 세 중년의 뜨거운 우정을 보던 중, 어머니 품에 있던 테레사가 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저 새. 타구 시퍼.”
‘이런.’
뒤이은 명확하고도 또박또박한 요구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쩐지 테레사가 얌전한 게 신기했는데, 지즈에 온 관심이 쏠려서 돌아다닐 생각을 못 한 거구나.
“이따 오빠랑 같이 탈까?”
“웅!”
테레사의 손을 맞잡으며 말하자 테레사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즈의 존재 덕에 남동생은 역사에 남을 결혼식을 치렀고, 여동생은 하늘을 날게 생겼다.
에리히와 제노비아는 결혼식 전날부터 신혼 휴가 상태였다.
이해한다. 라테르가 언제 결혼할지 확실치 않으니, 최대한 길게 제국 내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겠지. 아마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톱니바퀴처럼 짜인 일정을 수행했을 수 있다.
게다가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올해나 내년에 류티스까지 결혼을 한다? 정황상 에리히는 신혼 휴가 도중에 아르메인으로 방출될 가능성이 높다. 유벤까지 간 녀석이 아르메인이라고 못 갈 건 없으니까. 황제도 에리히라는 카드가 눈앞에 아른거릴 테고.
‘친구가 많아도 문제구나.’
친구가 적은 수준을 넘어 없다시피한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고충이다.
“장관께는 빠르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약이니, 장관께서도 흔쾌히 수락할 겁니다.”
“그래. 잘 부탁하지.”
그리고 신혼 휴가 중임에도 행정부에 방문한 자발적 노예로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미묘한 기분이다. 동생은 신혼을 즐기는 와중에 형은 외무성에 방문한다라. 형만한 동생은 없다던데 그걸 이렇게 증명할 줄은 몰랐다.
‘접수만 하고 끝났네.’
그래도 예상보다 빠르게 용무가 끝난지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외무성 청사를 벗어났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외무성 장관에게 직접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장관은 새해 기념으로 몰려드는 각국의 사절단들을 상대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 지즈를 위한 조약을 체결하자고 조르는 건 양심이 없는 짓이지 않나.
‘대기 인원이 있어서 다행이다.’
내 조약 건의안을 받아준 부장급 인사를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부장마저 없었다면 괜한 발걸음을 한 꼴이 됐겠지. 앞으로 다른 청사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가자.
‘…가는 길에 인사라도 하고 갈까?’
그렇게 저택으로 복귀하던 중,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시간도 많이 남았고, 마침 새해기도 하고, 동생의 결혼이라는 빅-이벤트도 있었으니… 잠깐 그 녀석들에게 들러 인사라도 하자고.
‘좋아.’
잠시 고민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징징거리기 위해 가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이 있어서 말해주러 가는 것 아닌가. 내 동생은 그 녀석들 입장에서도 동생이니 가족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거다.
물론 빈손으로 가면 꺼지라고 할 녀석도 몇몇 있으니 와인도 챙겨가자.
볼이 간지럽다.
“칼.”
누군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감촉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감촉이 느껴졌다.
“카아아알?”
기분 좋게 따스한 햇빛도 느껴졌다. 겨울에 느끼기 어려운 따스함이라 이대로 더 자고 싶─
“뭐야. 이제 이 누나보다 상사라고 무시하기야?”
갑작스레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본능적으로 눈이 떠졌다.
“아, 일어났다.”
그러자 내 등을 내리친 걸로 보이는 여인이 히히 웃으며 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잘 잤어요, 우리 부장님? 피곤한 건 이해하겠는데에~ 부인이 직장에서까지 깨워주는 건 너무 과한 서비스 아냐?”
느긋하고 평온한, 부드럽고 웃음기 섞인 여인의 목소리와 달리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 옳을 거다.
‘이게, 무슨…’
내 눈에 들어온 여인, 유부남인 내 이마에 멋대로 입술을 맞추는 여인, 자신을 내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여인.
찰랑거리는 흑발을 허리까지 기르고,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매력적인 여인.
“…헤카테?”
움직이지 않던 입을 겨우 열어 여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고, 나를 처음으로 사랑해 줬던 사람.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더 이상 보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사람.
“네, 네. 헤카테 누나예요.”
내 말에 헤카테는 빙긋 웃으며 내 코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누나가 직접 깨워줬으니 세수라도 하고 와. 이제 다른 애들도 오겠다.”
…
‘꿈이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기습 참배를 한 뒤에 저택으로 복귀했고, 평소처럼 아이들과 놀아준 뒤 잠에 들었다. 거기까지는 확실히 기억이 난다. 난 분명 잠에 든 상태다.
‘이제 와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렇게 보고 싶을 때는, 제발 꿈에라도 나와줬으면 할 때는 한 번도 안 나오다가 갑자기 왜.
이윽고 손가락을 매만졌다. 북방에서 제국군이 기절하거나 잠들었을 때, 꿈으로 장난질을 친 주술사가 있었다. 덕분에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탈출하는 법도 알고 있다.
가장 먼저 꿈이라는 걸 인식하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극심한 고통이 찾아올 행동을 하면 꿈에서 탈출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것.
그래, 그래서 손가락을 매만졌다. 여기서 조금만 움직이면 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날 수… 있는데…
“칼?”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카테의 모습에 조용히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냐. 아무것도.”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이런 꿈이라면 잠깐만, 아주 잠깐만 더 꿔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