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94)
로판 속 공무원 694화(695/945)
사실 과장의 과와 과로의 과는 같은 뜻을 지닌 글자다.
부릴 수 있는 부하들이 많은 간부급 인사지만, 자기 위에 부장이라는 절대적 명령권자가 있어 처절하게 굴러야 하는 과장. 과장이라는 직책을 짊어지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과로. 이보다 명확하고 확실한 연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나와 헤카테를 제외한 다섯 과장은 감찰부 집무실을 자신들의 저택으로 삼은 지 오래였다. 오죽하면 이 꿈을 만들어준 신이 저 녀석들의 저택은 만들지 못해서, 그냥 감찰부에 처박은 건가 싶을 정도로 퇴근을 못하더라.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1주가 지나기 전에 꿈에서 깰 테니까 일 안 해도 돼.’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잖아. 그딴 말을 하면 정신병원으로 끌려갈 것이 분명하다.
“어이, 빨갱이.”
그리고 꿈속에서 세 번째 해가 뜬 날, 제라드가 거주 중인 4과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까망이 어서 오고.”
허나 부장이 친히 방문했음에도 제라드는 손만 휘휘 젓는 불경한 반응을 보였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부장과 과장은 같은 간부지만 그 사이에 압도적인 격차가 존재한다. 부장은 국가적으로도 핵심 인재 취급을 받으나, 과장은 해당 부나 성에서만 먹히는 직책이니까.
“과장 나부랭이가 미쳐 가지고. 징계 한 번 먹여줘?”
“제발 근신이나 투옥으로 먹여줘라. 퇴근 좀 하고 싶다.”
제라드의 가슴 절절한 부탁에 순간 숙연해졌다. 나도 저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
“빨갱이. 지랄 말고 이거나 마셔.”
“응?”
그렇기에 징계 대신 출근길에 사 온 선물을 던져줬다.
“…오오오!?”
심드렁히 선물을 받았던 제라드는 선물을 보자마자 짐승의 괴성을 내질렀다.
추한 모습이지만 이해한다. 그만큼 내가 가져온 선물은 제라드의 취향에 정확히 일치하는 물건이었으니.
“이거 보야르 와인이잖아!”
제국은 물론 대륙적으로도 1티어 와인, SSS급 와인 취급을 받는 보야르산 와인. 제라드가 전쟁이 끝나면 꼭 마시겠다며 노래를 부르던 와인.
퇴근을 하지 못하는 가여운 과장 나부랭이를 위해 부장이 친히 사 온 와인이었다.
“이야, 이 귀한 걸 어디서 난 거냐!”
히죽거리는 제라드의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라드의 말처럼 보야르 와인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물량도 넉넉하지 않은 물건이다. 돈이 있어도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지.
헌데 그 보야르 와인이 길거리 가게에서 팔리고 있었다. 꿈이라고 아주 막 나가는 건가 싶을 정도였어.
“구한 곳이 중요해? 어차피 뱃속으로 들어갈 건데.”
“프흐, 그건 그렇지.”
낄낄 웃음을 터뜨린 제라드는 품속에서 와인 오프너를 꺼냈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현명공도 오프너를 들고 다니더니, 꽐라들한테는 오프너가 생필품 같은 건가?
“지금 마시려고?”
“당연하지. 그럼 보야르 와인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 참으라고? 이 새끼 이거 유목민보다 더한 놈이네?”
진심으로 정색하는 것이 느껴져 픽 웃음을 흘렸다.
“안주도 가져왔으니 같이 처먹어. 빈속에 마시다가 쓰러지면 다른 애들이 네 업무까지 봐야 하잖아.”
“어휴, 뭘 이런 걸 다.”
작은 치즈 상자를 꺼내자 제라드의 표정이 급속도로 풀렸다.
하여간 단순한 새끼. 술하고 안주만 있으면 세상 어디에 떨어지든 잘 살아갈 새끼.
“그런데 네가 웬일로 술을 다 주냐?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뒤질 때가 된 거라던데.”
“그냥, 뭐, 퇴근도 못 하는 놈한테 이 정도는 해줘야지.”
“망할. 마지막 만찬이었네.”
투덜거리면서도 와인 한 모금, 치즈 한 입을 번갈아가며 먹는 제라드를 보니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보다 저놈, 방금 뭐라고 했더라.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뒤질 때라고?
‘그거 개소리던데.’
넌 평소처럼 지냈는데도 죽었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고.
그냥 지인의 죽음이 조금이나마 특별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만든 헛소리야.
‘차라리 안 하던 짓을 했으면 플래그라고 생각해서 막았을 텐데.’
플래그를 막을 시간도 없이 광속으로 죽은 야박한 놈.
아니, 상대가 카간이라는 걸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혹시 한 병 더 없냐?”
“더 사려고 했었는데, 네 양심처럼 없더라고.”
단호한 대답에 제라드는 조용히 와인을 들이켰다.
평민이 보야르 와인을 한 병이나 마셨으면 호강한 거지, 어딜 더 욕심을 부려?
4과 집무실을 시작으로 각 과의 집무실을 도장깨기 하는 것처럼 돌아다녔다.
하지만 제라드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과장은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준비는 잘돼 가고 있냐?”
“부장님 오기 전까지는 그랬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왜 왔냐고 눈으로 욕하던 이드리드.
“…뭐해?”
“바쁠수록 신중하게 돌아가고, 힘들수록 정신을 굳건히 해야 하는 법. 자그마한 업무 때문에 주를 향한 기도를 멈출 수는 없지 않나.”
3과 소속 부원들과 함께 단체 기도를 드리고 있던 올리버.
“뭐야, 이번에는 부장이 짬 처리하러 온 거야?”
당장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과의 업무를 짬 맞아버린 드레이크.
“너네 과장은 어디 갔냐?”
“기, 기습 침투를 대비해서 허공을 나는 연습을 하겠다고, 잠시 외출했습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거하게 뒤틀린 발터까지.
뭔가 아쉬웠다. 4과의 팀장에서 감찰부의 과장으로 승진했으니 하는 행동도 달라졌을 거라 기대했는데, 애석하게도 하는 짓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북방에서 하던 짓을 제국에서도 했고, 팀장 때 버릇을 과장 때도 보이고 있다. 차라리 술을 처마실 때마다 다양한 주정을 선보이는 제라드가 더 다채로울 정도야.
“과장이면 과장의 품격을 보여야지. 아직도 팀장이라는 한계에 묶여있으면 되겠어?”
“부장님 또 이상한 소리 하신다. 헛소리 말고 홍차나 마셔.”
“응.”
짙은 아쉬움을 헤카테에게 토로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래, 장관까지 오른 나와 차장, 과장에 불과한 애송이들의 시선이 어떻게 같겠나. 봉황의 뜻을 참새가 알 수 없는 것처럼, 드높은 상급자의 마음은 하급자가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다들 준비는 잘돼 가고 있대?”
“그럭저럭? 예정대로 진행해도 될 것 같아.”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헤카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대귀족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건 처음이잖아. 처음이라 다들 실수하거나 버벅대면 어떻게 할지 걱정했거든.”
“대귀족이라고 해봤자 믿을 구석 없는 놈들이야. 권위와 세력이 받쳐줘야 대귀족이지, 지금 그것들은 그냥 작위만 높은 고위 귀족에 가까워.”
그 말과 함께 홍차를 마시려고 했으나, 헤카테가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져 도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왜?”
“그냥. 우리 부장님이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멋진 사람이었나~ 싶어서.”
쿡쿡 웃음을 흘린 헤카테는 내 무릎에 걸터앉더니, 볼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분명 귀여운 동생이고 막내였는데 오빠처럼 든든해졌고, 처음 부장이 된 신입이면서 노련한 상사가 된 것 같고… 이 누나는 너무 기뻐.”
쏟아지는 극찬에 괜히 볼이 뜨거워졌다.
사실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기에는 새삼스러운 말이다. 감찰부장이 되고 지금까지 7년. 그 7년 동안 나이에 맞지 않게 고위직에 올랐다거나,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는 찬사는 쉴 새 없이 들었다.
헌데 자주 듣던 말을,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말을 헤카테에게 듣자 부끄럽고도 뿌듯했다. 헤카테에게 인정받는 기분이라 그런지 어떠한 찬사보다도 달콤하게 들렸다.
‘현실에서 듣지 못한 걸 이제야 듣네.’
현실에서는 나나 너나 똑같은 팀장이었지. 같은 팀장끼리 든든함을 느끼기는 애매하니 듣지 못했던 찬사야.
물론 내 앞에는 수석이라는 단어가 붙었지만, 수석 팀장과 일반 팀장 사이에 명확한 상하관계가 있는 건 아니니 큰 의미가 없었고.
“이러다가 우리가 없어도 무럭무럭 잘 자라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난 원래 혼자서도 잘 자랐어.”
연신 볼을 찌르는 헤카테의 허리를 끌어안자, 헤카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긴. 그런 것 같더라. 우리 없이 혼자서도 열심히 잘 했어.”
허나 미소에 담긴 감정이 아까와는 달랐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벌써 밤이구나.”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창문을 바라보니, 찬란한 햇빛이 아닌 은은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환한 낮이었는데 언제 밤이 된 걸까.
‘성격 한 번 더럽네.’
누군지 모를 신을 욕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 꿈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간은 정상적으로 흘러가게 했으면서, 갑자기 시간을 가속하면 그다음은 뻔하잖아.
“이왕 헤어지는 거면 밝을 때 하고 싶었는데.”
“밝으면 미련이 생길 것 같으니 안 돼. 밤에 헤어져야 하루를 온전히 같이한 것 같잖아?”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아침에 헤어진다면 낮까지만 있어달라고, 낮에 헤어진다면 저녁까지만 남아달라고 애원했겠지. 나 스스로가 조금만 즐기다 갈 거라 다짐했음에도 말이야.
“여보.”
“응, 여보.”
“언제부터였어?”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헤카테는 다 안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그렇구나. 처음부터였구나.
내가 이 꿈속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나를 깨워줬을 때부터 헤카테는 모든 걸 알고 있었구나.
이게 꿈에 불과하다는 것도. 우리가 이렇게나마 만난 건 기적이라는 것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는 것도.
“조금 당황스럽네. 꿈으로 시작했으면 꿈으로 끝날 것이지, 갑자기 이게 무슨 전개야.”
애써 웃음을 지으며 불평했다.
“괜히 사람 복잡해지게.”
그리고 약간은 진심이기도 했다.
꿈으로 찾아온 만남이라면 마지막도 꿈처럼 장식하면 됐다. 내가 원하는 시기에 깔끔하게 헤어지면 충분했다.
이렇게 모든 걸 아는 헤카테와 작별을 하는 거라면 처음부터 이런 상태로 대화했으면 됐다. 그랬다면 헤카테와도, 그 녀석들과도 보다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거다.
아니지. 애초에 이 상황이 꿈인지 기적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내 욕망이 뒤죽박죽 발현된 꿈인지, 아니면 정말로 신과 영혼이 개입한 기적인지 알 수 없다. 이게 정사인지 야사인지 알 수가 없어.
“…진짜, 사람 복잡해지게.”
어느새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느새 헤카테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렇게 와달라고 할 때는, 제발 꿈에라도 한 번 나와달라고 할 때는 오지 않더니… 이제 좀 괜찮아지니까, 털어내고 나니까 찾아오고 말이야. 너무 치사한 거 아니야?”
“미안해.”
작은 원망에 헤카테도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우리가 찾아오면 더 힘들 것 같았어. 우리랑 같이 가겠다며 따라올 것 같기도 했고.”
부정하기 어려운 말이라 대답 없이 웃음만 흘렸다.
한참이나 계속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