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95)
로판 속 공무원 695화(696/945)
헤카테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면 지금 같은 기적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기적이 아닌 순수한 꿈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제3의 방안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희박한 확률에 마지막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같은 도박과도 같은 말에 이 순간을 걸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지금이 마지막이다. 나와 헤카테가, 이 생에 마지막으로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다.
“다른 애들은 안 와?”
“나한테 양보해 줬어. 부부의 시간을 방해하는 건 아이들로도 충분한데, 자기들은 아이가 아니라고 하더라.”
“하는 짓은 애보다도 못한 것들이 몇 명 있지 않나?”
“너도 포함해서?”
머쓱히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헤카테 입장에서는 나도 애새끼구나.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생전에 다 했대. 같이 하고 싶었던 일도 충분히 했고. 그 이상 하는 건 미련만 생기니 인사나 잘 전해 달래.”
“그럼 너는?”
배시시 웃는 헤카테를 바라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그 녀석들이 생전에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었던 일을 전부 했다면 정말로 그런 걸 거다. 나와 헤카테를 배려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만큼 배려심 깊은 놈들은 아니니까.
하지만 괜히 미련이 생길까 봐 쿨하게 떠나려고 하는 거라면, 나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헤카테는? 나한테는 좋아도 헤카테에게는 가혹한 일 아닌가?
“난 하고 싶었던 일을 못 하고 죽었거든. 오히려 지금 떠나는 게 더 싫어.”
“…그렇구나.”
썩 마음이 편해지는 답은 아니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었던 일을 못 하고 죽었다. 홀로 남은 남편으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말이지만, 그 미련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칼.”
“응.”
“몇 년 사이에 엄청 출세했더라? 제국백 후계자라는 이름은 이제 내밀 지도 못하겠던데?”
“당연하지. 일곱 명이 나눠 가져야 할 걸 혼자 독식했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헤카테가 내 코를 가볍게 튕겼다.
“그렇게 말하면 못 써. 독식이 아니라 우리가 짊어져야 하던 것도 대신 짊어진 거지.”
“그게 그거 아니야?”
이번에는 대답조차 없이 한 번 더 코를 튕겼다.
이거 은근히 아프다. 마법사인 헤카테가 나를 때려봤자 아플 리가 없을 텐데도.
“자부심을 가져. 우리가 없어서 너 혼자 나아간 게 아니라, 우리가 없음에도 거기까지 나아갈 수 있던 거니까.”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이었으나 숨길 수 없는 단호함이 깃든 얼굴.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 없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이 이상 빼는 것도 실례겠지.
“그리고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가족도 잔뜩 생겼고.”
“그러게. 나도 이렇게 많이 생길 줄은 몰랐어.”
뒤이은 말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섯 명의 부인과 일곱 명의 아이. 이 얼마나 많고도 많은 가족이란 말인가. 심지어 뱃속에 있는 북쪽이까지 포함하면 일곱이 아니라 여덟이다.
“그게 끝이야? 더 있을 텐데?”
“응?”
허나 더 생각해 보라는 듯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나한테 생긴 가족이 부인들이랑 자식들 말고 더 있나?
‘아.’
테레사도 포함해야지 참. 더 넓게 보면 제수인 제노비아와 제수(진)인 세라도 가족이고, 더 욕심을 부리면 대녀인 황태녀도 가족이겠─
“시부모님이랑 서방님. 이제 가족 맞지?”
…아.
“응. 맞아.”
“잘했어.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헤카테의 모습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7년 전에 떠난 헤카테조차 나와 가족 사이의 어색함을 기억하고 있다니. 고개를 들기 어려울 정도로 민망한 일이잖아.
헤카테의 말처럼 진작 마음을 열었다면, 진작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모님으로 여겼다면, 에리히를 동생으로 대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은 평범하게 화목한 가족으로 지내고 있지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아무튼 우리 여보가 출세도 했고, 가족도 잔뜩 만들고, 사람들한테 존경도 받는 것 같아서 기쁘기는 한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네?”
그러거나 말거나 헤카테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직 민망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조용히 경청했다. 헤카테가 나한테 남기고 싶은 말은 전부 들어야 하니까.
“우리 여보. 친구 없지?”
“뭣.”
그렇지만 이런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부인이 남편의 명치에 죽창을 꽂아 넣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가족도 많고, 상사한테 신뢰받고, 부하도 잘 이끌고, 동료들과도 잘 지내고… 너무 좋기는 한데 친구는 없는 것 같아서.”
어느새 헤카테의 눈빛은 애정 반 측은함 반으로 변해있었다.
“너 애완동물 잔뜩 기르는 거. 그거 친구 없이 외로워서 그러는 거야.”
“아, 아니…!”
본능적으로 반박을 위해 입을 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애완동물들은 내가 분양한 것이 아니라 분양을 받은 거고, 외로워서 기르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 상대기에 기르고 있는 것이며, 내 애완동물보다는 아이들의 친구라는 이미지가 강하다고. 그렇게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래서 친구 있음?’ 이라는 말에는 무슨 명분을 들먹여도 반박할 수 없다. 내가 친구 없는 아싸인 건 사실이기도 하고.
“원래 귀족은 친구 없이 고독하게…”
“서방님은 친구랑 결혼했던데?”
“…이제 와서 친구를 만드는 건 좀 힘들어.”
“힘들기는. 바로 옆에 좋은 사람 있잖아.”
기이할 정도로 확신에 가득 찬 말이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 좋은 사람이 있다고? 내 나이랑 직책을 생각하면 절대 친구를 사귈 수 없는데? 차라리 부하를 100명 더 만드는 게 더 빠를 정도로.
“폐하가 계시잖아.”
“끔찍한 소리.”
이건 아무리 헤카테의 말이라도 용납할 수 없기에 정색하고 말았다.
내가 황제와 친구라니. 원수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친구 같은 아기자기하고 부드러운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새끼랑 친구로 지낼 바에는 지즈랑 친구로 지내고 말지.
“시간이 지나면 내가 한 말이 생각날 거야. 아~ 우리 부인이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하고.”
그래도 너무 당당하길래 격렬한 부정은 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꼬박꼬박 해라. 잠을 적게 자면 몸만 안 좋아지니 푹 자라. 지금은 건강해도 늙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해라. 알아서 잘 하겠지만 좋은 사람하고만 어울려라 등.
사소하고도 따뜻한, 보잘것없지만 부드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마치 자취를 시작한 자식에게 엄마가 조언을 하는 것처럼.
‘이상하네.’
정말 이상하다. 헤카테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온갖 이야기를 잔뜩 쏟아낼 줄 알았는데, 무거운 이야기를 잔뜩 할 줄 알았는데 막상 기회가 생기니 이런 얘기만 나누고 있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떼를 쓸 줄 알았는데. 혼자서 힘들었다고 눈물을 흘릴 줄 알았는데.
물론 힘들다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것도 처음에만 잠깐 그러고 말았으니 뭐.
“아, 벌써 이렇게 됐네.”
그렇게 한참이나 애정 어린 조언을 쏟아붓던 헤카테는 창문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뭐지. 내 눈에는 아까랑 다를 게 없는 밤인데. 헤카테 눈에는 좀 다르게 보이나?
“그럼! 마지막으로, 진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갈게!”
“응 엄마.”
더 있다가 가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 헤카테라고 내가 싫어서 떠나고 싶지는 않을 테니.
“미안해.”
“…응?”
“너 혼자 두고, 비겁하게 먼저 가버려서 미안해.”
그 말과 함께 헤카테는 나를 끌어안았다.
“같이 행복하자고 했으면서, 평생 함께하자고 했으면서, 다섯이 우리를 떠났어도… 우리가 걔네를 기억하자고 했으면서, 너 혼자 기억하게 해서 미안해.”
“헤카테.”
“너한테 상처만 남기고… 도망쳐서 미안해…”
어깨가 축축해졌다. 나를 끌어안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마워.”
그래도 떨림은 짧았다. 포옹을 푼 헤카테는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무엇보다 환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나를 잊어주지 않아서. 계속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눈물을 머금었지만 도리어 그 눈물이 미소를 더욱 밝게 만들었다.
나도 변태인가 봐. 부인이 우는 걸 보고 예쁘다고 느끼고 있네.
“그러니까, 비겁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얼마든지.”
그런 헤카테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하자 헤카테의 미소는 태양보다 밝아졌다.
역시 울지 않고 그냥 웃는 게 제일 예뻐.
“나를 일곱 번째로 생각해 줘.”
“…일곱 번째?”
“응. 일곱 번째.”
의외인 부탁이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일곱 번째. 다소 맥락 없는 말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한테 여섯 번째까지 있는 건 하나밖에 없으니까.
“비겁하게 도망친 나한테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맨 끝에서라도 너랑 같이…”
“무르기 없기다?”
“으, 응?”
이번에는 내가 헤카테를 끌어안았다.
기뻤다. 헤카테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으니까. 여전히 내 부인이기를 바란다는 말이었으니까.
비록 내 곁을 먼저 떠났을지라도, 나를 싫어해서 떠난 건 아니라는 말이었으니까.
“우리밖에 없는 결혼식이지만, 신들이 지켜보고 있을 거야. 신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
그러자 헤카테는 말없이 나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눈이 떠졌다.
꿈에서 깨어나 다시금 현실에 눈을 떴다.
“칼, 일어났어요?”
“마르?”
그리고 눈을 뜨자 머리를 빗고 있던 마르가 반겨줬다.
맞다. 오늘은 마르랑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지? 꿈속에서 며칠을 보내서 그런지 순간 가물가물했다.
“좋은 꿈이라도 꿨나요? 자면서 계속 웃고 있었어요.”
“내가?”
“네.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요.”
쿡쿡 웃는 마르의 모습에 슬쩍 입꼬리를 매만졌다.
그러네. 지금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을 정도야.
“좋은 꿈… 꿨지. 깨기 아까울 정도로.”
“가끔 그럴 때가 있죠. 꿈을 이어서 꾸면 좋겠다 싶을 만큼 엄청난 꿈을 꿀 때가 있어요.”
기껏 공감해 주는 마르였지만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만약 이 꿈을 이어서 꾼다면 헤카테와 그 녀석들이 찾아온 게 아닌, 내 욕망이 발현된 꿈에 불과하다는 의미잖아.
그렇다면 다시는 꾸지 않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래야 꿈이 꿈이 아닌, 새로운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현실이 꿈보다 더 좋아서 일어났어.”
“후후, 고마워요. 하마터면 꿈한테 칼을 뺏길 뻔했네요?”
그 말에 그저 웃음만 흘렸다.
– 너희들이 전부 살아있는 꿈을 꿨다. 사고를 치는 새끼가 7명이나 있으니 미치는 줄 알았어.
장관이 이른 아침부터 초췌한 안색으로 연락을 걸기 전까지. 계속 웃었다.
‘바쁘게도 움직였네.’
나한테도 다녀가고, 장관한테도 다녀가고.
하여간 리브노만 백작 아니랄까 봐 대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