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00)
로판 속 공무원 700화(701/945)
지즈가 식량과 자재, 의류, 공산품 등을 겨울 삼국으로 옮기면, 겨울 삼국은 지즈의 등에 보드카, 초콜릿, 백담비 가죽, 흑진주 등을 채운다.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 100% 물물교환으로만 이루어지는 거래. 어째 고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오묘할 따름이다. 앞으로 크펠로펜 제국이 아니라 크펠로펜 대부족이라고 불러야 하나?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보드카와 초콜릿이 유행 중이다.”
“예?”
그리고 이 국가 단위 물물교환의 여파는 제국 사교계를 뒤흔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장관의 말이니 확실하다. 이 양반은 제국 내 물류 이동을 파악할 수 있는 재무성의 수장이자, 백작가의 가주로서 사교계에도 발을 걸치고 있으니까.
“폐하께서 보드카를 즐겨 드시는 건 이미 유명한 일이었지. 헌데 근래 맺은 조약 덕분에 보드카가 대량으로 유입되지 않았냐. 물량도 충분하니 귀족들도 폐하를 따라 하게 됐다.”
“그럼 초콜릿은요?”
“황태녀 전하께서 좋아하시니 자기 아이들에게도 먹이는 거다. 별 이유 없어.”
정말 별거 아닌 사유기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교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떨 때는 사람 새끼가 모인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암계가 난무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5살 어린아이 수준의 유행을 보여주고 있다. 대체 어떤 모습이 사교계의 진짜 모습일까.
“뭐, 재무성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기껏 타국이 충성의 증거로 보낸 물건을 폐기할 수도, 방치할 수도 없었는데 지금은 공급이 부족할 정도야.”
어깨를 으쓱인 장관은 주머니에서 루센의 초콜릿을 꺼내더니, 자기 품에 안겨있던 페디에게 하나 쥐여줬다.
“그래도 우리 페디한테 선물로 줄 양은 있으니 괜찮지만.”
“와! 감싸합니다!”
“그래. 가서 동생들하고 나눠 먹거라.”
“네!”
장관의 품에서 쏙 빠져나와 문으로 달려가는 페디.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장관이었으나,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릴 때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저도 좀 웃으면서 봐주면 안 됩니까?”
“네가 할 말이냐?”
장관의 반문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지. 나도 장관에게 웃느니 마느니 할 입장은 아니다.
‘감옥 안에 있는 걸 보면 진심으로 웃을 수 있을 텐데.’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저 양반도 슬슬 징계 스택이 찰 때가 됐는데, 왜 구금은커녕 근신 소식도 없지?
‘감찰부가 독립해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장관의 징계 사유 중 대부분은 ‘부하 관리 미흡’이었다. 내가 과장들이 사고를 쳐서 징계를 먹은 것처럼, 장관도 감찰부의 사고를 감당하느라 징계 부자로 살아갔었다.
그런데 그 감찰부가 감찰성으로 독립했다. 더 이상 장관은 징계를 먹을 일이 없을 터.
‘아쉽네.’
진심으로 아쉽다. 장관이 감옥에 있는 걸 한 번만 더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아.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어서 왔던 건데.”
이루지 못한 소원에 씁쓸해하는 사이, 장관이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의외인 말이었다. 당연히 페디랑 놀기 위해서 온 줄 알았지. 설마 다른 용무가 있어서 온 걸 줄은 몰랐어.
“너, 게르하르트라고 기억하냐?”
“당연히 기억하죠. 3년 동안 알고 지냈는데 벌써 잊었겠습니까?”
장관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역사학 교사인 게르하르트. 아카데미 파견 1년 차인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교류하며 북방에 대한 지식을 공유한 인물.
북방 역사와 문화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양반이기도 하고, 3년 동안 알고 지내며 정도 쌓았기에 나름 편의를 주고 헤어졌었다. 북방 대영주들에게 미리 말해둘 테니 현지답사를 할 거면 마음 편히 가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정작 졸업하고 지금까지 연락이 온 적은 내 결혼이나 출산 때뿐이었지만.
“아무래도 네 도움이 필요한데, 말을 못 꺼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에리히의 결혼식 때도 가문의 경사를 축하한다며 연락을 했던 게르하르트다. 얼마 전의 연락이니 그때도 내 도움이 필요했을 텐데,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끙끙거렸다는 거 아닌가.
‘역시 편히 말하는 건 무리였네.’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얼굴도 자주 보고, 내가 아카데미 감찰관이라는 딱지도 달고 있어서 심리적 거리감이 상대적으로 좁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나와 게르하르트 사이에 어떠한 접점도 없다. 게르하르트 입장에서 현직 장관 겸 제국백에게 연락하는 건 심적 부담이 큰 일이다.
그런 주제에 재무성 장관의 귀에는 어쩌다 게르하르트의 고충이 들어갔나 싶지만, 장관의 처조카가 게르하르트 밑에서 구르던 대학원생이잖아. 게르하르트의 탄식이 크리스티나에게 닿고, 크리스티나는 장관에게 말한 모양이다.
“조만간 먼저 연락해야겠습니다.”
“아니. 직통으로 하지 말고 몇 다리 거쳐서 연락해라. 네 연락받으면 기겁해서 빌빌거릴 거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에 납득했다.
먼저 용건을 꺼내지도 못할 정도로 눈치를 보는 게르하르트다.그런 사람에게 다짜고짜 연락을 걸어서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요?’ 같은 말을 하면 게르하르트가 심정지를 겪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카데미 때는 용감하기 짝이 없었는데.’
동아리실에 쳐들어와서 다짜고짜 대가리를 박던 게르하르트가 그립다.
그 시절 우리는 허울 따위 존재하지 않는 학문적 동지였거늘. 물리적 거리가 우리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제국 명예 교사로서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장관의 조언대로 여러 다리를 거쳐 게르하르트와 접촉했다.정보차장과 크리스티나를 거친 접촉이었으니 게르하르트의 부담도 상대적으로 줄었겠지.
– 마침 제도에 방문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차피 대화할 거면 연락이 아니라 직접 만나는 건 어떻습니까?
정보차장의 제안에 잠시 고민했다.
나도 통신구보다는 직접 대면하면서 얘기하는 게 더 편하고, 오랜만에 지인을 볼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게르하르트가 그걸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괜찮을까?”
– 뭐 어떻습니까. 경사 때마다 연락하는 걸 보면 대화 자체는 가능한 것 같은데요. 오히려 통신구로 부탁하는 걸 실례라고 여겨서 망설이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이 역시 타당한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대면으로 기울던 마음에 정보차장이 힘을 실어줘서 기꺼웠다. 내 독단으로 게르하르트를 소환하면 권력의 갑질이지만, 정보차장의 조언이 합쳐지면 평범한 제안이 되는 법.
– 그건 그렇고, 확실히 게르하르트 씨가 특이한 성격이기는 합니다. 비주류 학문을 연구 중이면 어떻게든 물주를 잡으려고 애쓰는데, 가장 큰 물주를 옆에 두고도 망설이니 원.
“자기 분야에만 열중한 사람이니 순수한 거지. 오히려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학문이 발전하는 거야.”
– 아니, 미취학이신 분이 학문에 대해 뭐 얼마나 아신다고…
정보차장의 말에 무심코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미취학 성인이 아닌 제국이 인정한 명예 교사니까.
어찌 일개 애송이가 명예 교사의 깊은 뜻을 알겠나.
***
이제는 제과 동아리 고문도, 감찰관도 아닌 감찰성 장관 각하나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라 불러야 하는 분의 호출.
처음에는 까마득히 높으신 분의 호출이라 잠시 망설여졌으나, 호출을 거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본 장관 각하는 일개 교사인 나에게도 정중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 아니던가.
나는 내 경험을 믿는다. 아카데미에서 3년 동안 지켜본 장관 각하는 나에게 위압적으로 행동하실 분도, 불러놓고 갈구실 분도 아니다.
‘이 기회에 직접 인사드린다고 생각해야지.’
그동안 각하께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축하 인사를 드리기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직접 대면하여 축하를 드리지는 못했다.
그때마다 기가 막히게 북방에 있기도 했고, 이미 여러 고위 귀족들이나 고위 관료들에게 둘러싸인 장관 각하다. 일개 교사가 그 사이에 끼는 건 결례라고 생각했다.
허나 이렇게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마 북방을 연구하는 학자를 갸륵하게 여긴 영원한 푸른 하늘의 자비일 터.
‘…딱 인사만 드리자.’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각하를 뵙는 건 좋지만 인사와 근황 얘기만 나누자고. 부탁 같은 건 입 밖으로 내뱉지 말자고.
물론 장관 각하시라면 내 부탁도 흔쾌히 들어주실 거다. 그러나 각하의 배려와 은혜를 받은 몸으로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부탁이기도 하다.
교사이자 학자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학문 발전에 큰 도움을 주신 은인께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다. 그럴 바에는 내가 조금 더 고생하는 게 낫지, 아무렴.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다.
“아직 북방은 제국인들에게 있어 이질적인 지역입니다. 분명 제국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미지의 지역이지요.”
이 자리는 귀족으로서 초대한 게 아니라 과거의 지인으로서 초대한 자리이니, 그때처럼 존대로 대하겠다던 장관 각하.
각하께 존대를 듣는 것은 아찔한 일이지만 이어지는 말은 더욱 아찔했다.
“그렇기에 저는 게르하르트 씨의 열정과 능력을 믿고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 다짐했습니다. 게르하르트 씨처럼 유능한 학자가 북방에 대해 연구하고, 그 결과를 신민들에게 알릴 수 있다면 북방은 미지의 지역이 아닌 익숙한 지역이 될 테니까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허나 제가 게르하르트 씨의 행보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으니, 조금 민망합니다.”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민망하다는 말로 포장했으나 그 내용은 노골적이고 직설적이었다. 나에게 고민이 있다는 걸 아니까 순순히 불라는 압박이며, 혹시 나를 믿지 못하여 입을 다무는 거냐는 은근한 섭섭함의 표시다.
이러면 곤란하다. 평범한 대화만 나누다가 헤어지려고 했는데, 각하가 먼저 직설적으로 말을 꺼내시면 회피할 방법이 없다.
‘아카데미에서도 돌려 말하는 편은 아니셨지.’
내가 어리석었다. 몇 년 동안 뵈지를 못해서 각하의 성향을 잠시 잊고 말았어.
‘어쩔 수 없나…’
결국 고민 끝에 입을 열기로 했다.
“사실 각하. 근래 저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려야지요. 저와 게르하르트 씨 사이지 않습니까.”
옅은 미소를 짓는 각하의 배려에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역천자의 생애와 그 유해… 에 관한 연구 중이었는데, 현재 북방에 남은 부족들은 역천자와 거리를 둔 부족들이라 연구가 쉽지 않습니다.”
저렇게 배려가 넘치는 각하의 심장에 대못을 박게 되었으니까.
***
푹 고개를 숙이는 게르하르트의 모습에 바로 납득했다.
어쩐지 내 눈치를 보더라니. 연구 주제가 카간이었구나.
‘북방을 연구할수록 내 과거에 대해서도 알게 됐겠지.’
나에게 절친한 친우들이 있었고, 그 친우들이 카간과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걸.
그래서 차마 나에게 카간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었던 거다.
‘괜찮은데.’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카간에게 썩 좋은 기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연구하는 학자에게 지랄을 할 정도로 트라우마가 된 수준은 아니다.
학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도와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