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02)
로판 속 공무원 702화(703/945)
카간은 대초원을 처음으로 통일한 지도자이자 북방 제일의 무인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으로 보면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의 ‘대’제사장이기도 했다. 여명 교단으로 치면 교황이나 마찬가지였지.
국가의 수장이자 최강의 무인, 종교 지도자가 사용한 무구. 상식적으로 절대 평범한 무구일 수가 없으며, 실제로 카간의 대검과 대낫은 영원한 푸른 하늘의 신물이었다. 신의 기운과 총애가 듬뿍 담긴 희대의 물건인 것이다.
‘신앙이 몰락하면서 평범한 무기로 전락했지만.’
허나 카간을 비롯한 북방 세력은 전쟁에서 패해 몰락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도 같이 무너졌고, 신물에는 더 이상 신의 기운이 깃들지 못했다. 오히려 카간을 베었던 내 검이 신물에 더 가까웠으니 오죽할까.
그렇게 신성력을 잃은 대검과 대낫은 신물이 아닌 학문적 가치를 가진 유물로 전락했으나─
– 아무래도 신앙이 회복되면서 신물도 부활한 것 같은데?
공의회 이후로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이 조금씩 회복 중인 게 변수가 되었다.
신앙이 몰락하며 신물의 가치를 잃었다? 그렇다면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신물의 가치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신앙이 많이 회복되기는 한 모양입니다.’
– 그럼! 북방에는 내 신전이 잔뜩 재건됐고, 지즈 덕분에 대륙 반대편에서도 내 이름이 알려졌잖아! 신물 하나 부활시키는 건 쉽지!
내 말에 영원한 푸른 하늘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긴. 안 그래도 세계수에 빌붙어서 신앙을 빨아먹고 있었는데, 자신에게 향하는 믿음까지 늘어났다면 그 여파가 클 수밖에 없다.신물을 영접한 게르하르트가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목소리를 듣게 될 정도로.
‘그런데 신물 좀 만졌다고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겁니까? 심지어 저 사람은 여명 교단의 신도인 정주민인데요.’
그래도 순순히 납득하기는 어려워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
신물이 귀한 물건인 건 인정하나, 잠깐 만졌다고 너도 나도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온 세상은 성자와 성녀로 가득했을 거다. 설마 게르하르트의 조상 중에 영원한 푸른 하늘의 제사장이라도 있던 건가?
– 나도 신기하기는 한데…
잠시 말을 멈춘 영원한 푸른 하늘은 한참이나 끙끙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 얘가 정주민치고는 북방에 관심이 많잖아. 솔직히 지금 살아있는 유목민들보다 더 열정적인 것 같거든?
‘그건 그렇죠.’
– 아마 북방에 대해 연구하면서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그게 신앙처럼 작용한 것 같아.
썩 설득력 있는 가설은 아니었지만 애써 납득했다. 사실 신의 목소리를 들어버린 이상 그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이 가설 외에 다른 가설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정주민 연구자의 신앙이 어지간한 토종 유목민의 신앙보다 두터운 것 같아 안쓰러울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기괴한 신앙도 언젠가는 정상 궤도에 올라서겠지.
“게르하르트 씨.”
“아, 예.”
아무튼 대충 논의를 끝내고 게르하르트를 바라봤다.
딱딱히 굳은 안색을 보니 괜히 미안했다. 갑작스레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대화 중이던 상대는 침묵에 빠졌다. 게르하르트 입장에서는 혹시 심각한 일이 터졌나 우려할 상황이지 않나.
그러니 빠르게 설명해 주자. 지금 겪은 건 절대 심각한 일이 아니라, 북방 연구자로서 둘도 없는 기회나 마찬가지라는 걸.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예.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내 비밀엄수 요구에 게르하르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방금 게르하르트 씨가 들은 목소리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목소리입니다.”
“예?”
“사실 역천자의 무구는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의 신물이어서 말입니다. 그걸 만진 덕에 게르하르트 씨와 영원한 푸른 하늘 사이에 작은 접점이 생긴 듯합니다.”
“…예?”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해한다. 나도 처음 영원한 푸른 하늘을 봤을 때는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다음날 아침. 게르하르트는 경량화 마법이 걸린 카간의 무구를 들고 저택을 떠났다.
분명 어젯밤까지는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배웅을 받으며 떠나던 게르하르트의 안색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밤 동안 영원한 푸른 하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모양이다.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조언가지.’
나도 나름 북방 전문가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범위는 철저히 대토벌 전쟁에 국한되어 있다. 대토벌 전쟁 이전의 유목민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헌데 태초부터 지금까지 유목민들을 지켜본 신이 북방 연구에 도움을 준다? 게르하르트는 북방 한정으로 걸어 다니는 아카식 레코드이자 업계 최고 고인물이 될 것이다.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흉악한 고인물이.
‘저러다 개종할 수도 있겠네.’
여명 교단의 신도로 살아온 게르하르트지만, 게르하르트는 딱히 신실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태어났더니 여명 교단의 신도여서 그대로 사는 거지.
그런 평범하디 평범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구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신이 나타났다면 종교를 갈아타도 이상하지 않다. 학자 입장에서는 논문거리를 무한정 던져주는 사람이 신이잖아. 진짜 신이 논문 작성과 연구에 도움을 주면 당연히 개종하는 게 도리지.
‘서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게르하르트의 연구가 활발해질수록 영원한 푸른 하늘 입장에서도 이득이다. 과거 찬란했던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미지의 세상이던 북방이 익숙한 세상으로 변하면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으로 개종하는 사람도 늘어나지 않겠나.
게다가 겨울 삼국은 이미 영원한 푸른 하늘에 대한 신앙이 쌓여가는 중이다. 대륙 반대편 타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제국에서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지.
‘남의 나무에 붙어서 기생하던 신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 안쓰럽고 애잔하던 신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죽은 줄 알았던 동생과 재회하고, 이교도 취급을 받던 신앙이 공인받고, 대륙 여기저기에서 신앙이 부활하고…
‘힘내라.’
솔직히 여명 교단이 워낙 굳건해서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는 건 무리겠지만, 그럭저럭 지역 전통문화 입지는 확보할 수 있을 거다.
***
오늘따라 하늘이 푸르고도 높아 보였다. 다른 존재도 아닌 하늘의 신에게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 뭐부터 알려줄까? 유목민들의 시조? 북방 최초의 부족? 북방에서 발호했던 신앙들? 말만 해!
듣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은총이라 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은총, 실로 은총이다. 유목민의 탄생과 발전을 지켜본 신에게 유목민의 역사를 들을 수 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은총이 어디 있을까?
역시 장관 각하는 내 은인이었다. 각하가 아니었다면 아카데미 3년 동안 북방에 대한 지식을 쌓지도, 북방 답사에 대한 편의를 받지도, 역천자의 무구를 확보하지도, 이렇게 신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을 거다. 내 인생이 단 한 사람으로 인해 급변한 것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역천자의 혈통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부족을 순식간에 휘어잡을 정도면 그만한 혈통이 있다는 것일 텐데, 역천자의 조상은 알려진 바가 없어서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각하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동시에 예전부터 의문이었던 걸 물었다.
혈통을 중시하는 건 귀족들뿐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사실 유목민도 혈통을 굉장히 중시한다. 가족, 씨족, 부족 단위로 활동하는 것이 유목민이니 누구보다 피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역천자의 혈통도 보통 혈통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무력이 강하더라도 핏줄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가아르 부족이, 북방이 역천자를 따르지 않았을 거다.
– 좋- 아! 그 정도는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지!
내 부탁에 영원한 푸른 하늘은 흔쾌히 수락했─
– 우선 북방으로 가자! 우데스르 씨족의 시조가 활동하던 지역부터 쫙 알려줄게!
‘예?’
생각 이상으로 섬세한 답변이라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냥 말로만 해주셔도 되는데… 기껏해야 위로 5대조 정도만 알면 충분한데…
‘시조… 부터 말입니까?’
– 응! 원래 이런 건 맨 위부터 차근차근 살펴야 하는 거야! 갑자기 어느 시점에서 계보가 확 갈라지기도 하거든!
틀린 말은 아니기에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씨족이나 부족 사이의 혼인,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재산, 서로 다른 부족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새로운 부족 등. 유목민은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유기적인 존재들이니까.
– 여기저기 많이 돌아야 할 것 같으니, 지즈한테 태워달라고 해야겠다!
‘지즈요?’
영원한 푸른 하늘의 말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즈가 누구더라. 분명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
게르하르트는 제도에 위치한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바란디가 후작령까지 이동했다고 한다. 바란디가 후작이 직접 알려준 정보니 확실하다.
하여간 성실한 양반이다. 헤어지자마자 바로 북방으로 갈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얘기겠지.’
조금은 흐뭇했다. 내 도움이 학자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으니까. 역시 나에게는 제국 명예 교사의 자격이 있어.
─라고 생각했었다.
– 지금 지즈랑 같이 돌아다니고 있어! 현지 답사면 텔레포트보다 날아다니는 게 낫지!
게르하르트가 지즈의 등에 올라탔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게르하르트를 냅다 지즈에 태울 줄 누가 알았겠나. 지즈가 아무리 나는 걸 좋아해도 아무나 태우면서 나는 성격은 아닌데.
물론 언니인 영원한 푸른 하늘의 부탁이 있으니 순순히 태웠겠지만, 지즈보다는 게르하르트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
‘처음 타면 정신이 없을 텐데.’
독수리를 타고 까마득한 상공을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것. 평범한 사람의 담력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경험이다.
혹시 지즈의 등 위에서 눈 뜬 채로 기절하지는 않을까? 하늘 위에서 매서운 바람을 맞았으니 입이 돌아가지는 않을까? 난데없는 비행에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기지는 않을까?온갖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차마 말릴 수 없었다.
영원한 푸른 하늘도 눈이 돌아간 상태 같으니까.
‘…계속 타면 익숙해지겠지.’
그리고 영원한 푸른 하늘의 말처럼 텔레포트로 띄엄띄엄 이동하는 것보다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게르하르트에게도 이로울 거다.
그러니 부디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하늘에 익숙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