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05)
로판 속 공무원 705화(706/945)
아인테르의 궁을 떠나고 얼마 후, 바란디가 후작의 연락이 날아왔다. 아무래도 아인테르에게 한 말이 샤티를 거쳐 바란디가 후작에게도 들어간 모양이다.
– 백작께서 결혼을 앞당길 것을 폐하께 요청드렸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샤티가 기뻐하고 있으니, 이 은혜를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라고 생각했지만, 바란디가 후작의 말을 들어보니 아인테르가 아닌 황제에게 직접 들은 것 같았다.
하긴. 아인테르야 3년 동안 내 담당 동아리 부원이었으니 내가 전달한 거지만, 바란디가 후작은 황족의 장인이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황제가 직접 말해주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
솔직히 황실의 간택 덕분에 아인테르와 샤티가 결혼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래도 나름 인척이 될 가문의 가주를 막 다루는 건 도리가 아니잖아. 괜히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건 사교라고 할 수 없다.
“은혜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부부나 다름없는 관계인 남녀가 따로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건의한 것뿐입니다. 그 청을 받아주신 것은 오롯이 폐하의 뜻이니, 제가 아닌 폐하의 은혜지요.”
그렇기에 나 역시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게르하르트에게 끌린 어그로를 바란디가 후작에게 토스하기. 떡상할 예정인 바란디가 후작의 권위를 황실이 품기.
순수한 의도보다는 정략적인 이유가 있는 일정 조율이지만, 딸의 결혼에 기뻐하는 후작을 향해 ‘그거 정략적인 이유니 고마워할 필요 없음.’ 같은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그럴 바에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아니, 사실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아인테르와 샤티가 따로 지내는 게 안타까운 건 진심이니까. 당장 나부터도 3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하며 여섯 부인과 결혼하지 않았던가. 아인테르와 샤티가 연인 이상 부부 미만의 관계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말할 필요 없는 걸 함구한 거지.’
그러니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말을 조금 가려서 한 거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하네.
– 당연히 폐하께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작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폐하의 결정도 없었겠지요.
아무튼 내 겸양에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 광경을 보니 편해졌던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바란디가 후작이 나보다 작위가 높기는 하나, 제국에서의 입지나 파벌 내 서열을 고려하면 내가 후작보다 위에 서있다. 이건 나도, 후작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 서열이 높아도 바란디가 후작이 후작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작이 나에게 존대를 할지라도 고개나 허리를 숙이는 건 최대한 지양하자고 합의를 봤는데,
‘딸이 걸린 일이니 바로 숙이네.’
딸의 결혼은 그 합의마저 가뿐히 뭉갤 정도의 위력을 자랑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려나?’
잠시 미래의 일을 상상했다.
내 사랑스러운 딸들. 마리아, 세실리아, 카틀레아, 알리나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아이들이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한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숙일만하구나.’
상상은 짧았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금방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였어도 바란디가 후작처럼 행동했을 거다. 작위고 뭐고, 합의고 나발이고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을 거다. 귀족의 자존심보다는 아비의 마음이 먼저니까.
게다가 바란디가 후작은 나와 달리 자식이 샤티 하나뿐이다. 내가 느낄 기쁨보다 더욱 격렬한 기쁨을 느꼈을 터.
“후작께서 이리 기뻐하실 줄 알았다면 진즉에 요청드릴 걸 그랬습니다.”
–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 지금보다 빨리 결혼했으면 하디네르 남작의 결혼식과 겹쳤을 테니까요.
“이런. 그것도 그렇군요.”
그 말과 함께 나와 바란디가 후작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귀족과 귀족의 대화가 아니라 아비와 아비의 대화라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바란디가 후작도 같은 심정이겠지.
“그럼 결혼식 때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선물은 양손 가득히 들고 갈 테니, 미리 창고 정리라도 해두십시오.”
– 하하, 말만 들어도 두근거리는군요. 기대하겠습니다.
이윽고 빛을 잃은 통신구를 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바란디가 후작은 내 결혼식 여섯 번, 에리히의 결혼식 한 번에 꼬박꼬박 참석한 VVIP 하객이다. 그동안 받은 선물을 생각하면 창고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채워줄 수 있다.
그리고 결혼식 당사자인 샤티는 차기 바란디가 후작이다. 원활한 북방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런 거에는 돈을 아끼면 안 된다. 원래 경조사 때 잘해 준 사람, 못해 준 사람은 평생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
‘뭘 줘야 하지?’
생각해 보니 호기롭게 창고 드립을 친 건 좋은데, 선물로는 뭘 주는 게 좋지?
신랑은 황제의 동생이고 신부는 차기 후작이다. 바란디가 후작도 신진 귀족이라 정치적 입지가 좁은 거지, 제국 열세 후작 중 하나라 부를 빨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단순히 축의금만 많이 주는 건 격에 맞지 않는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북방의 말이나 모피를 동원하는 편이지만, 바란디가 후작이 그 북방의 거물이잖아. 제주도 사람한테 감귤 주는 꼴밖에 더 되겠나.
‘선물을 줘봤어야 알지.’
내가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한 건 정보차장의 결혼식과 에리히의 결혼식뿐.
참고하기에는 썩 좋지 않은 예시들이다. 둘 다 머리를 굴려가며 축하할 결혼식은 아니었으니.
결국 고민 끝에 남의 지혜를 빌리기로 했다.
“결혼 선물?”
“어. 혹시 생각해둔 거 있냐?”
아인테르의 동갑이자 친구인 에리히.
딱히 에리히의 지능과 센스를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인테르의 친구라는 점을 높이 사서 에리히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이 새끼가 사람이라면 친구의 결혼 선물은 제대로 준비했겠지.
“그러게. 뭘 주는 게 좋지?”
이 금수 새끼가.
너무 당당한 대답이라 순간 손이 움찔거렸다. 조금만 방심했으면 그대로 넥 슬라이스를 날렸을지도 몰라.
“나나 아인테르나 서로 평범하게 축하해 주기로 했었거든. 우리끼리만 과하게 주고받으면 제국 밖에 있는 애들한테 미안해지잖아.”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금수 새끼에서 사람 새끼로 재조정했다.
에리히는 친구의 결혼식을 소홀히 여기는 금수 새끼가 아니었다. 오히려 친구기에 ‘우리 적당히 하고 넘어가자.’ 라고 합의를 볼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너는 뭐 받았었냐?”
“철광산.”
?
“뭐, 나는 멜르시나 후작령 쪽 이권이나 하나 주는 게 좋겠네. 똑같이 광산으로 주면 정 없어 보이잖아.”
???
‘뭐야 시발.’
잠깐이었지만 머리가 굳었다.선물로 철광산을 받았다느니, 자기는 후작령의 이권을 하나 주겠다느니. 내가 아는 에리히라면 절대 입에 담지 못할 말이다.
이 녀석이 후작의 인장을 받고 발작하던 에리히가 맞나? 제국의회 막내로 구르던 그 에리히가 맞아?
기이한 현상이다.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얹어지는 걸 싫어하던 에리히가 고위 귀족이나 할 거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
‘아.’
다소 씁쓸한 기색이 깃든 에리히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납득했다.
딱히 에리히의 성품이나 가치관이 변한 건 아니었다. 먼저 결혼한 사람으로서 아인테르에게 철광산으로 선빵을 맞았기에, 억지로 그와 비견되는 반격기를 날리는 거였다. 그게 아니라면 저 눈빛을 설명할 수가 없다.
“…평범하게 축하하겠다며.”
“황족 입장에서는 그게 평범했나 보지.”
이어지는 말에 더욱 확신했다.
에리히는 아인테르에게 농락당한 피해자에 불과했다.
“줄 거 없으면 특산품이라도 잔뜩 모아서 줘. 솔직히 황족이랑 후작 영애가 돈이 부족할 리는 없잖아. 평소에 접하기 힘든 거라거나, 의미가 담긴 선물이면 좋아할걸?”
“그렇겠지?”
“그걸로도 부족하면 형수들 영지에서 나는 특산품도 모으고.”
“그거 좋겠네.”
그럴듯한 말이기에 덤덤히 동의를 표했다.
타일글레헨 백작령과 위리디아 백작령은 물론, 레온 쪽에 있는 영지들의 특산품을 긁어모으면 제법 의미 깊은 선물이 될 거다.
거기에 울켄 공작령, 세르베트 공작령, 플란벨 백작령, 아티니 남작령, 이오네스 후작령, 시르디 남작령까지 포함하면 창고 하나를 채우겠다는 포부도 이룰 수 있겠지.
“그런데 형.”
“어, 왜.”
“아직 아인테르가 결혼하려면 몇 달은 남았는데, 벌써 준비할 필요가 있나?”
그 말에 멍하니 에리히를 바라봤다.
이 새끼. 아직 앞당겨진 걸 모르고 있었구나.
“넉넉하게 잡아도 2주 후다.”
“…어?”
“결혼식 앞당기기로 했어. 오늘 결정한 거라 모를 법도 하네.”
그러자 에리히의 표정이 다소 딱딱하게 굳었다.
“어떤 이권으로 줄지는 아직 못 정했는데…”
이 녀석도 요 며칠 동안은 바삐 움직일 것 같다.
막 결혼한 신혼이거늘.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1주 후에서 2주 후로 예상되었던 아인테르의 결혼식은 최대치인 2주 후가 되었다.
아무래도 결혼식 선물을 고를 귀족들, 하객으로 참석할 귀족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인 것 같다.
“생각보다는 잠잠하네.”
그리고 갑작스러운 일정 조율에도 불구하고, 사교계는 예상보다 잠잠했다.
완전히 조용했다는 건 아니지만 예상보다는 큰 소란이 터지지 않았다. 급하게 선물을 구하느라 비명을 지를 귀족들이 수십, 수백은 나올 줄 알았는데.
“황족과 후작가의 혼인이면 격에 맞는 선물을 준비해야 하잖아요. 평범하게 시장에서 파는 물건을 줄 수는 없으니, 보통 한참 전부터 주문 제작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구나…”
마르의 친절한 설명에 바로 납득했다.
그랬구나. 다들 선물을 준비한 상태였는데, 나랑 에리히만 뒤늦게 준비한 거였구나.
‘개노답 형제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했다. 형제라고 이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그보다 이드라펜 후작께서도 드디어 가정을 꾸리게 됐네요. 그동안 황족이 적어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는데, 이제야 한숨 돌리겠어요.”
“그러게. 작년에는 황자 전하도 태어나셨으니 겹경사도 이런 겹경사가 없어.”
상황이라는 철인의 등장으로 반석 위에 오른 황실이었으나, 그런 황실도 미약한 정통성과 극히 적은 구성원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전자는 황태녀의 탄생으로 해결됐으나, 후자는 시간이 해결할 문제기에 아직까지 황실의 아킬레스건으로 남아있었지.
그러던 중 드디어, 황제의 유일한 동생이 건강한 후작 영애와 혼인을 하게 됐다. 이제야 황실이 다시금 번영할 수 있겠다며 안도할 귀족들이 제법 많을 터.
“그래서 아버님도 가문의 보고에 있던 검을 꺼내기로 하셨어요.”
“엄청난 걸 준비 중이시네…”
“그만큼 경사스러운 일이니까요.”
쿡쿡 웃음을 흘리는 마르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가 간직하고 있던 보물 중 하나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황족의 결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