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06)
로판 속 공무원 706화(707/945)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귀족은 사교로 먹고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물론 지방에서 평온하고 조용하게 지낼 작정이라면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무방하나, 자신이 일정 수준 이상의 귀족이라면 원치 않아도 사교계의 중심이 된다. 그만큼 귀족과 사교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렇기에 고위 귀족의 경조사가 생긴다면 제국 사교계가 단체로 술렁거린다. 사교 활동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경조사이며, 이 경조사에서 얼마나 활약하느냐에 따라 그 귀족, 그 가문과의 친밀도가 결정되니까.
‘황족의 경조사면 그것보다 심하지.’
그리고 아인테르의 결혼식은 현 황제와 황후의 결혼 이후로 처음 생기는 황족의 결혼식이다. 그것도 황제의 오촌이나 육촌 정도의 아슬아슬한 혈족이 아닌, 유일한 동생의 결혼식이다. 귀족들의 눈이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다.
막말로 아인테르의 모가지가 간당간당하던 시절에 결혼식을 올렸어도 황실의 체면을 위해 제법 거대한 결혼식을 진행했을 텐데, 지금의 아인테르는 모가지가 가느다란 이름뿐인 황족이 아니다. 모든 귀족들의 공경을 받아야 할 명실상부한 황실의 일원이다.
덕분에 아인테르의 결혼식이 열릴 예정인 바란디가 후작령은 수많은 고위 귀족들의 집합소가 됐다. 북방 제일의 영지기는 하지만, 제국 전체로 치면 변두리에 불과한 영지가 제국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다.
“샤티 영애의 결혼식을 축복할 사람들이 이리도 많군요. 축하드립니다, 후작 각하.”
바란디가 후작령으로 모이는 하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덩그러니 서있는 바란디가 후작. 그런 후작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네자, 바란디가 후작은 태양보다 밝은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부족한 딸에게 과분한 축복이라 민망할 따름입니다.”
“하하, 과분하다니요. 영애가 부족하다는 것도 동의할 수 없지만, 결혼을 축하받는 것에 어찌 과분이라는 단어가 붙겠습니까.”
내 말에 바란디가 후작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눈이 부시다. 오늘은 바란디가 후작이 아니라 빛빛빛빛 후작이라고 불러야겠어.
“참. 축의금은 당일에 드리기 애매해서 미리 보냈습니다만, 제대로 도착했는지요?”
“물론입니다. 그것만큼은 과분하다고 표현해야 마땅한 선물이었으니, 백작께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바란디가 후작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게도 에리히의 지혜가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에리히의 조언대로 타일글레헨 백작령의 특산품은 물론, 부인들의 영지에서 나는 특산품도 모아서 선물했더니 후작이 만족하지 않았나. 무려 일곱 영지의 특산품이 모였기에 그 질과 양은 결코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카간의 무구도 보내고 싶었는데.’
그것까지 보내면 바란디가 후작의 머리가 복잡해질 것이기에 참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영웅이 쓰던 무구지만, 대다수의 제국인들은 ‘제국을 위협한 역적 새끼의 물건’으로 볼 테니까. 안 그래도 바란디가 후작의 조상이 우데스르 씨족인 걸로 밝혀졌는데, 카간의 무구를 가지게 된다면 제2의 역천자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건 선물이 아니라 빅엿이지.
결정적으로 단순히 잘 만든 검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썰고 다닌 무구를 결혼식 선물로 주기는 찝찝했다. 뭔가 부부의 앞날을 저주하는 것 같잖아.
“아, 후작 각하.”
“예, 백작. 말씀하시지요.”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여는 후작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티니 남작령의 장어는 황금공 각하께서도 즐겨드시는 음식입니다.”
“오…”
내 친절한 조언에 바란디가 후작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자식이 샤티 하나뿐인 후작의 손에 황금공도 즐겨먹는 장어가 있다? 아마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손주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릴 거다.
“백작의 자비로운 선물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다 제국을 위한 일이지요.”
아인테르가 건강한 자식을 낳으면 황실의 안정도가 굳건해지고, 샤티의 핏줄을 이은 자식이 많아지면 후작가의 위엄이 드높아진다.
황실이 안정되고 후작가도 행복한 최고의 결말. 이보다 제국을 위한 일은 없겠지. 나처럼 제국을 걱정하는 충신도 없을 거고.
‘최소 셋은 낳아라.’
우리 어머니가 삼남매를 낳으셨으니, 샤티도 노력하면 그 정도는 낳을 수 있을 거다. 가정의 평온을 위해서도 셋이 적당하다.
하나는 위태롭고, 둘은 정이 없고, 넷 이상은 한 사람이 낳기 과도한 숫자니까.
아인테르의 결혼식은 영원한 푸른 하늘의 신전에서 진행되었다.
황족의 결혼식을 유목민 신앙의 본거지에서 진행해도 괜찮나 싶었으나, 신부의 핏줄과 입지를 생각하면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게다가 황실이 유목민 신앙과 문화를 존중한다는 걸 과시해야 북방에 대한 황실의 장악력이 늘어나겠지.
‘어차피 공존 불가능한 이교도 아니고.’
콘스탄티나 신앙과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은 여명 교단의 공인을 받은 이교. 교단의 탄압이 아닌 존중을 받는 신앙이라면, 여명 교단과 우호 관계를 체결한 제국이라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황실의 친 이교적인 행보에 여명 교단이 유감을 표할 리가 없으니까.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여명 교단의 수뇌부가 단체로 치매에 걸렸다는 꼴밖에 더 되겠나. 다행스럽게도 여명 교단은 덩치에 걸맞은 지성을 소유한 단체다.
“신부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비의 속을 태우던 딸이었습니다. 완벽한 남자가 아니면, 자신이 인정하는 남자가 아니면, 문무를 갖추고 선량함까지 지닌 남자가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한 딸이었습니다. 덕분에 이 아비는 딸과 평생 함께할 것이라고, 후작위는 방계에게 물려줄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와중에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의 제사장으로서 주례를 맡은 바란디가 후작은 TMI를 꺼내며 샤티의 멘탈을 뒤흔들었다.
아비의 진심과 설움이 가득 담긴 말이었기에 신전 곳곳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완벽한 신랑을 원하는 철없는 딸. 일부 귀족들은 이미 겪은 일이었을 테니.
‘화났나 보네.’
아무튼 후작의 주례에 샤티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수준이지만 분명 떨리고 있었다.
이해한다. 제국의 황실을 필두로 온갖 고위직이 모인 자리에서 철없던 흑역사가 공개되었으니 얼마나 치욕적이겠나. 초원의 여전사가 아닌 평범한 영애였다면 수치심에 눈물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흑역사를 대가로 결혼식의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으니, 부디 후작의 명치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지는 말아 주었으면 한다. 난 아직 후작을 오래 보고 싶어.
“허나 신들의 가호가 있었는지, 놀랍게도 딸이 꿈꾸던 신랑감이 이 제국에 존재했습니다. 실로 완벽하고도 완벽한 남자가 제 딸과 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바란디가 후작은 하객들을 맞이하며 보인 해맑은 웃음이 아닌, 아비로서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후작으로서, 신앙의 제사장으로서, 한 딸의 아비로서 두 연인의 결혼을 축복할 수 있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그 말에 샤티의 주먹이 스르륵 풀렸다.
하객석에 앉은 나조차 후작의 표정에 뭉클할 정도였다. 코앞에서 바라보는 샤티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을 터.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운데.’
그래서인지 마음속에서 조금, 아주 조그마한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황족의 결혼식이고, 북방 유일 후작가의 결혼식이기도 하기에 화려한 축하를 해줄 생각이었다. 에리히의 결혼식 때처럼 지즈를 동원하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장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아인테르의 결혼식 때는 가만히 자리만 지키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지만 황제가 먼저 나서서 가능성을 차단했다. 안 그래도 황실의 경사라 주목받는데 더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황제가 직접적으로 말리니 어쩌겠나. 일개 신하는 순순히 따라야지.
‘아쉬워…’
지금쯤 둥지에서 배를 긁적일 지즈를 떠올리니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신수가 제사장의 딸을 축복하면 그보다 좋은 그림은 없는데.
***
이제 예비 장인어른에서 정식 장인어른이 된 바란디가 후작의 축복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하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샤티와 입맞춤을 나누었다.
년 단위의 약혼 기간을 거치고 맞이하는 결혼. 처음에는 정략으로 시작했을지언정 지금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맞이하는 결혼.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황족으로서 처음 맞이한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고, 인간 아인테르로서는 처음 얻는 가족이다.
‘지금까지 가족이라고 할 사람들이 없었지.’
부친인 상황 폐하께서는 가족에게 정을 표하는 분이 아니었다. 이복형인 황제 폐하께서는 나를 살려두신 걸로도 어마어마한 자비를 베푸신 거다.
이름뿐인 황태후가 된 모친은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동복형인 2황자는… 말할 가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 가족이, 나의 편이 생긴 것이다. 의무로 시작한 결혼일지라도 마음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의무가 시간을 거쳐 사랑과 정으로 변했다면 더더욱.
“샤티.”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기에 영애라는 단어를 버렸다. 부인에게 영애라고 부르는 것만큼 실례되는 일은 없다.
“앞으로 평생 함께합시다.”
“네. 죽을 때까지 함께예요.”
내 말에 샤티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마 내 표정도 샤티와 다를 바가 없겠지. 분명 그럴 거다.
“그런데 후작님─”
“이제는 아인테르라고 하셔야죠.”
“아, 아인테르. 전에 말했던 건 준비하셨나요?”
단호한 정정에 잠시 얼굴을 붉힌 샤티였으나, 금방 표정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아니요.”
그런 샤티를 향해 당당히 답했다. 아직 샤티가 말한 걸 준비하지 못했다고.
“네?”
너무 당당한 답이었는지 샤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아주 잠시 미뤄두었습니다.”
샤티의 당혹감이 실망으로 변하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샤티가 결혼하기 전부터 관심을 보였던 부탁이다. 당연히 준비를 하려고 했으나, 샤티를 더 기쁘게 할 방법이 떠올라 보류하였다.
“최고 권위자가 같은 장소에 있는데, 제가 급히 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더군요.”
“아.”
납득한 듯 탄성을 내뱉는 샤티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샤티라면 내 보류를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
무언가 숙덕거리던 아인테르와 샤티가 다가왔다.
“이 반지를 갈라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반지 하나를 나에게 건네며 부탁했다. 이 반지를 반/지로 만들어달라고.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씁쓸한 심정으로 아인테르가 건넨 반지를 갈랐다.
내가 뿌린 씨앗이 너무도 거대한 꽃을 피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