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19)
로판 속 공무원 719화(720/945)
나도 마르도 여행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만큼 복장은 최대한 가볍게 갖추었다.평소에 입던 시꺼먼 제복을 집어던지고 평범한 귀족의 예복을 입었지.
사실 여행 목적이라면 예복조차 내던지는 것이 편하나, 타국에서 귀족이라는 정체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괜한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평민을 등 처먹으려는 상인과 귀족을 등 처먹으려는 상인. 평민을 털려는 소매치기범과 귀족을 털려는 소매기치범.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을지는 자명한 일이지 않나.
그러니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하더라도 ‘나 귀족임.’ 이라고 광고하는 게 옳다. 게다가 요즘 귀족 예복은 가볍고 시원하게 잘 만들었더라고. 땀을 흘리며 여행할 필요는 없으니 다행인 일이다.
“칼.”
그렇게 나르베시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중 거대한 장미 정원에 이르렀고,
“어때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래요?”
장미 앞에 선 마르는 배시시 웃으며 몸을 낮추었다.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르의 붉은 머리카락은 화려하게 개화한 장미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장미 따위보다 마르가 더욱 화려했고, 더욱 아름다웠다.
그런데 설마 내가 칭찬을 하기도 전에 저런 농담을 건네다니. 평소의 마르라면 부끄러워서 쭈뼛쭈뼛 꺼낼 말일 텐데.
‘여행이 좋기는 하네.’
마르마저 분위기에 취해 저런 말을 당당히 내뱉었다. 역시 뒤늦게라도 신혼여행을 오길 잘했다.
“여기 있네.”
아무튼 장미 앞에 있는 마르의 볼을 톡 건드리자, 마르는 조금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찾는 시늉이라도 해주지. 바로 찾으면 민망하잖아요.”
“꽃이 말을 하는데 못 찾는 게 이상하지 않아?”
그 말에 마르의 얼굴도 장미처럼 변했다.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빙의 전 세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구닥다리 취급을 받았겠으나, 이 세계는 중세와 근세 사이의 어딘가다. 아무리 과거의 향기가 느껴지는 말이라도 이 시대 기준으로는 세련된 말일 수밖에 없다.
덕분에 연애 경험이 부족한 나조차 여섯이나 되는 부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거겠지. 빙의 전에는 모태 솔로였던 내가 빙의 후에는 카사노바가 됐어.
“그리고 말 안 해도 가장 예뻐서 바로 알겠더라. 장미들이 민망해하겠어.”
아무튼 무릎을 굽힌 채로 굳어버린 마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작 이 정도 애정 표현으로 부끄러워하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다. 앞으로 다른 관광지에 갈 때마다, 식사를 할 때마다, 침대에 누울 때마다 사랑을 속삭일 건데 벌써 굳으면 곤란하지.
“장미니까 들고 가야겠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마르가 스턴에 빠졌다면 진정할 시간을 주는 게 합리적이거늘, 빨갛게 변한 마르를 보니 더 놀리고 싶었다.
그래서 마르를 공주님처럼 안았다. 연약한 꽃다발을 부드럽게 쥐는 것처럼. 소중한 보물을 들고 있는 것처럼.
“카, 칼?”
“출구까지만 이렇게 있자. 장미 정원이니 장미를 들고 다녀야지.”
솔직히 내 입으로 내뱉는 말이지만 나도 부끄럽다. 빙의 전 세상에서는 어지간한 개연성을 갖춘 사람도 민망해서 꺼내지 못할 말이잖아.
하지만 참았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것 이상으로 마르의 반응이 격렬했으니까. 내 말에 파르르 떨면서도 은근히 좋아했으니까.
부인이 좋아한다면 작은 수치 정도는 감수한다. 그것이 남편의 도리다.
***
출구 쪽으로 대륙 제일 검과 그 부인이 걸어가는 걸 확인한 후, 품속에서 수첩을 꺼냈다.
대륙 제일 검은… 무력만 강한 게 아니라 부인한테도 살가운… 로맨틱한 남자…
꽃이 말하니까 바로 찾았다고 말해주는… 남자…
‘메모 끝!’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기록한 후, 다시 수첩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정말 의외인 모습이었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대륙 제일 검이라 불리는 무인이다. 오직 검에만 집중한 검에 미친 남자거나, 감정 표현이 극도로 적은 무뚝뚝한 성격일 거라 생각했는데.
“애처가였네.”
괜히 내가 다 흐뭇하다. 동경하던 사람이 검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완벽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나의 우상, 나의 길, 나의 목표인 사람에게 흠이 없다? 치명적인 흠이 있어도 애써 못 본 척할 각오도 했는데,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흐힣, 흐히히히…”
바로 지금처럼.
“저하. 품위를 지켜주십시오.”
“흐흠, 흠!”
그래도 나와 함께 왕궁에서 이 나르베시아까지 와준 베릴의 말에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신분을 숨기고 왔다지만 나는 일국의 공주. 공주가 공개된 장소에서 헤실헤실 웃는 건 지양해야 한다.
“많이 이상했어?”
“변태 같았습니다.”
생각보다 신랄한 비판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베릴이 내 소꿉친구이자 시녀기는 한데, 설마 면전에서 스토커도 아닌 변태라고 할 줄은 몰랐어.
“애초에 대륙 제일 검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거면서, 왜 멀리서 훔쳐보기나 하는 겁니까?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변태 스토커라고 합니다.”
이제는 변태에다가 스토커도 추가됐다.
매우 불경한 언사였으나 차마 화를 내지는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 모습은 많이 추하고 이상했으니.
그치만, 그치만…
“부끄러운데 어떡해!”
내 우상이 저기 앞에 있는데! 녹화 도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우상이 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
그것도 녹화 도구로 보던 진중한 모습이 아닌, 부인이랑 같이 웃고 있는 사적 모습이잖아! 그렇게 귀한 광경을 어떻게 내 손으로 부숴!
“부끄러워할 거면 왜 여기까지 오신 건지.”
“오기 전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왔겠냐! 그때는 대륙 제일 검이 왔다는 말에 눈이 뒤집혔었잖아! 나르베시아로 가겠다는 일념만 머리에 가득 찼었는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냐고!
결정적으로 외부대신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려서 차마 접근할 수 없었다. 대륙 제일 검이 아국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고 했잖아!
‘내 욕심 때문에 부부의 시간을 방해할 수도 없잖아…’
게다가 공주의 신분을 숨기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공주의 신분을 숨기면 대체 무슨 명분으로 대륙 제일 검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왕족이 아닌 귀족 행세? 실존하는 귀족가를 팔아먹는 건 곤란하고, 없는 가문을 지어냈다고 들키면 서로 어색해진다.
그렇다면 평민 행세? 내가 봐도 나와 베릴의 행색은 평민과 거리가 멀다. 애초에 평민이 왜 귀족인 대륙 제일 검에게 말을 걸겠어.
결국 신속하게 왕궁을 탈출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렇게 대륙 제일 검을 멀리서 구경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게 최선이었다.
“베릴.”
“예, 저하.”
“하늘 베는 거 보여달라고 부탁하면, 안 되겠지?”
“국왕 전하의 억장도 같이 베일 겁니다.”
이번에도 반박할 수 없는 베릴의 조언에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내 우상이 있는데. 일생에 두 번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가 있는데.
“나도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할걸.”
아르메인과 유벤의 왕자. 여명 교단의 차기 성자가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유명한 일화다. 나도 그들과 동갑이니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할 걸 그랬어. 그러면 대륙 제일 검을 보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을 테니까.
아쉽다. 너무 아쉬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국으로 갔을 거야.
“그럼 저하. 이제 그만 돌아가─”
“싫은데? 더 있다가 갈 건데?”
베릴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이번만큼은 굴하지 않았다.
대륙 제일 검에게 말을 거는 건 무리다. 일개 병사들도 휴식을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데, 귀족이 부인과 함께 타국까지 와서 즐기는 여행이다. 그 여행을 방해하면 존경하는 우상의 미움을 받을 터.
하지만 멀리서 구경하는 것만큼은 괜찮을 거다. 제일 검의 여행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
장미 정원 이후로도 여러 관광지를 둘러봤다. 확실히 처음 오는 나라라 그런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신기하더라. 해외여행은 해외여행만의 매력이 있어.
덕분에 몇 시간에 불과한 여행으로도 마르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도 마르가 기뻐하니 좋기는 한데,
‘언제까지 오려는 거지?’
작은 변수 하나가 아까부터 뒤따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로가 겹치는 행인이나 관광객인 줄 알았다. 우리가 어디 외진 곳을 골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중이지 않나. 이 거대한 항구 도시에서 경로가 겹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허나 그것이 몇 시간째 이어지고 있다면 이상한 일이 맞다.
‘다행히 마르는 모르는 것 같고.’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두 개.하나는 제법 단련한 기사의 기운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민간인 수준의 기운이었다.
나름 기척을 숨기면서 오는 중이기에 전문적으로 무예를 익히지 못한 마르는 아직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상황. 덕분에 우리의 여행은 여전히 오붓하게 진행 중이었다. 이상한 조짐을 느낀 건 나뿐이니까.
‘이를 어쩐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추격자 아닌 추격자가 달라붙은 건 걸리적거리는 일이나, 우리에게 무리해서 말을 걸거나 접촉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내가 저 추격자들보다 경지가 높기에 눈치채버린 거지.
그런 상황에서 ‘네들은 뭔데 우리한테 달라붙냐?’ 라고 말한다? 그러면 서로 민망해질 수밖에 없다. 가만히 두면 이 여행을 이어갈 수 있지만, 내가 추격자를 인지했다는 걸 밝힌다면 국가적 사태로 커지게 된다.
아마 제레노에서 온갖 놈들이 몰려와 대가리를 박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사정하며, 마르와의 오붓한 여행은 그대로 박살 날 터.
‘…모른 척하자.’
그렇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상자 속에 있는 고양이와 뒤주 안에 있는 세자는 관측하기 전까지 생사를 알지 못한다. 즉 내가 저 추적자들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국가 사이의 해프닝도, 내 여행을 방해받는 일도 생기지 않는 거다.
그리고 추적자들에게서 딱히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이들이 티티나 장생이를 보는 눈빛.’
보기만 해도 좋아 죽을 것 같은 눈빛, 아이돌을 바라보는 광팬의 눈빛이 느껴졌다. 저런 추적자가 나와 마르에게 해를 끼칠 리는 없다.
…
‘대체 뭐지?’
아니,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하네. 제국도 아니고 제레노에서 나를 열광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고?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뻔했지만 참았다.
여기서 눈치챈 기색을 보이면 귀찮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