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21)
로판 속 공무원 721화(722/945)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틀 동안 휴식에만 전념하고 나서야 겨우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기껏 칼과 단둘이서 여행을 왔는데, 칼이 장관인 걸 생각하면 인생에 두 번 오기는 힘든 기회인데… 그 절호의 기회 중 이틀이나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이 바보.’
하지만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나를 이렇게 몰아붙인 칼에게 투정도 부릴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자초한 건 나니까. 안 그래도 강한 칼에게 비료를 듬뿍 뿌린 건 나니까.
‘대체 왜 그랬어.’
어느새 볼이 화끈거렸다. 결혼하자마자 페디라는 보물을 얻은 건 전적으로 칼 덕분이었다. 3년 전에 있었던 그 강렬했던 기억을 잊고, 칼에게 먹여서는 안 될 음식들을 먹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3년 동안 칼이 부드럽게 대해줘서 기억이 희미해졌던 모양이야. 그러지 않고서 이런 실책을 저지를 리 없잖아.
그래도 교만했던 실책 덕분에 확실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르.”
배를 쓰다듬으며 우리 둘째의 태명을, 칼이 붙여준 태명을 중얼거렸다.
당연하지만 아직 둘째가 생겼다는 진단은 받지 못했다. 이제 사랑을 나누고 이틀이 지난 상황인데 어떻게 알겠어. 현시점에서는 오직 신만이 나르의 존재를 알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한 번 페디를 품어봐서 그런지, 이번에도 나르가 내 품에 안길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게 엄마의 마음이라는 거겠지?’
아무리 내가 초보 엄마라도 엄마는 엄마니까. 한 번 아이를 품어봤던 경험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업적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은은하게 느껴지던 통증은 사라지고, 주체할 수 없는 행복이 몰려왔다.
“페디는 아빠를 많이 닮았으니, 나르는 엄마 닮은 딸로 태어나는 게 좋겠지?”
이윽고 칼이 했던 말까지 떠올라 쿡쿡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를 닮은 딸. 나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거나, 아니면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딸. 상상만 해도 기쁜 일이다.
그런 딸이 태어난다면 아버님도 좋아하시겠지. 나보다는 칼의 피를 더 이어받은 페디도 귀여워하는 아버님인데, 내 특징을 물려받은 외손녀까지 태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해하실까.
‘아들이어도 좋지만.’
물론 이 엄마는 우리 나르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어도 좋아. 엄마를 닮지 않고 아빠를 똑 빼닮아도 상관없어.
그러니 우리 나르는 내년 봄과 함께 태어나주렴.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테니까. 네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도, 할아버지랑 할머니도 분명 그럴 거야.
– 똑똑
“마르. 일어났어?”
“아, 네! 일어났어요!”
그렇게 한참이나 배를 쓰다듬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잠깐 밖으로 나갔던 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으… 어쩌다 보니 손님이 생겼는데, 같이 들어가도 괜찮을까?”
“손님이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제국도 아니고 제레노에서 칼의 손님? 그것도 공적 방문이 아닌 사적 여행을 즐기고 있는 상황에서?
“네,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내 답변을 돌려줬다.
칼이 우리 방까지 데려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칼은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여행을 가볍게 여길 사람도 아니다.
사소한 용건이나 언짢은 손님이라면 칼이 알아서 쳐냈을 터. 그런 칼의 기준을 통과한 손님이라면 미소로 반겨주는 것이 옳─
“미안해. 어쩌다 만나게 된 손님이라서.”
“시, 실례하겠습니다아…”
“실례하겠습니다.”
칼과 함께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자마자 머리가 굳어버렸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금발 여인과 은발 여인. 활기찬 인상이지만 쭈뼛거리는 금발 여인과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인 은발 여인.
‘손님이, 여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안감이 몰려왔다.다소 늦은 신혼여행이지만 부부가 즐기는 신혼여행 도중에 여자가 둘이나 개입한다고? 그것도 나랑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이?
뭐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칼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칼은 믿어도 다른 여자들은 믿지 못하겠다. 칼처럼 매력 넘치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호감을 표할만하니까.
그 어마어마한 매력 덕분에 칼의 부인이 나를 포함해서 여섯이잖아. 내가 칼과 연인이 되기 무섭게, 연이어 새로운 연인들이 생겼었잖아.
“마르? 괜찮아?”
“아, 그, 네. 괘, 괜찮아요.”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세 사람을 쳐다보자, 칼이 걱정스레 물었다.
사실 안 괜찮다. 당장 저 둘에게 달려들어 너희는 뭔데 우리의 여행에 끼어드냐고, 설마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를 노리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나는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주인이자 바렌티 공작가의 일원. 두 가문의 이름을 짊어진 내가 그런 품위 없는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칼 앞에서 난폭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
게다가 엄마 품속에 있을 나르를 생각하면 언성을 높일 수 없다. 우리 나르, 엄마 배에 들어오자마자 고성을 들으면 얼마나 놀라겠어.
“참, 소개부터 해야지. 이분은 제레노 1공주이신 앨리스 저하시고, 그 옆은 앨리스 저하의 시녀인 베릴 로센 양이야.”
?
“네?”
네?
고요한 침묵과 눈빛 교환만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아까까지 매섭게 타올랐던 분노와 불안감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저 난데없는 공주의 방문에 당혹감과 어색함만 느낄 뿐.
‘앨리스 공주.’
동시에 빠르게 머리를 쥐어짜며 앨리스 공주에 대한 기억을 되짚었다.
제레노 왕국은 제국과 인접한 국가이자 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부를 자랑하는 나라. 그런 왕국의 1공주인 만큼 앨리스 공주에 대한 정보는 그럭저럭 가지고 있는 편이다.
두 오빠가 있기에 왕위와는 거리가 멀지만, 왕위와 먼 입지를 활용하여 자유롭게 살아가는 공주. 검을 동경하여 기사의 길을 택했으며, 스스로 해적 토벌에 종군한 무인.
‘아.’
바로 답이 나왔다. 정보 속에서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한 답이 있었어.
‘존경이구나.’
공주의 신분으로 기사의 길을 택한 무인. 그런 사람이라면 강한 무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대륙 제일 검이라 불리는 칼에게 격한 존경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자세히 보니 칼을 힐끔거리는 앨리스 공주의 눈빛에는 사랑의 감정이 아닌 존경의 감정이 보였다. 베릴이라는 시녀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이걸 이제야 눈치챈 게 부끄러울 정도로.
‘확실해.’
내가 칼에게 사랑의 감정을 보이는 사람을 몇이나 봤는데. 설마 그 정도도 구분하지 못할까.
칼과 결혼을 약속하기 전, 강력한 경쟁자와 다수의 경쟁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내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해서 안목을 갈고닦았지. 그 안목이 앨리스 공주는 무해하다고 외치고 있다.
“앨리스 저하께서는 왕국과 신민들을 위해 기사의 길을 걷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설마 그런 분을 여행 중에 뵙게 되다니, 에넨께서 저희를 축복하는 거겠죠?”
그렇기에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해한 사람이라면 경계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타국 공주와 좋은 연을 쌓을 기회야.
“가, 감사합니다…”
“부디 말씀을 낮춰주세요, 저하. 공주 저하께서 존대를 하시면 제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아, 아니에요! 제가 갑작스레 찾아오면서 결례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뻔뻔히 말을 놓겠어요!”
본인의 방문이 실례라는 걸 아는 염치. 내가 아는 어느 왕족들과는 달라서 만족스럽다.
“결례라니요. 저희가 타국에 온 것은 새로운 경치를 구경하기 위함도 있지만, 새로운 인연과 접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공주 저하를 뵙게 되니 반가운걸요?”
내 말에 앨리스 공주는 감동한 듯 눈을 반짝였다.
순수한 사람이다. 어쩌면 존경하는 사람이 코앞에 있어서, 존경하는 사람의 부인과 대화 중이어서 순진한 모습을 보이는 걸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앨리스 공주가 우리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칼.”
“응?”
“칼이 제국 밖에서도 이렇게 유명할 줄은 몰랐어요. 앨리스 저하는 제레노에서도 많은 존경을 받는 분인데, 그런 분이 칼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그게 고마워서 방까지 초대하기는 했는데, 정작 드릴 게 없어서 민망해.”
머쓱한 듯 웃음을 흘린 칼이었지만 눈빛으로는 나와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와 칼 사이에 무언의 대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칼. 마침 저하께서 무인이시니, 작은 선물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네?”
선물이라는 단어에 앨리스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싸고 거창한 선물은 아니지만, 칼을 열렬히 존경한다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다.
***
나르베시아로 떠난 공주 저하가 복귀하셨다.
‘살았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저하께서 나르베시아로 달려가셨다면 공주 저하의 안위와 장관의 심기를 위해 추가 인원을 보내는 게 옳으나, 괜히 사람을 보내면 장관을 자극할 수 있다.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기도만 드렸지.
다행히 그 기도가 에넨께 닿았는지, 공주 저하께서 스스로 돌아오셨다. 아직 장관 부부가 여행 중임에도 순순히 오셨어.
“외부대신! 이것 좀 보세요! 대륙 제일 검이 직접! 서명해 준! 검이에요!”
‘아.’
허나 ‘제발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조심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하기 위해 공주 저하를 찾아갔다가, 저하가 붕붕 휘두르는 검을 보고 절망하고 말았다.
스스로 돌아오신 건 맞지만 순순히 오신 건 아니었다. 공주 저하는 장관과 접촉한 채로, 정체를 들킨 채로 돌아오신 거였다.
[ 제레노 제일의 여걸, 앨리스 뉴드아의 앞길에 찬란한 영광과 아름다운 기사도가 있기를 기원하며.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아아…’
검날에 진하게 적힌 검은 글씨에 눈을 질끈 감았다.
[ 사사롭게 접촉하면 레온처럼 죽여주마. ]이제 원본도 생각나지 않는 제국 외무성의 통보가 떠올랐다.
‘휴가… 써야겠지?’
아니, 반드시 쓸 거다. 앞으로 몰아닥칠 폭풍을 생각하면 휴가로 잠시 숨이라도 골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과로로 죽을 거다.
“하늘을 베는 것도 보여주고 싶지만, 타국에서 함부로 쓸 수는 없으니 미안하다고 했어요! 정말 배려심 넘치죠!?”
해맑은 공주 저하의 목소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만약 나르베시아의 하늘이 갈라졌다면 국왕 전하는 옥좌에서 기절하셨을 거다.
‘은퇴… 할까?’
장관의 입국 이후로 매일 품속에 넣고 다니던 사직서가 울부짖었다.
내가 은퇴하면 후임이 될 자가 안쓰럽지만, 솔직히 누가 될지도 모를 후임 따위보다 내 정신 건강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