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22)
로판 속 공무원 722화(723/945)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해외 팬과의 즉석 팬미팅이 이루어졌으나, 내 사인검… 이렇게 말하니 뭔가 명검 같네. 아무튼 사인이 적힌 검을 받은 앨리스는 빠르게 왕궁으로 복귀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 국보로 간직할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무례를 자비롭게 넘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의 호의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 물러가던 앨리스와 그 옆에서 정중히 고개를 끄덕이던 베릴.
그 광경만 봐도 베릴의 업무 강도가 대충 짐작됐지만, 앨리스 정도면 대륙 왕족 중에서 순한맛에 속한다. 베릴이 그걸 안다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 텐데.
“활기찬 분이셨죠?”
“그러게. 왕족이면서 기사의 길을 택한 사람이라 그런지 엄청 활발하더라.”
마르의 말에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류티스도 왕족인 주제에 기사의 길을 택한 별종이지. 마침 류티스와 앨리스는 동갑이라고 하니, 류티스의 여자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
‘아니지.’
황급히 끔찍한 생각을 털어냈다. 그런 생각 하는 건 앨리스에게 큰 실례다.
류티스였다면 내가 신혼여행 중이든 아니든 ‘온 김에 대련 한 번만 붙어주십쇼!’ 라고 부탁했을 거야. 적어도 앨리스는 내 여행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었어.
‘미안하다.’
속으로 앨리스에게 사과를 했다. 비교할 사람이 없어서 류티스하고 비교를 하다니. 고작 검에 사인만 해주고 돌려보낸 게 마음 아플 정도의 실수다.
그러니 언젠가 앨리스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선물이라도 보내자.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일대일 팬미팅도 한 해외 팬이잖아.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지.
“그럼 손님도 갔으니, 우리는 계속 놀아볼까?”
그때는 검이 아니라 갑옷에 사인을 해서 보내겠다는 다짐을 한 후, 마르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나르 아빠.”
그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미 마르의 머릿속에는 나와 마르의 둘째가 생긴 모양이다.
팬미팅 이후에 즐긴 관광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앨리스와 베릴처럼 누군가 따라붙는 느낌도 없었고, 실례를 저질렀다며 제레노에서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경고가 확실하기는 했나 보네.’
외무성을 통해 제레노에 전달했던 통보. 어디까지나 사적 방문이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다행히 제레노는 제국이 말하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온순한 국가였다.
물론 앨리스라는 돌발 상황이 터지기도 했지만 그건 예외로 두자. 피해라고 할 것도 없었고, 서로 웃으며 끝난 일을 굳이 짚고 넘어갈 생각은 없다.
‘왕족은 행정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존재지.’
애초에 왕족의 기행은 고위 귀족이나 대신이라도 막을 수 없다. 나보다 그 슬픔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이해하고 배려해야지.
지금쯤 제레노의 외부대신을 필두로 여러 대신들이 눈물을 흘린 채 기절하고 있을 거다. 어쩌면 품속의 사직서를 만지작거리거나 휴가로 긴급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다. 나였다면 그랬을 거거든.
그래서 앨리스에게 유감을 표하지도, 제레노 행정부에 ‘너네 공주 똑바로 관리 안 하냐?’ 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죽고 싶은데 건드리면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하는 건 품위가 없는 행동이지 않나. 내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제발 저린 제레노가 납작 엎드릴 텐데, 굳이?
오히려 침묵을 지키면 내가 자비를 베풀었다고 고마워하며 더욱 극진하게 모실 게 뻔하다. 내가 업무적인 이유로 다시 제레노와 접촉할 일이 생기면, 한 번 정도는 제레노가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오늘의 일을 꺼내들 테니.
“칼. 이거 먹어볼래요?”
“오, 이런 것도 파네?”
결정적으로 지금 중요한 것은 제레노 길들이기가 아니라 마르와의 오붓한 데이트다.
항구 도시라 그런지 넘쳐나는 해산물. 부가 몰리는 도시라 그런지 갖가지 향신료와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진 요리들. 덕분에 마르는 길거리에서 팔던 음식 중 통오징어 튀김을 하나 들고 왔다.
설마 기름을 사용하여 튀긴 음식을 길거리에서 가볍게 팔 줄은 몰랐다. 기름이 대량으로 소모되는 음식은 평민들이 쉽게 접할 음식이 아닌데.
‘이런 곳이니 리조트를 뜯어왔구나.’
새삼스럽지만 황금공이 나르베시아의 리조트를 뜯어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부유한 도시라면 귀족 관광객들이 몰리는 건 당연하고, 나르베시아 현지의 평민들도 괜찮은 소비력을 자랑하겠어.
“어때요? 입에 맞나요?”
“마르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지 맛있네.”
직접 만든 것도 아닌 가져온 것에 불과한 음식이지만, 아무튼 손길이 닿기는 닿은 거다.
“후후, 그래요?”
내 극찬에 마르는 살포시 미소를 짓더니 다리 하나를 뜯었다.
“그럼 직접 먹여준다면 더 맛있─ 소, 손가락까지 먹으면 안 돼요!”
“므은흐. 느므 므싯쓰서 그믄.”
“아, 알았으니까 일단 입부터 빼주세요…”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로 중얼거리자 마르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유치한 장난이었지만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역시 마르는 당당하게 공격을 걸었다가 바로 반격을 당할 때의 격차. 그 격차에서 나오는 수줍음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변태 같은 취향이지만 뭐 어떤가. 이미 볼 거 다 본 부부 사이인데. 이 정도 투닥임은 애교 수준이지.
“마르가 먹여줘서 더 맛있어.”
“먹여준 게 아니라 칼이 뺏어간 거잖아요.”
씩 웃으며 입을 빼자 마르는 다소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부부간의 오붓한 먹여주기 기회가 사라져서 서운한 것 같았다.
“마르.”
그런 마르를 위해 다리를 하나 뜯고, 끄트머리를 입에 물었다.
“…칼?”
이윽고 다리 반대쪽을 마르 쪽에게 들이밀었다.
막대 과자가 아니라 오징어 다리로 이런 걸 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먹여주기보다는 이게 더 훈훈하고 오붓한 행동 아니겠나. 마르도 분명 좋아할 거라 믿는다.
“카, 칼. 아무리 그래도 길가에서 이러는 건 좀…”
실제로 입으로는 난색을 표한 마르였으나, 눈은 내가 문 오징어 다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좋네.’
그 모습을 보니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혼여행이라 그런지 이런 풋풋한 감정마저도 신혼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물론 결혼 3년 차도 신혼이라 부르기 충분하지만.
황금공이 얻은 것은 리조트뿐만이 아니었다.
“각하께서 두 분에게만 개방하라고 하신 해변입니다. 두 분이 나오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으니,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무려 리조트가 소유하고 있는 해변. 그중 가장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을 VVIP 전용 느낌으로 제공받았다.
설마 리조트에 해변까지 귀속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황금공이어도 타국의 건물이 아닌 영토를 뜯는 건 무리니, 처음부터 리조트에 해변이 속해있었다는 뜻인데…
‘원래 주인도 정상은 아니었네.’
대체 뭐 하는 양반이길래 이런 리조트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전생에 무슨 업보를 저질렀길래 이런 리조트를 뺏겼을까.
속으로 얼굴 모를 원 주인에게 소소한 애도를 표했다. 그래도 도시나 영지 자체가 몰락하는 것보다는 리조트 하나 내어주는 게 이득이지, 아무렴.
“둘만이 있는 해변이라니. 수학여행 때도 누리지 못한 호사네요.”
“그러네. 바다는 보통 다 같이 갔지, 둘이서 간 경우는 드물었어.”
나와 단둘이 바다에 있어본 사람은 오직 린밖에 없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둘만의 해변 데이트는 린의 업적 아닌 업적이 되었지.
정작 당사자인 린은 해변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흠칫 하지만 말이다.
“귀국하면 우리도 이런 해변 하나 구해볼까? 북방은 조금 추우니까, 체네스 공작령 쪽이면 되겠는데?”
“보야르가 아니고요?”
“거긴 너무 비싸. 체네스면 친척이니 조금 싸게 주지 않겠어?”
“후후, 돈이 아니라 술 주고 사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마르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건 그렇지. 현명공이라면 돈보다는 같은 가치의 술을 더 높게 쳐주겠지.
“…칼.”
“응.”
“칼이 제 남편이라 정말 다행이에요.”
새삼스러운 고백이라 말없이 마르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나도 마르가 부인이라 좋아.’ 라고 말했겠으나, 마르의 분위기를 보니 지금은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 칼한테 처음 차이고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칼과 같은 관료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지루했었어요. 아카데미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누군가와 만나는 것도 그다지 즐겁지 않았죠.”
그렇게 말한 마르는 배시시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만약 칼이라는 목적이 없었다면, 하다못해 칼이 아카데미 감찰관으로 오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마르라면 훌륭히─”
“아마 제가 생각해도 재미없고 딱딱한 사람이 됐을 거예요. 그만큼 저에게도, 남에게도 차가운 기준을 내세우며 모두의 미움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내 입술에 검지를 댄 마르. 마치 자신의 말을 더 들어달라고 떼를 쓰는 것만 같았다.
“목표를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의 언행을 지적하는 학창 생활을 보냈겠죠. 그러다 리제가 제과 동아리를 만들게 되면, 어딜 감히 남작가의 영애가 고귀한 핏줄과 어울리냐며 성을 냈을 수도 있고요.”
차마 부정할 수 없는 가능성이라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마르는 내가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리제의 동아리 생활을 지적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와 접촉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으나, 내가 없는 평행세계였다면 고작 명분으로 끝났을까? 진심으로 리제를 지적하고 몰아붙이지 않았을까?
그만큼 마르는 품위와 예의를 중시하니까. 그런 마르가 딱딱하고 차가운 도시 여자로 각성했다면 그 지적이 결코 가벼울 리 없으니까.
“그렇게 됐다면… 저와 리제의 사이는 지금처럼 좋지 못했겠죠.”
이번에도 부정할 수 없었다. 마르의 순한 지적에도 울음을 터뜨렸던 리제다. 진심 펀치에는 우는 수준을 넘어서 혼절했을 수도 있어.
“그러니 다 칼 덕분이에요. 칼이 제 인생에 나타나줘서, 칼이 아카데미에 찾아와줘서, 칼이 저의 마음을 받아줘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거예요.”
“영광인 말이네. 내가 없었어도 마르는 잘 살았을 텐데.”
“물질적으로는 그랬겠지만, 지금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았겠죠.”
어느새 마르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사랑해요, 칼. 이미 알고 있겠지만 한 번 더 말하고 싶었어요.”
수줍지만 당당한, 작지만 큰 사랑 고백.
“나도 사랑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치만 공동 1등이죠?”
“그건 어쩔 수 없지.”
쿡쿡 웃음을 흘린 마르는 내 입술에 입맞춤을 하더니,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칼.”
“응.”
“수영복. 보고 싶으세요?”
“엄청.”
머리를 거치지 않은 대답이라 나도 마르도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신혼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는 썩 나쁘지 않은 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