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25)
로판 속 공무원 725화(726/945)
아르메인의 요청이 일개 왕자의 만행이 아닌 검묘 회의의 결과라는 걸 알자마자 저택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이거면 되겠네.’
그리고 창고에 박아두었던 검 중에 적당히 고급스럽고, 적당히 튼튼한 검을 찾았다.
류티스의 돌발 행동이라면 아르메인 국왕이 중재한다는 기대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검묘 회의 결과라면 아르메인 국왕조차 막을 수 없다. 아르메인은 검묘 회의를 무엇보다 신성시하니까. 검묘 회의의 결과는 아르메인의 최우선 국책 사업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제국과 아르메인 양국의 우호 관계를 위해서라도, 황제와 외무성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원하는 걸 던져주는 것이 옳다. 거절해 봤자 끊임없이 질척거릴 게 뻔하거든.
‘미친놈들.’
검의 품질을 살피다가 한숨을 토해냈다.
미쳤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고작 검 하나를 갖기 위해서 아르메인 군부의 고위직과 원로들이 전부 모이다니. 그게 말이 되냐고.
물론 억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장사로 먹고사는 나라에도 그런 보물이 있는데, 당연히 기사왕국인 우리한테도 있어야 체면이 서지 않나?’ 라는 결론이 나온 걸 수도 있다. 아르메인은 기사왕국을 자칭하는 극강의 숭무주의 국가지 않나. 그런 국가라면 하늘을 벤 무인의 검을 탐낼 수 있다.
그래도 그걸 냅다 정식 외교 창구로 요청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난 류티스와 빌라르 중 빌라르가 아르메인 평균치인 줄 알았는데, 아르메인 평균치는 빌라르보다 류티스에 더 가까웠구나…
‘끔찍한 나라다.’
갑자기 애국심이 솟아올랐다. 속으로는 블랙 국가, 블랙 국가라고 욕을 하기는 하지만, 제국 정도면 대륙에 있는 국가 중 상위권이지. 아무렴.
‘…이거 그냥 줘도 되나?’
그렇게 검을 들고 창고에서 나가려던 찰나, 작은 불안감이 생겼다.
양국 우호를 생각하면 원하는 대로 주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아르메인이 떼를 쓴다고 순순히 넘기는 선례가 생기는 건 곤란하지 않나? 아르메인이 앞으로도 검묘 회의를 남발한다면, 다른 국가가 그 모습에 자극을 받는다면 제국은 거대한 ATM이 될 수도 있다. 이거 때리면 돈 나와요─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그건 안 된다. 아무리 만들기 쉬운 물건이라도 쉽게 주는 건 외교적으로 좋지 않다.
‘그렇다고 안 주기도 묘한데.’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순순히 주는 건 제국이 호구의 길을 걷는 것이니 지양해야 한다. 아예 증여를 거부하는 건 아르메인의 폭주를 야기할 테니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르메인에게 선물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국이 선심을 쓴다는 느낌으로 넘겨야 하는데,
“저하께 좋은 소식이 생긴다면 그때만큼은 동아리 고문과 학생의 관계로 축하하겠습니다.”
‘아.’
아까 전, 류티스에게 예의상 했던 말이 떠올랐다.
괜찮은 명분이 하나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황제를 찾아갔다.
“검묘 회의가 열렸었다고?”
“예, 폐하. 류티스 왕자의 말이니 거짓은 아닐 겁니다.”
내 확답에 황제는 실소를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이게 정상인의 반응이다. 에리히는 검묘 회의가 뭔지 몰라서 눈만 끔뻑였으나, 나나 황제처럼 검묘 회의의 무게를 아는 자들은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없다.
“가장 최근에 열린 검묘 회의가 25년 전이었지.”
“예. 소신의 기억으로도 그렇습니다.”
“당시 검묘 회의에서 논했던 주제는 아르메인 중앙군 내 보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것이었고.”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의 말처럼 25년 전에 열렸던 검묘 회의에서는 대대적인 숙군이 결정되었다.
사유는 약 30년 전에 있었던 첫째 장인어른의 매콤 펀치 덕분이었다. 당시 매운맛을 본 아르메인은 자신들의 체제에 회의감을 느꼈고, 군 내부 과격파 숙청 및 중앙군의 정예화를 위해 대대적인 숙군을 강행했었지. 현 아르메인 대원수인 네르카프 백작은 숙군 작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하며 명실상부한 아르메인 군부 1인자로 등극했다.
그랬던 검묘 회의가 25년 후에는 이 꼬락서니가 됐다. 아마 아르메인 국왕도 지금쯤 헛웃음을 흘리지 않을까?
어쩌면 국왕도 똑같은 놈이라 오매불망 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일 수도 있지만, 그것만큼은 아니기를 빈다.
“검묘 회의라면 주기는 줘야 할 텐데.”
아무튼 실소를 흘리던 황제는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창고에서 했던 고민과 같은 고민을 하는 모양이다. 주기는 줘야 하는데 순순히 주면 귀찮아지고, 안 주면 아르메인의 빈정이 상할 거라는 고민을.
“폐하. 어차피 주게 될 선물이라면 경사에 맞춰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경사?”
내 말에 의자에 축 늘어져있던 황제가 꿈틀꿈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예. 저와 류티스 왕자의 연이 작지는 않으니, 류티스 왕자가 혼인을 하게 된다면 그 기념으로 선물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제국의 선물이 아닌 저 개인의 선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장관이 개인적으로 보내는 선물이라.”
제법 솔깃한 말이었는지 황제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내 명의로 보낸다면 지인의 경사를 축하한다는 명분도 있고, 제국이 공식적으로 아르메인의 요구에 응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우회적으로 돌리면 제국의 ATM화를 피할 수 있다.
게다가 제레노 왕국이 가지고 있는 검도 제국이 준 게 아니라 내가 선물로 준 거잖아. 누구는 제국이 주고, 누구는 내가 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헌데 언제 결혼할 줄 알고?”
“그건 아르메인이 알아서 하겠지요. 빨리 가지고 싶다면 빨리 진행하는 것이고, 여유가 있다면 천천히 할 테니까요.”
그러자 황제는 픽 웃음을 흘렸다.선택의 의무를 제국이 아닌 아르메인에게 떠넘기겠다는 말이었으니까.
“좋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군. 하디네르 남작을 통해 전달해 보게.”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확실히 공식 창구를 통해서 ‘너네 왕자가 결혼하면 선물로 보내줌.’ 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적당히 에리히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전달하는 게 좋다.
‘장하다, 우리 동생.’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왕족과 직통 연락이 가능하여 외교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동생이라니. 이보다 훌륭한 동생이 어디 있을까.
나 대신 제국의회에도 출석해 주고, 공식적으로 움직이기 난감한 외교 활동도 해주고. 역시 에리히에게 레온 왕국의 후작위를 선물로 준 건 옳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다용도로 유능한 귀족에게는 후작위 정도는 있어야지.
“참. 장관?”
“예, 폐하.”
“아르메인으로 선물을 보내게 되면 제레노에 준 것과는 다른 종류로 주게. 종류까지 같으면 제레노가 서운해하지 않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맞는 말이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이라는 카테고리 내에서도 종류는 수십, 수백 가지가 있는 법. 이왕 주는 선물이라면 새로운 걸 주는 게 좋지.
앨리스 공주한테는 평범한 한손검을 줬으니, 류티스한테는 대검이나 던져줘야겠다.
***
에리히가 특이한 말을 했다.
– 네가 결혼하면 형이 선물로 검 하나 보낸다고 하더라.
“그거 듣기만 해도 기쁜 일이군! 국보급 물건을 선물로 준다는 거 아닌가!”
무려 대륙 제일 검의 서명이 적힌 검을 선물로 준다는 말. 무인으로서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아국이 검묘 회의까지 진행하며 노리던 검을 아무 대가 없이 준다는 말이기도 하지 않나. 비록 결혼이라는 작은 조건이 붙기는 했으나, 그건 축하할 명분을 위해 예의상 붙인 조건에 불과하다. 사실상 신경 쓰지 않아도 무방할 수준.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부왕 전하와 숙부에게 전달했고,
“괜히 말했나.”
그 뒤로 은근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네 나이도 어느덧 스물둘이지 않더냐. 너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우는 벌써 둘이나 결혼했는데, 너도 슬슬 가야 하지 않겠느냐?”
결혼에 대한 요구가 이전보다 더욱 거세진 부왕 전하.
“저하. 홀로 자유를 누리는 것도 중요하나, 가정을 꾸리는 것도 남자의 행복 중 하나입니다. 오히려 가장이기에 볼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결혼은 그 사람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던 숙부의 태세 전환.
“저하의 선택을 존중하겠습니다.”
최근 이런저런 업무에 시달렸는지, 초췌한 안색으로 말하던 빌라르 경까지.
요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자 절로 쓴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내 결혼에 어마어마한 인질이 잡힌 덕분에 모두가 내 결혼을 원하고 있다.
‘이건 못 버틴다.’
아무리 내가 왕자라도 이 전방위적인 압박은 버틸 수 없다. 검묘 회의의 결과는 부왕 전하도 거스를 수 없거늘, 3왕자인 내가 무슨 능력으로 버티겠나.
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하고 싶다고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고, 격에 맞는 결혼식장을 준비하고, 하객들이 모이기 편한 시간을 조정해야 진행할 수 있는 것이 결혼이다. 아마 당장 준비해도 내년은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내년 운운하면 왕궁 지하에 감금당할 것 같지만.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뒷목을 긁적거리다가 수련장 구석에 있는 페로사 경을 바라봤다.
나와 가장 친밀하고 마음이 맞는 여자를 고르라면 페로사 경밖에 없다. 루이제 이후로 누군가에게 이리도 큰 관심을 가진 건 페로사 경이 처음이다.
‘흐으음.’
성격도 은근히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하고, 검에 대한 열정도 비슷한 여인.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오른 빌라르 경의 딸이자, 명문 무가인 가넬리 가문의 일원.
‘페로사 경만한 사람이 없긴 하군.’
문득 빌라르 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던가?
‘빌라르 경도 압박 좀 당했겠어.’
생각해 보면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로, 페로사 경과 대련을 명목으로 자주 붙어 다녔다. 내가 페로사 경에게 친밀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 터.
덕분에 페로사 경의 부친인 빌라르 경도 온갖 압박을 받았을 거다. 빨리 나를 설득해서 결혼까지 이어가라고,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알아서 결혼할 것 같은데 등 좀 밀어보라고.
‘미안하네, 경.’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경에게 못할 짓을 했어.
***
류티스가 내년 여름 정도에 결혼할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약혼은 몇 주 후에 할 예정인데, 어차피 보낼 검이라면 그때 보내줄 수 있느냐는 말도 같이 왔다.
‘이게 뭔.’
고작 검 주제에 없던 결혼 소식도 만들어버리다니. 경이롭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