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29)
로판 속 공무원 729화(730/945)
일단 사왕의 부활 소식은 철저히 통제하기로 했다.
수백 년 전에 대륙의 거악으로 군림했던 존재가 갑작스레 재림했다? 이런 소식을 공개적으로 알려봤자 백성들의 혼란만 야기할 뿐이지 않나.
물론 정보를 통제하기만 한다면 사왕 근처에 있는 백성들을 제물로 던져주는 꼴이다. 그래서 정보를 풀지는 않되, 몇몇 군단에게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경계 태세를 지시했다. 이러면 사왕이 꿈틀거리자마자 최소한의 방어, 최소한의 대피 작업이 가능하다.
“하명하신 대로 남부 방면군 소속 군단 일부에게 경계 태세를 하달했습니다. 동부 방면군이 움직일 경우 타국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터이니, 조용히 끝내고자 한다면 남부 방면군으로 사왕을 막아야 합니다.”
“교국에서는 아직 사왕의 힘이 미약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국 남동부에서 느껴지는 사기는 분명 사왕의 것이지만, 드높은 신성력을 자랑하는 전투 사제단도 정신을 집중해야 겨우 느낄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황제의 집무실에는 나와 황제 외에도 제국군의 수장인 전승공, 제국 내 여명 교단 인사 중 최고위 사제인 리시우코 추기경이 추가되었다.
철저한 정보 통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원만 모인 상황. 그만큼 제국과 신성교국이 이 일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왜.’
진지한 얼굴로 논의 중인 셋을 바라보다가 씁쓸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제국에서 황제의 허락 없이 일이 진행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전승공이 참석한 것도 당연하다. 근위 1군단이나 황실 기사단 같은 일부 전력을 제외한다면, 제국군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승공을 거쳐야 한다.
리시우코 추기경? 제국 내 최고위 사제이자 신성교국에서 보내는 정보를 바로 습득할 수 있는 사람이다. 리시우코 추기경 없이 이번 사태에 대처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대체 왜.’
하지만 나는? 명목상 휴가 중이고, 업무도 감찰인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사왕도 제국 땅에 있으니 감찰하러 가라─ 뭐 이런 건가?
당장이라도 탈주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심각해서 참았다. 제국의 공작과 추기경도 모인 자리에서 ‘전 이제 가볼게요.’ 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미약하다면 그보다 좋은 기회는 없군. 교국이 출정일을 정했다면 제국도 그에 맞추도록 하지. 언제인가?”
“논의 중입니다.”
“논의?”
추기경의 말에 황제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조금 의외의 발언이기는 했다. 사왕의 흉악함은 제국보다 신성교국이 더 잘 알고 있잖아. 800년 전에 사왕과 싸운 건 교국이지 크펠로펜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 흉악한 거악이 가장 약한 시기에, 토벌대가 빠르게 움직여야 할 시기에 아직도 논의 중이라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결단이다. 심지어 신성교국 본국이 제국 추기경에게 전달할 정도면 빠르게 끝날 논의도 아닐 터.
“예, 폐하. 교국에서는 다섯 번의 종소리를 검토 중입니다.”
‘아.’
허나 이어지는 말에 납득했다.
교국은 사왕의 흉악함을 높이 평가했기에 논의를 진행하는 거였다. 다시 나타난 사왕을 철저히 두들겨 패기 위해서, 교국의 모든 전력을 동원하기 위해서.
‘다섯 번의 종소리면 어쩔 수 없지.’
여명 교단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에네스티예에는 성 토그라 대성당이 존재하고, 성 토그라 대성당의 가장 높은 곳에는 거대한 종이 걸려있다.초대 교황이 썼던 작은 종을 녹인 후, 추기경들의 축복이 담긴 재료들을 추가하여 제작한 거대한 종이.
그리고 이 종을 다섯 번 울리는 것이 다섯 번의 종소리다.
“다섯 번의 종소리면 교황 성하의 부담이 클 텐데, 괜찮겠는가?”
“대륙의 안위를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성하께서는 모든 각오를 하셨습니다.”
다섯 번의 종소리를 언급하자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황제마저 놀란 기색을 보였다.그만큼 교국에서 종을 울린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다.
‘사실상 총력전 선언이니 가벼울 수가 없지.’
과거 종교 전쟁 시기, 무수히 많은 이교를 두들겨 패며 승리한 여명 교단은 투쟁이 아닌 자비와 평화의 길을 택했다. 무력으로 난세를 평정했으니, 앞으로는 도덕으로 치세를 아우르겠다는 결정이었다.
그렇기에 당대 여명 교단의 수뇌부는 성 토그라 대성당의 종 앞에서 다섯 가지 약속을 했다.
“타인의 행동을 무조건 그릇되다 여기지 말지어다.”
“타인의 말을 무조건 반박하지 말지어다.”
“타인의 악업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생각할지어다.”
“타인의 악행에 자비를 베풀고 관용을 보일지어다.”
“타인의 피를 함부로 태양 앞에 보이지 말지어다.”
종교 전쟁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당대 성자, 멜리노스의 이름을 따서 ‘멜리노스의 맹세’라고 불리는 약속.
멜리노스의 맹세로 인해 호전적이던 여명 교단은 평화적이고 온순한 교단으로 변했다는 평을 받는다. 물론 여명 교단에 먼저 시비를 거는 이교나 이단에게는 얄짤없었으나, 아무튼 나름 자비와 관용을 베푸는 온화한 집단이 되었다.
허나 신의 명이 아닌 사람이 한 맹세는 사람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법. 성 토그라 대성당의 종을 울린다는 것은, 그 맹세를 거두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종 한 번을 울리면 타인의 행동을 혐오한다.
종 두 번을 울리면 타인의 말을 경멸한다.
종 세 번을 울리면 타인의 악업에 분노한다.
종 네 번을 울리면 타인의 악행에 자비를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다섯 번을 울리면 그 호로 새끼의 사지를 찢어 태양 앞에 피와 시체를 바친다.
여명 교단이 반드시 처 죽여야 할 적을 지목하여, 그 적이 죽을 때까지 교단의 모든 역량을 꼬라박겠다는 총력전 선언. 그것이 다섯 번의 종소리다.
‘공의회에 이어 다섯 번의 종소리라.’
황제가 교황을 염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 교황의 치세에 이런 대형 이벤트가 연이어 터지면 교단 내에서 피로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황의 차후 행보가 극히 한정되고, 혹은 교황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썩 긍정적인 결과는 아니다.
“논의도 어디까지나 종을 울릴 시기와 선언문을 조율하기 위함입니다. 종을 울리는 것 자체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가.”
“예, 폐하. 그리고 종이 울리는 즉시, 대륙 각지의 성기사단과 사제단이 일제히 사왕 토벌을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그 말에 황제와 전승공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교국이 진심이라는 건 긍정적인 소식이나, 눈이 뒤집힌 성기사단과 사제단이 일제히 국경을 넘어온다는 건 썩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교단의 총력전을 방해하는 건 ‘나도 같이 패주세요.’ 라고 과시하는 꼴이다. 게다가 사왕 토벌에 교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제국 홀로 토벌해야 하고.
“교국의 헌신과 희생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성하의 결단에 에넨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그래서인지 황제는 금방 표정을 가다듬으며 의례적인 덕담을 남겼다.
나흘 후, 성 토그라 대성당의 종이 다섯 번 울렸다.
군사적 이유로는 800년 전의 사왕 토벌전 이후로, 정치적 이유로는 300년 전의 아펠스 수뇌부 전체 파문 이후로 처음 울린 종.
“주께서 원하신다! 주 앞에 악적의 피를 바치리라!”
“위대한 선현들께서 이룩한 평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악적의 목을 베고 사지를 대륙에 흩뿌려라! 이 대륙에 태양이 비치지 아니한 곳 없고, 태양의 불꽃을 견디는 자 또한 없으리!”
아무튼 수백 년 만에 울린 종 덕분에 대륙 각지의 교단 관계자들은 피에 미친 광신도로 각성하고 말았다.
이 제도에도 적지 않은 숫자의 성기사들과 전투 사제들이 있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조용하고 봉사 활동까지 하던 양반들이 하루아침에 미치광이가 되는 광경은 기이함을 넘어 경이로울 정도더라. 종 하나 울렸다고 세상이 이렇게 바뀌다니.
“장관. 들으면 절로 웃음이 나올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겠나?”
“경청하겠습니다, 폐하.”
“짐은 아직 즉위한 지 5년도 지나지 않았다네.”
“…….”
“그런데 즉위 기간 동안 온갖 일을 다 겪는군.”
“…….”
가슴 절절해지는 한탄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장관.”
“예… 폐하.”
“제국 역사에 짐처럼 온갖 혼란에 시달리는 황제가 다시 나올까?”
“폐하께옵서 온갖 역경과 시련을 해결하고 계시니, 폐하의 뜻을 잇는 후대의 황제들은 태평성대를 누릴 것입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포장이었지만 황제가 개처럼 고생하고 있다는 건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남의 고통이 내 고통보다 가벼워 보인다지만, 즉위 5년도 찍지 못한 황제에게 이런 이벤트가 연이어 몰리는 건 내가 봐도 흉악한 상황이다.
힘내라, 우리 개새끼. 원래 쇠도 두드려야 강해진다고 하잖아. 너도 이 시련을 넘기면 강한 황제가─
“아. 그러고 보니 교국에서 장관의 참전이 가능하겠냐고 묻더군. 복자이자 대륙 제일 검이 나서준다면 그보다 든든한 일은 없을 거라며 말이야.”
‘이 느그 개새끼가.’
순간 입이 꿈틀거렸으나 겨우 참았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문의다. 교국 입장에서는 과거의 악몽을 지우기 위해 모든 걸 동원하고 싶을 것이며, 황제는 교국의 요청을 나에게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사왕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제국 영토잖아. 교국의 토벌대가 무너지면 피해를 보는 건 결국 제국이다.
“제국과 대륙을 위한 성전에 어찌 발을 빼겠습니까. 사왕조차 제국의 이름 앞에서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고맙네, 장관. 장관 덕에 어떤 역경이 짐에게 닥쳐와도 버틸 수 있는 것 같아.”
황제의 위로 아닌 위로에 쓴웃음만 지었다.
솔직히 휴가 중에 종군하는 건 끔찍한 일이나, 사왕 토벌이 실패하면 내 가족들이 사왕의 활동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다.사왕이 가장 약한 시기에 전력으로 쥐어패야 그런 참사를 피하겠지.
‘망할 새끼.’
사왕인지 나발인지 만나기만 하면 바로 사/왕으로 만들어주마.
신성교국 토벌대한테 최대 도핑을 부탁하고, 그 도핑을 담아 하늘 베기를 날리면 사왕도 작살낼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