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32)
로판 속 공무원 732화(733/945)
리시안느의 충격적인 자기소개에 연신 헛웃음만 나왔다. 개소리 취급하기에는 사왕의 던전에 홀로 덩그러니 있던 여인이다. 가슴이 인정하지 못해도 머리는 리시안느의 말이 진실이라 외치고 있다.
‘이름에 죽음이 붙은 것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이냐.’
대륙의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던 사왕이다. 순리를 거스르며 망자들의 세상을 만들었던 사왕이다. 종교 전쟁에서 승리한 후로 승승장구하던 여명 교단에게 치명적인 빅엿을 먹인 사왕이다.
그런 흉악한 존재기에 사왕도 막연히 신적 존재나 몬스터 같은 개념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설마 평범한 인간 출신일 줄은─ 그것도 여명 교단의 추기경일 줄은 누가 예상했을까. 솔직히 여명 교단의 교황도 몰랐을 거다.
죽음이라고 불리던 장생이도 지금은 작디작은 요크셔테리어인데. 대체 죽음이란 존재는 뭘까.
‘사왕이면 해골로 이루어진 네크로맨서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리시안느의 모습을 훑어봤다.
죽음이라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하늘색 머리와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 누가 봐도 온화한 인상의 미녀라고 칭할 정도로 정상적인 외견이었다.
혹시 저 옷 아래로 피부 대신 바로 뼈가 있는 건가? 그럼 내가 생각하던 사왕 이미지와 유사하기는 한데.
“참. 수백 년 만에 오신 손님을 계속 서있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내가 침묵을 지키자 리시안느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그러자 나와 리시안느 사이에 생겨난 하얀색 티 테이블과 의자.
‘미치겠네.’
그 기적 같은 광경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에서 유가 생기는 것은 어떠한 마법사나 사제도 이루지 못하는 위업이니까.
물론 이곳은 공간 법칙이 일그러진 사왕의 본거지다. 자신이 개조한 공간인 만큼 테이블 하나, 의자 몇 개를 만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터.
‘어디까지 조작할 수 있는 거지?’
허나 단순히 사물 몇 개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군세를 한 번에 일으킬 수 있다면? 다짜고짜 허공에서 거대한 바위를 연속으로 떨어뜨린다면?
상상만 해도 탄식이 절로 나올 일이다. 도대체 베를로는 이런 존재를 어떻게 이긴 거지?
“우선 자리에 앉아주시겠어요? 신사분과 함께 들어온 손님들이 이곳까지 오려면 며칠은 걸릴 거예요.”
“며칠?”
“제가 미로 하나는 잘 만들거든요. 옛날에는 고아원의 아이들과 미로 찾기 놀이를 하며 놀고는 했죠.”
쿡쿡 웃음을 흘린 리시안느는 먼저 자리에 앉더니, 이번에는 차와 과자를 소환해냈다.
‘일단 어울리자.’
짧은 고민 끝에 나 역시 자리에 앉았다.
리시안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공간 속에서 다짜고짜 전투에 돌입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마침 리시안느도 나를 적대하는 듯한 반응은 아니었으니, 일단은 대화를 나누며 상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설마 사왕과 정상적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봐서 마땅한 대화 주제가 떠오르지 않는다.
“신사분. 혹시 따로 좋아하는 차가 있나요?”
“아무거나 상관없다.”
내 대답에 리시안느의 눈매가 더욱 휘어졌다.
“후후, 뭔가 두근거리네요. 저보다 수백 살은 어린 분에게 계속 반말을 들으니, 저도 젊어진 기분?”
기이하기 짝이 없는 반응인지라 리시안느가 사왕이라는 걸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어딜 어린 새끼가 찍찍 반말을 내뱉느냐는 돌려까기가 아닌, 진심으로 기뻐하는 목소리였으니까. 육체가 멀쩡한 대신 뇌는 맛이 간 상태였어.
뇌가 돌아버렸으니 추기경이었던 사람이 사왕으로 전직한 거겠지만.
“신사분께만 몰래 말씀드리는 거지만, 전 연상이 취향이에요. 전부 죽어버려서 더 이상 제 연상은 없지만요.”
“그, 렇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애매한 농담이라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제가 사왕이라 불리기 시작한 건 25살부터였죠. 신체 나이만 따지면 26살부터는 제 연상일지도?”
실없는 말이었지만 내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을 여명 교단의 추기경이라고 소개했으니, 사왕이 되기 전에 추기경 자리까지 올랐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왕의 길을 걸은 게 25살부터다?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25살에 추기경이 됐다는 말이잖아.
‘미친 인재다.’
20대 중반에 추기경이 된, 어쩌면 그보다 젊은 나이에 추기경이 되었을 인재. 그런 인재가 어쩌다 교단의 적이 되었을까.
“궁금한 게 많으신 표정이네요.”
내 혼란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리시안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젊은 나이에 추기경까지 오른 사람이 뭘 잘못 먹고 이런 길을 택한 건지, 수백 년 전에 패했던 괴물이 왜 다시 부활한 건지. 손님분이 이해하기는 어렵겠죠.”
“궁금하면 직접 설명해 주기라도 할 건가?”
“흐으음~”
고민된다는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리시안느.
“좋아요. 손님분이 이렇게 빨리 오신 것도 인연. 딱히 숨길 것도 아니니 말씀드리죠.”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교단의 위선과 한계가 얼마나 명확한지 말이에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다.
여명 교단에서는 주가 언제 어디서나 신도들을 굽어살핀다고 가르친다.
에넨이 유일신으로 군림하기 전까지는 태양의 신이었기에. 하늘에 고고히 떠있고, 모든 것을 비추는 거룩하고 뜨거운 태양이기에.
그래서 에넨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따스한 신이며, 동시에 인간들의 죄악을 감시하고 징벌하는 뜨거운 징벌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여명 교단에 입교한 신도라면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가르침이에요. 그냥 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착하게 살고, 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간단한 가르침이니까요.”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한 종교라면 전부 가지고 있는 권선징악의 가르침이지 않나.
선량하게 살면 에넨이 기특하게 여겨 천상으로 데려가거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게 해주고, 악업을 저지르면 뜨거운 지옥불에 타들어가게 된다. 그보다 직관적이고 명확한 가르침은 없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요? 이 세상을 굽어살피는 유일한 신이, 모든 생명들을 자식처럼 보듬는 신이 정말로 악인들을 징벌할까요?”
“뭐?”
허나 이어진 말에는 절로 반문이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악인이면 당연히 징벌해야지. 나라에서도 국민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내리는데, 신이라도 다를 게 있나?
“자식이 투정을 부리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훈계하는 게 부모예요. 절대 미워하고 구타하는 부모는 없죠.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보듬고 나아가야 할 존재니까요.”
“글쎄. 살인이나 강도를 자식의 일탈로 보는 건 이상한 것 같은데.”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그래요. 하지만 신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과 지혜, 권능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자비는 인간과 같은 수준인 거죠? 신의 도량이 인간 수준이라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면 그 존재를 섬기고 공경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 리시안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저도 이것까지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어요. 신이 드넓은 자비로 모든 사람들을 보듬으면 인간 세상은 혼란에 빠지겠죠. 어차피 마구잡이로 살다가 죽어도 신께서 용서하시는데, 뭐 하러 선량하게 살겠어요.”
“그걸 알면서─”
“그럼 이교도는요?”
이교도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황혼 교단이 떠올랐다.
여명 교단이 정말 쥐 잡듯이 쥐어패고, 아주 개박살을 냈던 그 이교도들이.
“다른 신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지옥불에 떨어져야 할까요? 태어났더니 부모가 이교도라 자연스레 다른 신을 믿었고, 태어난 지역의 주류 종교가 이교였던 사람은… 그곳에 태어났기에 죄가 되는 건가요?”
리시안느의 말에 마땅히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난 신앙에 큰 관심이 없는 데다가 종교로만 삼중 전공을 찍은 놈이다. 그런 놈한테 ‘이교가 죄인가?’ 라고 하면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잖아.
“선량했지만 이교라서 지옥불에 떨어진 자들. 가족과 친우를 사랑했지만 다른 신을 섬겨 지옥불에 떨어진 자들. 그런 자들이 정녕 고통받아 마땅한 자들이냐고 물어보니, 교황은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게 우리의 길이라고 하셨지요.”
“…맞는 말 아닌가?”
“그럼 답을 찾기 전까지 불타고 있을 가련한 영혼들은요?”
어느새 리시안느의 눈에는 평온함이 아니라 미세한 광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다른 추기경들도 지옥불에 있을 영혼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아무리 선량해도 이교를 택한 건 큰 죄악이니 불로써 정화해야 한다고, 잘못된 선택에 대한 죗값을 치르면 올바른 신앙인으로 환생할 거라고 했죠. 그들에게 있어 이교는 그 자체로 죄악이었어요.”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봤다.
망할. 타락한 추기경이 종교 얘기를 꺼낼 때부터 화제를 돌려야 했는데. 괜히 정보 좀 얻겠다고 듣기만 해서 이 난리가 났네.
“그래서 저는 다른 길을 찾았어요. 모든 것을 보듬는다고 하는 주제에 제 자식을 지옥불에 처넣는 신을, 고작 다른 신을 섬겼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신을 섬기기에는 구역질이 났으니까요.”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온 리시안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양팔을 펼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제 길을 찾았어요. 정말 전지전능하다면 처음부터 모든 인간을 선량하게 만들 수도, 이교가 아닌 여명 교단의 아이로 만들 수 있었던 주제에 인간을 방치한 신이 아닌… 살아있을 때는 관망하다가 죽은 이후에 차별하는 신이 아닌…! 진정으로 공정하고 공평한 신을!”
리시안느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기껏 집어넣었던 검을 다시 꺼내야 할 것 같─
“바로 에넨조차 고전하게 만들었던 존재! 죽음을!”
…
?
“뭐?”
“후후. 손님분은 모르시겠지만, 종교 전쟁 시기에는 에넨조차 위협하던 강대한 신들이 있었답니다. 그중 가장 드높고 위대한 존재가 죽음이었지요.”
“아니, 그…”
알고 있다. 아마 내가 너보다 그 녀석에 대해 더 잘 알 거다.
“죽음은 모든 존재에게 공평한 개념. 죽음이라는 개념이 신격화한 리디에 라 글렌디엣은 그야말로 모든 생명들을 전부 포용할 수 있는 존재.”
리디… 뭐?
‘이름이 따로 있었어?’
그냥 죽음이 아니라?
“저는 그분의 흔적을 알게 되고, 그분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비록 위대한 그분은 위선으로 가득한 에넨에게 봉인되어 음성조차 듣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분을 뵐 날이 올 거라 믿고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리시안느의 말이 길어질수록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죽음을 지배하는 그분의 힘을 통해… 지옥불에 고통받고 있을 가련한 자들을 다시 대륙으로 불러들였죠. 비록 육체는 썩어서 활동하기 불편했겠지만, 영혼이 끊임없이 불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런가?’
게다가 내 머리도 슬슬 리시안느의 주장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육체는 잠깐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법. 영원히 영혼이 불탈 바에는 잠깐이나마 썩은 육체로 도피하는 게 이득이겠지.
그리고 단순히 이교라는 이유로 영혼을 불태우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진정한 신이라면 이교라도, 악인이라도 보듬었어야 한다. 마치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처─
‘이 미친.’
빠르게 손가락 하나를 꺾었다.
“칫.”
그와 동시에 리시안느도 혀를 차며 아쉬움을 표했다.
“눈치가 빠른 분이네요. 아니, 정신력이 굳건하다고 해야 하나?”
“정신 조작인가?”
“정신 조작이라니요. 그런 흉흉한 표현이 아니라 영혼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거라 해주시겠어요?”
그게 더 흉흉한 표현 같았지만 리시안느는 한쪽 손을 나에게 뻗었다.
“뭐, 됐어요. 말이 통하지 않으면 행동으, 로?”
갑자기 손을 멈춘 리시안느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 저기…”
그러고는 아까보다 급격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혹시… 죽음을 가까이서 모시는 분인가요?”
“…….”
그 말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