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733)
로판 속 공무원 733화(734/945)
나와 리시안느 사이에 장생이라는 접점이 생기자 리시안느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공손히 무릎을 꿇으며 양손을 가지런하게 허벅지에 올린 모습. 마치 상급자를 맞이하는 하급자의 자세라 절로 탄식이 나올 뻔했다.
“이토록 강렬한 죽음의 기운. 분명 그분의 사도시겠죠.”
아니야.
“에넨의 졸개들과 함께 오셔서 당연히 저를 토벌하려고 오신 줄 알았는데, 저를 이곳에서 꺼내주려고 오신 분이었군요!”
아니라고.
“그런데 이상하네요. 죽음의 기운뿐만 아니라 에넨의 기운도, 그 외에 여러 기운들도 10개가 넘게 느껴져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시안느를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10개.’
일단 나에게 깃든 신의 기운만 해도 에넨, 영원한 푸른 하늘, 콘스탄티나─ 이렇게 세 가지가 존재한다. 이건 나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3개가 아니라 10개가 넘는다? 리시안느가 장생이의 기운을 느낀 것을 볼 때, 그 기운들의 주인은 명확한다.
‘근심과 죄악.’
이제는 우리 집의 애완동물로 완전히 정착한 열한 마리의 성수들. 그러나 종교 전쟁 시기에는 근심과 죄악이라는 흉악한 이름으로 불리며 군림한 악신들.
아무래도 그 녀석들의 기운이 나에게 들러붙은 모양이다.
‘이제 신격도 없다며.’
이상한 일이다. 분명 영원한 푸른 하늘은 악신들의 신격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더 이상 신성을 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 녀석들은 우리 아이들의 놀이 상대이자 장난감으로 지낼 만큼 평범한 생명체로 전락한 지 오래다.
혹시 영원한 푸른 하늘이 평소처럼 실수를 한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여명 교단의 사제들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어. 나한테 흉악한 기운이 느껴졌다면 사왕 토벌대가 칼 토벌대로 변했을 거다.
그럼 리시안느가 장생이의 흔적을 발견한 죽음의 사제여서?
‘그거밖에 없다.’
여명 교단은 모르지만 사왕만 아는 기운. 아무리 생각해도 리시안느가 죽음과 밀접한 존재여서 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리시안느의 입만 확실하게 통제하면 ‘감찰성 장관은 죽음의 사도다!’ 같은 정신 나간 소리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
‘처리하자.’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입단속은 살인멸구다. 리시안느를 다시 재와 먼지로 돌려보내면 죽음의 사도라는 흉측한 타이틀도 사라질 터.
애초에 나는 사왕을 없애기 위해 휴가 중임에도 종군한 거다. 사왕이 평범하게 생겼다는 것도, 여명 교단 추기경 출신이라는 것도 의외지만 토벌을 보류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검을 들어 올리자, 리시안느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사도님?”
“누가 사도야.”
난 여명 교단의 복자다. 이 망할 이교도.
사왕이라는 이름을 너무 가볍게 봤다.
머리가 잘리고 가슴이 꿰뚫려도 멀쩡했다던 일화는 오히려 순화되어서 전해내려 온 기록이었다.
“역시 죽음을 가까이서 모시는 사도시군요! 과거에도 사도님처럼 강한 무인은 본 적이 없어요! 베를로조차 신성력과 성법이 흉악했던 거지, 무력 자체는 사도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겠죠!”
머리만 덩그러니 남은 상태에서도 눈을 반짝이며 재잘거리는 리시안느.
‘망할.’
그 기괴한 광경에 뒷목을 잡고 말았다.
정말, 정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리시안느를 처리하려고 했다. 목을 베는 건 기본이고, 가슴도 수십 번은 꿰뚫었고, 사지도 자르고, 몸 전체를 갈기갈기 찢기도 했다. 그럼에도 리시안느는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했다.
혹시 머리가 회복력의 근원인가 싶어 머리도 박살을 냈지만, 머리 파편이 스멀스멀 한곳에 모이더니 다시 복구됐다. 아예 가루 수준으로 분쇄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하늘 베기도 날렸는데. 카간이나 탈라, 도르곤을 상대하는 심정으로 쥐어짜서 날렸는데…
‘왜 안 죽는 거지?’
하늘 베기를 직격으로 맞았는데도 리시안느는 멀쩡했다.
정확히는 화려하게 가루가 되어 흩날리다가 다시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너 도대체 어쩌다가 진 거냐?”
결국 리시안느를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쌓이던 의문을 내뱉었다.
도대체 베를로라는 성자는 어떻게 리시안느를 처리한 거지? 아무리 성자가 에넨의 총애를 받는 존재라지만, 이 미친 회복력을 상쇄할 파괴력을 선보일 수가 있나? 그만큼 신성력의 유무가 사왕 토벌의 핵심인 건가?
“아, 그거 말인가요?”
어느새 가슴 부근까지 복구된 리시안느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는데, 반대로 제가 베를로를 이길 자신도 없었죠. 그럴 바에는 회복을 포기하고 죽어서 훗날을 기약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훗날을 기약해?”
“제가 죽음의 잔재를 찾아 이 길을 택한 것처럼, 언젠가는 제 뒤를 잇는 후배님이 나올 거라 생각했어요. 그럼 저를 되살려서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하지 않았겠어요? 저 하나로도 벅차했던 교단은 죽음의 사제를 둘이나 상대해야 하고요.”
그렇게 말한 리시안느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설마 후배님이 아니라 사도님이 친히 와주실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좋죠.”
‘시발.’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진실에 눈을 감아버렸다.사왕은 교단에게 패한 것이 아니었다. 성자도 사왕에게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리시안느의 자발적 빡종으로 인해 기권승을 얻은 것에 불과했다.
‘이걸 어떻게 죽여.’
에넨의 아들이라 불리는 성자마저 죽이지 못한 사왕. 그런 사왕을 이제 와서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현재의 리시안느는 나를 장생이의 사도로 착각하고 있지 않나. 나한테 들러붙으면 붙었지, 절대 800년 전처럼 자발적 최후를 맞이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후배가 부활시켜주기를 바라며 최후를 택한 리시안느인데, 후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부활한 거지?
‘설마.’
멍하니 리시안느를 보다가 불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봉인지에 박혀있던 장생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당시의 장생이는 아직 죽음이라는 신격을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 중이었다. 혹시 그때 세상에 퍼진 죽음의 기운이 죽어있던 리시안느를 자극한 건가? 이제서야 부활한 건 그 기운이 극히 미미해서 그런 거고?
제발 아니었으면 하는 가설이지만 동시에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다. 고작 후배 따위가 아니라 죽음 자체에 닿았다면 리시안느가 다시 부활해도 이상하지 않다.
‘장생이 이 새끼야.’
저택에서 세쌍둥이에게 빨래를 당하고 있을 장생이를 떠올렸다.
이 망할 놈아. 네가 기운 관리 똑바로 안 해서 이런 일이 터졌잖아.
“저기. 사도님.”
“사도 아니라고.”
“그럼 대선배님?”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마 800년 전의 인물에게 대선배라는 말을 들을 줄 상상이나 했겠나.이 망할 던전에 들어온 뒤로 상상도 못한 일을 많이 겪고 있다.
“능력 검증도 끝난 것 같은데, 저도 죽음을 모실 수 있는 거죠?”
“뭐?”
“방금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만큼 유용한 종도 없을 거예요. 죽음께서도 흡족해하실 테니, 제가 죽음께 간다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다시 리시안느의 머리를 머/리로 만들었다.
이게 어디서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어.
***
사왕의 던전에 돌입하자마자 이변이 생겼다.내 옆에 있었던 타일글레헨 백작이 사라진 것.
제국의 주요 인사이자 토벌대의 핵심 전력이 사라진 상황에 나도, 타니안 형제님도 급히 토벌대를 움직였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시체들에게 도로 안식을 선사하고, 행군을 방해하는 모든 지형을 억지로 돌파했다.
다행히 백작의 무력이 무력인지라 잘못될 가능성은 낮으나, 이곳은 800년 만에 다시 생긴 사왕의 본거지다. 긴 시간 떨어져 있으면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최대 속력으로 백작을 찾아 나섰고,
“오셨습니까?”
“각하?”
초췌한 안색으로 반쯤 부서진 머리를 들고 있는 백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왕입니다. 막 부활한 데다 이런 대규모 던전을 만든 직후여서 그런지, 홀로 토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에 황급히 백작이 들고 있던 머리를 살폈다.
하늘색 머리카락과 붉은색 눈의 여, 인? 훼손이 심해서 성별은 확신할 수 없지만 의외로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사왕이 저런 모습이었다고? 죽음의 왕이라길래 시체들이 뒤엉킨 모습이거나 뼈로 이루어진 줄 알았는데?
‘놀랍군.’
나도 모르게 탄식 섞인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일단 백작이 거짓말을 할 리도, 사왕의 본거지에 민간인이 있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백작이 홀로 사왕을 토벌한 것은 사실일 거다.같은 무인으로서 존경심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교단의 추기경으로서, 토벌대 총사령관으로서 부사령관인 백작을 지키지 못하고 홀로 싸우게 했다. 대규모로 몰려온 우리는 잡졸만 상대하고, 백작 혼자 사왕을 처리한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차마 백작을 볼 염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다섯 번의 종소리까지 울린 교단이 외부인인 백작에게 의지한 꼴이다. 교단이 해야 할 일을 세속의 귀족에게 떠넘긴 꼴이다.
성 토그라 기사단장이라는 직함도, 태양의 검이라는 찬사도 지금만큼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 무능한 놈에게는 너무도 과분한─
“토벌대 덕에 사왕 토벌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예?”
백작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예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왕은 일신의 무력보다 이끄는 군세가 더욱 난관인 존재입니다. 헌데 이곳을 보십시오. 오직 사왕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 군요. 실로 기이한 일입니다.”
“사왕의 군세는 토벌대를 막느라 몰려가서, 정작 사왕을 지키는 병력은 없었습니다. 덕분에 사왕과 일대일로 싸우게 되었지요.”
이윽고 백작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교단의 헌신과 정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예하.”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각하.”
백작의 배려에 나도 허리를 숙였다.
백작 덕분에 토벌대와 교단은 최소한의 면을 세울 수 있었다.
***
토벌대가 사왕이 있던 공간을 조사하는 사이, 조용히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이동했다.
“나와.”
“네.”
품속에 숨어있던 미니 사이즈 리시안느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게 맞는 건가.’
사왕이 아니라 사-엄지공주가 되어버린 리시안느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뿐만 아니라 토벌대 전원이 합공을 해도 죽일 수 없는 존재. 제발 죽음을 보고 싶다며 징징거리는 존재. 눈이 뒤집히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흉악한 존재.
덕분에 눈물을 머금고 이런 선택을 하고 말았다. 계속 거절하면 리시안느가 토벌대 전체를 인질로 삼을 수도 있고, 장생이 때문에 부활한 존재니 장생이가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신격을 잃은 장생이기에 큰 기대는 없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곳에 희망을 가져야지.
‘작정하고 숨어 다니면 찾지도 못하겠네.’
씁쓸히 리시안느를 바라보다가 마른 세수를 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시체를 만들고 본체를 빼돌린 리시안느는 특유의 사기마저 완벽하게 숨겼다. 내 근처에 있던 타니안과 추기경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이게 최선이다.’
그래, 이게 최선이다. 리시안느의 요청을 거절해서 리시안느가 토벌대를 인질로 잡거나, 작정하고 토벌대를 따돌리면 거대한 재앙이 대륙을 활보하는 꼴이다.
그러니 이 방법이 최선이 맞는데, 분명 맞는데…
“사도님. 아직 젊으신 것 같은데 그렇게 인상 쓰고 다니면 주름 생겨요.”
“조용히 해.”
리시안느의 도발 아닌 도발에 리시안느를 도로 품속에 집어넣었다.
‘여차하면 아텔리우스라도 찾아가야 하나?’
오래 산 드래곤이니까 죽지 않는 언데드를 처리할 방법도 알 것 같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